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Ⅴ. 교통·운수·통신
  • 3. 수상교통과 조운
  • 2) 사설항로의 발달

2) 사설항로의 발달

국가에서의 조운제 정비와 때를 같이 하여 민간 선인들에 의한 사설항로도 점차 개설되고 발달해 갔다. 일찍이 고려시대에도 민간 선인들이 세곡운송에 참여하여 나름대로의 길을 개척한 바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그들은 계속 이 업무를 맡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전반을 통하여 한양은 가장 번화한 도시였고, 그리하여 한양의 경제적 정치적 위치 때문에 이곳을 관통하는 한강유역은 그 어느 하천유역 보다도 경제성이 높은 곳이었다. 특히 한양 남쪽의 한강은 京江이라 하여 서강·마포·용산·송파 등지에는 전국의 중요한 물산이 선박에 의해 이 지역으로 운반됨으로써, 경강 연변에는 조선 초기 이래로 운수업은 물론 선박으로 상업 활동을 하는 선상업이 발달하였다. 곧 江商 혹은 京江商人이라 불리는 상인들의 활동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에 있어 경강상인의 활동은 당초 세곡 운반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조선왕조가 전국에서 거두는 세곡은 내륙지방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선박으로 운반되었는데, 그를 위한 대책이 앞에서 살핀 조운제였다. 조운제 하에서는 조선이나 병선으로 세곡을 운반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私船으로 운반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태조 때에 이미 사선을 동원한 바 있었고, 태종 때에는 전라도 지방의 세곡 7만 석을 한양으로 운반하면서 30%에 해당하는 2만 석을 사선으로 운반하였다.

나아가 태종 14년(1414) 전라도 조선 66척의 침몰사고를 계기로 민간선인들의 세곡운송이 본격화되어 이후 15세기 중엽에는 한동안 사선이 세곡운송을 주도하기도 하였다.0882)崔完基,<朝鮮前期의 穀物賃運考>(≪史叢≫23, 1979), 4쪽. 그러나 세조의 관선 조운정책에 의해 민간선인들은 세곡 운송활동에서 배제되었다. 그렇지만 관선 조운정책은 造船과 海防에서 문제점을 야기하여 일부 위정자들은 사선의 동원이 불가피함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사선의 활용이 여의치 않다면, 관선과 사선을 겸용하여 운송의 효율화를 기하자고 하였다. 그런 가운데 중종 5년(1510)에 일어난 三浦倭亂을 계기로 소형의 輕快船으로 왜선에 대비하고자 하는 해안경비책이 수립되면서, 그나마 있던 조운용 병선마저 거의 모두 경쾌선으로 개조됨으로써 세곡의 운송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관선에 의한 조운이 여의치 않자 보수적인 위정자들도 사선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어 드디어 賃船制를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중종 때의 특진관 申公濟의 보고에 의하면 당시의 조운은 거의 사선에 의존하였다고 한다.0883)≪中宗實錄≫권 64, 중종 23년 12월 정축 및 권 65, 중종 24년 5월 을묘.

세곡 뿐만 아니라 양반지주들의 농장에서 거두어들인 소작료의 운송도 私船이 맡음으로써 민간선인들의 활동 영역은 더욱 확대되어 갔다. 그런데 농장, 즉 대토지사유화는 고려를 무너뜨린 과전법론자들이 매우 부심하던 문제의 하나였고, 따라서 과전법에서는 그 규제조치가 상당히 강구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과전법이 무너지면서 조선조에서도 15세기 말부터는 전국 도처에 농장이 발달하였다. 무분별하게 증대된 농장에서는 엄청난 양의 소작료가 수취되었는데, 중종 13년(1518)의 기록에 의하면 전라도 순천 등지의 지주들은 대체로 5·6천 석 내지는 1만 석까지 소작료를 수취하고 있었다.0884)≪中宗實錄≫권 33, 중종 13년 5월 을축. 당시 농장을 소유한 지주층은 내수사를 비롯한 다수의 궁방·양반관료·부상대고 등의 대지주에서 영세한 소지주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게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매년 징수한 소작료의 총량은 국가의 세곡 총량과 비견될 정도였다. 조선 전기에 있어 지주는 거의 한양에 거주하는 부재지주였다. 농장의 미곡은 현지에서 상인들에게 처분되기도 하고, 고리대활동의 자본이 되기도 하였지만 상당량은 한양으로 운송되었다. 소작료의 운반도 선박에 의존하였다. 지주들이 소작료를 운반하기 위하여 자체적으로 선박을 보유한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대체로 사선을 이용하였다.

양반지주들은 소작료의 운송을 위해 그들의 권력을 바탕으로 관선을 이용하기도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것이 아니어서 일시적 수단일 수밖에 없었다. 생산지에서 소비지로 운송이 요구되고 있던 농장의 소작료는 자연히 사선이 운송해야 했다. 중종 때의 영부사 沈貞은 “舟車의 이익은 백성들로선 삶의 자본이기 때문에 그 이익을 잃으면 반드시 원망이 일게 된다. 또 외방의 곡물이 京中으로 운송된 연후에야 물가가 안정되니 사선의 활동이 국가에 도움이 안된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특진관 申公濟도 “전라·충청도의 곡물은 반드시 사선으로 경중에 운송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다.0885)≪中宗實錄≫권 65, 중종 24년 5월 을묘. 이러한 사실들은 사선이 농장생산물 운송에 있어서 주요한 수단이 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선인들은 농장주가 선박을 이용하기에 편하도록 내륙 깊숙한 곳까지 배를 정박시킴으로써, 멀리 남해안에서 평안도 연안까지 사선의 뱃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사선인들은 선상활동에 있어서도 그 능력을 발휘하였다. 선인들은 한양이라는 최대의 소비도시를 배경으로 선박을 이용하여 미곡·어물·소금·목재 등의 상품을 매매하였다. 특히 한강변에 근거를 두고 있던 경강상인들은 선박을 이용하여 전라·황해도 등의 쌀·어물·소금을 구입하고, 이를 경강으로 운송하여 다시 한양 시내의 시전상인에게 공급하였다. 일부 상인들은 포목을 가지고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곡물을 매집하여, 지주의 소작료나 농민의 양식뿐 아니라 군자곡까지 매집하였던 것이다.0886)崔完基,<朝鮮中期의 貿穀船商>(≪韓國學報≫30, 1983), 50쪽. 요컨대 한강을 비롯한 주요 하천과 이와 접속되는 연해안 일대에는 경강상인을 비롯한 선상들의 사설항로가 국초부터 개설되어 곡물·어물·소금 등의 생산지와 소비지를 연결시켜 주며 유통로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崔完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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