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Ⅴ. 교통·운수·통신
  • 4. 통신수단의 관리
  • 1) 봉수제도의 운영
  • (1) 봉수제도의 정비

(1) 봉수제도의 정비

조선왕조는 교통수단과 아울러 통신수단도 정비하여 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조선시대의 중요한 통신수단으로는 烽燧制度가 있었다. 이것은 외침과 같은 국경지방에서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정부, 또는 이웃 지방에 알리는 동시에 그 지방 주민에게도 알려서 신속하게 대응토록 함에 의도가 있었다. 즉 봉수로는 국가의 신경조직에 해당되는 바 역로와 함께 군사행정상의 의미를 지니면서 통치체제를 효과적으로 구축케 하였다. 다만 역제가 주로 중앙의 공문을 지방관아에 전달하는 하향식임에 비하여 봉수제는 변경에서 중앙으로 급보를 전달하는 상향식에 그 특징이 있었다. 그리고 역제가 행정기능 중심인데 대하여 봉수제는 군사기능 중심이었다.

봉수가 행해진 것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였으나 본격적으로 법제화된 것은 고려 후기였다. 조선의 봉수제는 이를 토대로 하여 정비되었다.

원래 봉수란 용어는 밤에 불로서 알리는 봉인 燃烽과 낮에 연기로서 알리는 수, 즉 燔燧를 합친 말이다. 그러므로 흔히 일컬어지는 烽火란 말은 야간의 연봉만을 가리킨 것이나 후에 주간의 번수까지 합친 뜻으로 쓰여져 고려 말기 이래로 봉화로 통칭되었다.0887)南都泳,<陸上交通>(≪서울六百年史≫1, 1977), 581쪽.

연봉이든 번수이든 신호를 알리기 위하여 대략 수십 리 거리를 두고 전망과 관측이 용이한 산마루에 烽燧臺를 두었다. 그리하여 변경의 봉수대가 긴급한 사정을 알게되면, 이를 즉시 밤에는 횃불로써, 낮에는 연기로써, 또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어서 횃불이나 연기로 연락이 불가능할 때는 봉수군이 직접 달려가서 알림으로써 차례대로 전달하여 중앙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봉수의 관장은 그 기능상 군사 책임자가 맡았다. 즉 중앙에서는 병조의 武備司가,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 및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도절제사·순찰사 등 군사 책임자가 관리하였다. 특히 수령은 봉수군의 근무활동을 수시로 감독하고 연대책임을 졌으며, 그들의 차출과 근무 상황은 물론 봉수대 시설의 이상 여부를 항시 살펴야 했다.

각 봉수대에는 봉수군과 伍長(지휘책임자로서 監考라고도 한다)이 배치되어 봉수대에서 기거하면서 밤낮으로 관측하며 이상 유무를 수령에게 보고하고, 수령은 유사시에는 즉시, 일이 없을 때는 매월 말에 관찰사에게 보고했으며, 관찰사는 3개월 단위로 3·6·9·12월 말에 병조에 보고하였다. 봉수군은 14세기 말 이래로 烽卒·烽軍·烽火軍이라고 통칭되었는데, 별칭으로 烽火干·看望軍·看望人·候望人·海望人 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했으나, ≪경국대전≫에서는 봉수군이라 명명되었다. 처음에는 봉수군만이 봉수대에서 근무하였는데, 그 통솔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서 세종 28년(1446) 경부터 監考, 즉 伍長을 배치하였다. 봉수대에서 근무하는 감고와 봉수군의 수는 시대에 따라서 또는 장소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고, 근무일수도 변화가 있었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변경지대의 봉수대에는 봉수군 50명, 감고 10명이 10일마다 교대로 근무하고 있었다.0888)≪經國大典≫권 4, 兵典 烽燧. 그리고 봉수군은 出番·退番의 편의를 위하여 반드시 부근의 주민을 중심으로 차출하였다.

신호를 알리는 방법으로서의 擧火法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신호의 표시는 정세의 정도에 따라서 횃불 또는 연기의 수, 즉 炬數로써 구별토록 하였는데, 일찍이 고려 때나 중국 당나라에서는 4 炬法이 일반적이었으나,≪경국대전≫에서는 5炬法으로 확장되었다. 즉 평상시 아무 일이 없으면 1炬로 하다가 사태가 일어나면 炬數를 늘렸다. 이 때 육지에서는 적병이 국경 쪽으로 움직이면 2炬, 국경에 접근하면 3炬, 국경을 침범하면 4炬, 우리 군대와 접전하면 5炬로 하였고, 바다에서는 적선이 바다 위에 나타나면 2炬, 해안 가까이 오면 3炬, 우리 병선과 접전하면 4炬, 적군이 육지로 상륙하면 5炬를 올리도록 하였다.

봉수제는 그 기능상 신속성을 유지해야 했다. 원래 봉수는 그 봉수대가 동서남북 어느 변경에 소재하던 간에 대략 12시간이면 중앙에 전달되어야 했다. 그러나 후에는 봉수군의 태만, 봉수대의 관리 소홀로 전달함에 소요되는 시간이 너무 지연되거나, 불통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중종 27년(1532)의 경우에는 변방에서 서울까지 5∼6일 걸렸다.0889)≪中宗實錄≫권 73, 중종 27년 9월 경오. 따라서 정부에서는 봉수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법제적 조치를 강구하기도 하였다. 즉 근면성실한 봉수군은 표창하고 태만하거나 불성실한 봉수군은 엄히 징계하였는데, 제대로 시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심하면 참형에 처하기도 하였다.0890)≪新補受敎輯錄≫권 4, 兵典 烽燧.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이래로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缺番과 代立이 빈번하였으며, 때로는 도적들이 봉수대를 차지하고서 거짓으로 봉화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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