•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Ⅴ. 교통·운수·통신
  • 1. 도로의 정비
  • 2) 외방 도로의 정비
  • (2) 교통 장애의 극복

(2) 교통 장애의 극복

도로의 기능을 크게 저하하는 장애물은 산악과 하천이다. 우리나라는 넓은 영역을 보유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산맥이 얽혀 있고, 그 사이로 강과 개울이 흘러 교통을 방해하고 있다.

전국의 도로가 집중하는 수도 한양의 주위에도 삼각산·인왕산·무악재·목멱산·관악산·청계산·도봉산 등이 서울으로의 진입을 억제하고 있고, 서울의 남쪽에는 한강이 가로놓여 있어 이를 건너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정부에서는 산허리를 뚫어 길을 내고, 강에는 다리를 놓아 통행의 편의를 꾀하였다.

중앙집권적 사회에서의 교통 문제는 국가 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조선왕조 개창을 전후하여 추진된 일련의 개혁 조치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리하여 15세기에는 국력이 크게 신장되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이 커지게 되었다. 중앙집권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통치 체제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교통과 통신, 그리고 운송 체제가 정비되어 갔다. 새 왕조의 교통 정책도 이같은 집권화 운동의 일환으로서 추진되고 전개되었다. 지방통치를 보다 강력히 행하기 위해서도 교통망의 정비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따라서 교통 장애가 있다고 하면 이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 당면 과제였던 것이다.≪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전국의 간선도로는 앞에서와 같이 9개였다.0848)≪增補文獻備考≫권 24, 輿地考 20, 道里. 이들 간선도로 중에서 제4로, 제5로, 제6로, 제7로, 제8로, 제9로 등 6개 도로가 도성의 남쪽에 가로놓인 한강을 통과해야 했다. 삼남지방을 비롯한 한강 이남지방과의 왕래에 있어서 한강은 큰 장애물이었다. 그리고 서울 북쪽에 가로놓인 임진강은 황해·평안도 등 북부지방과 한양 사이의 교통을 차단하고 있었다. 이 두 강은 도성의 방어를 위한 자연적인 방어선은 되었을지 모르나 교통로에 있어서는 많은 지장을 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통의 장애를 극복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여 왔으니 하천의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다리[橋梁]이며, 산악의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이 터널이다. 사람이 물 위에 다리를 놓게 되기까지 자연은 두 가지의 지혜를 주었다. 그 중 하나는 계곡의 물이 돌을 굴려 내려나가다 물길의 중간 중간에 하나씩 남겨 둔 것이며, 또 하나는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려 계곡을 가로질러 걸쳐 준 것이었다. 사람들은 전자에서 징검다리를 놓는 것을 알게 되었고, 후자의 암시에서 외나무다리를 놓게 되었다.

그러나 토목기술이 그리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큰 강에 다리를 놓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배를 이용할 줄 안 사람들은 다리보다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는 양쪽 지점에는 나루터가 생겨났다.

조선시대 주요 간선도로가 통과하는 한강에는 일찍부터 광나루[廣津] 삼밭나루[三田渡]·서빙고나루[西氷庫津]·동자개나루[銅雀津]·노들나루[露梁津]·삼개나루[麻浦津]·서강나루[西江津]·양화나루[楊花渡] 등이 개설되어 있었다. 특히 광나루·삼밭나무·서빙고나루·동자개나루·노들나루는 5江津路라고 하여 중요한 길목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들 나루의 도선장인 나루터를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건네주는 나룻배는 한강 양편을 이어주는 최대의 편의시설이s었다.

나루는 그 규모에 따라 渡와 津으로 구분되었다. 津渡의 설치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제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예성강의 碧瀾渡, 임진강의 河源渡, 대동강의 觀仙津, 그리고 한강의 沙平渡·楊花渡 등이 그것이다.0849)≪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楊廣道. 고려의 체제를 거의 준용한 조선시대에도 津渡制는 거의 그대로 운용되었다. 즉 서울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 한강의 중요성이 크게 증대된 조선시대, 특히 국초에는 고려를 계승하여 한강에 양화도·사평도를 계속 설치하였다.

그 후 체제가 정비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진도가 국가 뿐만 아니라 서민의 교통시설로서 중요시되어 확장 설치되어 갔다. 특히 태종은 호패법을 실시하여 전국의 인구 동태를 파악하고 아울러 그 이동을 살피고자 진도에 別監을 파견하였다. 이로써 진도는 국가적 관리체계 속에 편입되었다. 국초에 변란이 자주 일어났으므로 위정자들은 반역자·범죄자 등 위험인물의 단속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즉 태종 14년(1414) 정부는 종래의 臨津渡·洛河渡·漢江渡 외에 민간인이 임의로 통행하던 한강 일대의 노들나루·광나루 등의 진도를 직접 관장하면서 범죄인·유망민의 출입을 기찰하였다. 그리고 나루의 등급을 渡로 승격시켜 한강도에서와 같이 별감을 두고 업무를 주관케 하였다. 이어서 세종 때는 송파에 삼전도를 신설하고 渡船 3척, 津尺 10인을 배속시켰다.

渡의 책임자인 별감은 세종 때를 전후하여 渡丞으로 지위가 바뀌었는데, 세도가의 자제들이 이를 차지하고 권세를 부리기도 하였다. 도승에게는 직역 복무의 대가로 位田이 지급되었으며, 아울러 각 진도에는 그 운영 비용을 위하여 津尺位田이 분급되었다. 진척위전은 각 진도의 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대로에 속한 양화나루·삼밭나루·임진나루·벽란도 등에는 10결의 토지를 지급하였다. 특히 교통이 빈번한 한강도에는 20결, 노들나루에는 15결의 진척위전이 급여되었다. 津夫 역시 그에 상응하여 10명, 20명, 15명이 배속되었다.

진도에는 도승을 보좌하여 津吏가 사무를 처리하였으나, 실제 나룻배를 건네주는 것은 뱃사공, 즉 津夫들이었다. 이들은 부역의 일환으로 도강 작업에 강제로 동원되었으나 사회적·경제적 대우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진부는 도강뿐 아니라 왕실에 소요되는 생선을 잡아 바치는 등 잡역에도 동원되었다. 그리하여 진부들은 가급적 역을 피하여 유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는 교통의 원활화를 위하여 진부의 유망을 감독하고, 아울러 선박의 관리에도 유의하여 사고에 대비하였다.

한편 한강은 서민들의 교통에 장애를 주었을 뿐 아니라 국왕을 비롯한 고관들의 행차에도 커다란 불편을 주었다. 특히 국왕은 지체가 존귀하였으므로 터럭만큼도 위험요소가 없어야 했다. 그러나 강을 건넌다는 것은 예기치 않은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들은 온천에, 또는 왕릉에, 아니면 불공을 드리거나 사냥을 하기 위해 한강을 건너야 했다. 이에 고안된 것이 배다리, 즉 浮橋였다. 선박을 이용하기 때문에 舟橋라고도 한다. 부교의 가설은 세종·세조·연산군 때 많이 이루어졌다. 연산군은 청계산에서 사냥을 즐기면서 부교를 상설케 한 바도 있었다.0850)≪燕山君日記≫권 60, 연산군 11년 11월 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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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3>朝鮮時代 漢江의 津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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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完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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