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Ⅴ. 교통·운수·통신
  • 4. 통신수단의 관리
  • 2) 파발로
  • (1) 파발로의 개설

(1) 파발로의 개설

擺撥은 사람에 의해 소식을 전달하는 통신망이다. 봉수제가 조선 중기 이후 그 기능이 약화되고, 통신기능을 일부 지니고 있던 역제도 공물 운반에 비중이 두어지면서 새로운 통신망이 요구되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봉수제는 거의 허구적인 존재로 되어서 변방의 사정을 중앙에 신속히 알리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 때 원군으로 참여하였던 명나라 군대에서는 파발제를 통하여 연락을 신속히 하고 있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봉수제 대신에 파발제를 실시하여 위급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파발제도를 시행하기 위하여는 말의 확보, 파발군의 충원, 도로의 보수 등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파발이 간헐적으로 시행되기도 하였으나, 전면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파발제도가 정착된 것은 선조 34년(1601) 도체찰사 李德馨의 강력한 주청에 의해서였다. 즉 전국 주요 도로에 擺撥幕을 설치하고, 파발군 6·7명을 각기 소속시켜 연락업무를 맡겼던 것이다. 파발에는 말을 사용하여 보다 신속히 전달하는 騎撥과 사람의 도보에 의하는 步撥의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역제에서 교대하는 곳을 역이라 한 데 대하여 파발이 교대하는 곳을 站이라 하였다. 파발로는 신속성이 중시되었으므로 역로와 겹치는 곳도 있지만 때로는 봉수대를 따라 연결되기도 했고, 지름길을 취하는 등 가능한 한 최단거리를 취하였다.

파발이 교대하는 참은 지형이나 방법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 기발에서는 25리마다 1참을 두게 되었으나, 곳은 따라서는 20리, 또는 30리의 거리를 두었다. 보발에서는 30리마다 1참을 두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40리 혹은 50리마다 두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站(파발막)은 일종의 병영과 같았는데 기발에는 撥將 1인, 邑吏 1인, 軍丁 5인과 말 5필씩을, 보발에는 발장 1인과 군정 2인씩을 배치하였다. 보발군은 달리기를 잘해야 했으므로 速步에 능한 사람이 차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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