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Ⅴ. 교통·운수·통신
  • 3. 수상교통과 조운
  • 1) 조운제의 정비
  • (1) 조운정책의 수립

(1) 조운정책의 수립

교통이라고 하면 흔히 도로를 이용한 육상 교통을 연상한다. 그러나 근대화 이전의 사회에 있어서는 육상 교통은 그리 발달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는 구릉과 하천이 많았을 뿐 아니라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교통 수단 역시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육상 교통의 발달은 제한적이었다. 비록 전국 각지에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역로와 파발로 중심이었기 때문에 행정·군사적 도로로서 이용되었고, 화물의 운송은 수로를 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 초기의 실학자 李重煥은≪擇里志≫에서 사람이 살 터를 잡는 데에는 첫째 地勢가 좋아야 하고, 다음은 교역이 편해야 하며, 다음은 인심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특히 지세에 있어서는 먼저 물길을 살펴본 후에 들판의 형세, 산악의 모양 등을 헤아려야 한다고 하였다.0858)李重煥,≪擇里志≫12, 卜居總論 1, 地理. 이는 당시 선비들의 공통된 생각이라고 여겨진다.

조선왕조의 수도인 漢陽은 수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서해안과 한강 하류를 통하여 충청남도·전라도의 양호지방과 황해도·평안도의 양서지방의 물자가 한양으로 운송되고, 한강의 상류인 남한강·북한강을 통하여 충청북도와 강원도의 물화가 한양으로 운송되었다. 더구나 한강은 그에 이어지는 낙동강과 아울러 경상도 지방과 서울 지방을 연결하는 대동맥으로서 그 기능의 비중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한강 유역에는 광주·여주·충주·원주·춘천 등 대도회지가 발달하고 있어 사람들의 왕래도 한강의 수로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특히 그 초기에 있어서는 자급자족적인 경제구조하에서 지방간의 교통이나 원거리 교역이 그리 발달한 편이 아니었다. 다만 고려 이래로 국가의 통제하에 집약적으로 운영되던 세곡의 운송만이 비교적 전국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세곡의 운송은 당시에 있어 가장 조직적이고 규모가 큰 운송체제였다. 세곡의 운송은 조운에 의함이 원칙이었다.

조운은 漕轉·漕輓·水運·站運이라고도 불리웠는데, 조선시대의 조운제는 고려의 그것을 토대로 하여 제정되었다. 고려시대의 조운제는 13조창의 설치와 운영을 내용으로 하였다. 그러나 12세기 말의 무신란을 계기로 국내정세가 동요되면서 여러 제도가 문란해졌고, 이에 따라 조운제도 그 기능이 약화되더니, 14세기 후반 왜구가 창궐하면서 조운은 거의 폐지되다시피 하였다. 그리하여 세곡의 대부분은 육로를 통하여 운송되었는데, 국가에서는 이를 위하여 요소요소에 院館을 두고 운송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그렇다고 하여도 세곡은 정상적으로 운송되지 못하였고, 운송량은 크게 감축되었다. 그로 인하여 국가 재정은 날로 궁핍해 갔고, 나아가 고려왕조의 지배력을 약화시켜 그 쇠망을 촉진케 하였다.

이에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과 장차에 있을 새로운 국가를 위하여도 경제기반을 강화시켜야 했다. 그것이 전제개혁과 조운제의 재정비였다. 조운제의 정비 작업은 국가재정의 원활화가 시급히 요청되었던 당시로서는 科田法의 실시에 못지 않게 중요시되었던 당면 과제였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王康·盧嵩 등을 기용하여 漕轉城을 수축하고 漕渠의 개설을 시도하는가 하면, 鄭夢周의 건의를 받아들여 水站을 설치하였다.0859)≪高麗史≫권 45, 世家 45, 공양왕 2년 정월 갑신.
≪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8월 갑진.
조창과 조선이 복구되면서 마침내 40년 동안 불통되던 세곡의 조운이 소통되니, 이로써 국고가 어느 정도 충실해지고 백성들의 삶도 다소 편해지게 되었다.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운 후에도 새 도읍을 물색하면서 조운에 특히 유의하였는데, 新都內·毋岳·漢陽 등이 모두 그러하였다. 신도내에선 그 자신이 몸소 자연적 조건을 살피며 호종한 成石璘·金湊·李恬 등에게 조운의 편부를 파악토록 하였고, 또 무악에 있어서도 천도를 주장하는 河崙은 물론이거니와 천도를 반대하는 鄭道傳·成石璘 등도 모두 조운을 가장 중요한 입지조건으로 내세웠다. 마침내 한양으로 도읍을 정함에 있어서도 태조는 “조운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찌 도회지라고 하겠는가”하면서 조운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보였다.0860)≪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2월 갑신 및 권 6, 태조 3년 8월 기묘·경진. 실로 한양은 조운의 적격지였으니, 한반도의 중앙을 관통하는 한강변에 위치하여 수로와 해로의 이용이 수월한 곳이었고, 또한 옛 고려의 조창들을 관리하기도 편한 곳이었다.

태조와 그의 신하들에 의해 수립된 조선왕조의 조운제는 중앙정부가 조창·조선·조군을 직접 관장하는 官船漕運體制였다. 관선조운체제로 방향을 정한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조운제 정비에 적극적 관심을 보여, 조창이 복구되고 조선이 다수 건조되어 중앙정부가 필요한 세곡이 거의 차질없이 지방에서 중앙으로 운송되었다. 그 운영과정에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왜구의 노략질이 아직 계속되었고, 또 해난사고가 자주 일어나서 한 때는 조운정책을 포기한 바 있었으며, 私船에 의해 세곡운송을 시도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법제조직의 강화, 관료조직의 재편성, 토지제도의 정비, 국방체제의 수립 등과 마찬가지로 집권화 정책의 일환이었던 관선조운정책은 강력한 집권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태종과 세조에 의해 적극 지지되어, 조선왕조의 기본적 세곡운송정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經國大典≫에 제시된 세곡운송정책은 기본적으로 관선조운정책이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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