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Ⅴ. 교통·운수·통신
  • 5. 마정
  • 4) 말의 수요
  • (1) 국내 수요

(1) 국내 수요

조선시대의 말은 다방면에서 소용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기병에게 말을 공급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정책수립자들은 ‘마정은 軍國의 중대한 일’이라던가0949)≪端宗實錄≫권 5, 단종 원년 정월 정축. ‘軍政은 말보다 급한 것이 없다’고 하여0950)≪世宗實錄≫권 21, 세종 5년 8월 경술. 그 조달에 힘썼던 것이다. 그러나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여 말이 없는 군사가 속출하고 기병으로서 말이 없는 자는 보병으로 전과하거나 타인의 말을 일당으로 빌려 타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심지어 빈한한 보병에게 자비로 말을 사서 타도록까지 하여 가산을 탕진케 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상과 같은 戰馬 부족의 현상으로 국방력을 약화시켜 임란·호란과 같은 때에 무방비상태를 초래하였으며, 그 후 그 복구책이 계속 강구되었으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였다.

그리고 540여 개의 驛에 말을 공급하여 공문의 전달과 공무여행하는 관료에게 말을 제공하고, 官物의 수송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불법적인 관료들의 濫騎와 急馳 등의 폐단으로 역마가 폐사하여 감소하게 됨으로써, 국초부터 驛政(驛馬·驛田·驛戶 확보 등) 관리에0951)趙炳魯,≪朝鮮時代 驛制硏究≫(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0). 힘쓰는 한편, 그 수요 억제책을 추진하였다. 태조 6년(1397)에는 도성 내에서 동반 7품 이하, 서반 6품 이하는 기마를 못하게 하였으며,0952)≪太祖實錄≫권 11, 태조 6년 4월 경술. 정종 2년(1400)에는 이를 강화하여「賤隷騎馬禁法」을 제정함으로써, 工人·商人·賤隷·牧竪 및 喪中에 있는 자에게 기마를 금지시켜, 일반 서민들은 도보로 여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0953)≪定宗實錄≫권 5, 정종 2년 7월 무자. 세종 25년(1443)에는 역마 부족으로 함길도 도절제사 金孝誠이 ‘말값이 소보다 비싼 점’을 들어 각 역에 수레 서너 대와 황소 6∼7필을 준비하게 하여 4품 이하는 말 대신 牛車를 이용토록 하자는 건의를 올리기까지 하였다.0954)≪經國大典≫권 5, 刑典 禁制. 그러나 말 공급을 해결하지 못한 이러한 변통책이 역정을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그 뒤≪경국대전≫에서는 역마를 함부로 탄 자와 사사로이 내어준 자는 모두 杖 100, 流 3,000리에 처하도록 하였으며,0955)≪世宗實錄≫권 99, 세종 25년 3월 기사. 선조 30년(1597)에 擺撥制가 실시되자 마정은 213개의 站에 撥馬를 공급하는 등 현안문제를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0956)南相虎,<擺撥制考>(≪慶州史學≫8, 1989).

말은 농업경작에도 이용되었다. 서북 양도와 제주도 등에서 馬耕이 행해졌다. 특히 제주도는 땅이 푸석하고 들떠서 파종할 때 반드시 말과 소를 모아 땅을 밟게 하여 단단히 한 뒤에 종자를 뿌려 농업을 하였으므로 마정은 그 공급을 담당해야만 하였다.0957)南都泳, 앞의 글(1969 b).

한편 말고기의 수요가 늘어나자 다양한 대책이 마련되었다. 말의 증산은 물론 그 수요를 막기 위한 법적인 조치를 취하고, 매매를 통제하였다. 태조는 고려 말엽의 禁殺都監을 존치시키고≪經濟六典≫을 제정하여 소와 말의 도살을 금하였으며,0958)≪世宗實錄≫권 27, 세종 7년 2월 갑진 참조. 태종 11년(1411)에는 도살을 일삼는 新白丁을 색출하여 도성 900리 밖으로 추방하여 감시하도록 하였다.0959)위와 같음. 그러나 밀도살이 계속 행해지고 더욱이 궁중 관부에서의 수요가 늘어나자, 정부는 말 명산지인 제주도로 하여금 매년 乾馬肉을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제주도민의 盜殺·유망이 속출하자 정부는 그 治罪에 부심하게 되었다.0960)南都泳, 앞의 글(1969 b).

세종 3년(1421)에는 외국사신을 위로하는 잔치 이외에는 말을 잡지 못하게 하였으며, 동 7년에는 도성 안의 산에서 우마 도살을 자행하는 자가 많아 防護所 13처를 설치하여 이를 단속하였고, 말고기를 먹은 자에 대해서는 笞 50형에 처하였다. 그리고 세종 7년(1425) 말고기 매매를 소고기 매매의 예에 따라 서울은 한성부, 지방은 지방관의 허가를 받도록 하여 이를 위반한 자는 처벌토록 하였으며, 동 11년에는 자연사한 우마육이라도 허가를 받은 후에 매매할 수 있도록 통제하였다.0961)≪世宗實錄≫권 27, 세종 7년 1월 병술·2월 갑진·무신 및 권 43, 세종 11년 2월 신사.

세조 10년(1464)에 도성 내에서 우마 도살을 전업으로 하는 去骨匠을 5部의 管領과 동네 사람에게 명령해서 비밀 고발케 하고 수시로 체포토록 하였으나0962)≪世祖實錄≫권 34, 세조 10년 8월 을유. 도살은 더욱 성행하였다. 이에 동 13년에는 대사헌 梁誠之가 그 실정을 “옛날에 도살은 白丁·禾尺이 하고 잔치에 쓰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양민이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서 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거골장을 사형에 처하고 그 처자 일가족은 변방으로 이주시키도록 하였다.0963)≪世祖實錄≫권 41, 세조 13년 정월 신미. 그리고 우마를 죽인 자를 체포하면 면포 10필을 주고 매 1인씩 추가할 때마다 2필로부터 50필까지 더 주도록 하였다.0964)≪經國大典≫권 5, 刑典 捕盜.

조선 초기 국왕 가운데 말고기를 가장 애용한 인물은 연산군이었다. 그는 특히 늙고 병이 없는 백마가 양기를 돋구는 데 좋다고 하여 이를 즐겨 먹더니 그 6년(1503)에는 민가에서 색출해 오게까지 하였다.0965)≪燕山君日記≫, 연산군 9년 2월 을사. 중종 12년(1517) 사헌부에서는 “의금부 등 아문에서 밀도살이 행해지고, 또 한성부·형조의 奴子들이 관권을 빙자하여 도살을 자행하고 있다”고 하여 이를 단속하였으며, 동왕 38년에는≪大典後續錄≫을 제정하여 그 철저를 기하도록 하였다.0966)≪大典後續錄≫권 5, 刑典 雜令.

그 후≪속대전≫에서는 ‘牛馬 私屠殺者’를 杖 100과 徒 3년에 처하게 하는 한편, 도살을 허가하지 아니할 수 없는 고을은 5일에 한 마리를 도살하여 공급토록 하였다.0967)≪續大典≫권 5, 刑典 禁制. 그러나 이러한 시책은 일부 양반층에만 한정된 것이었을 뿐 말고기 수요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이 밖에 말의 갈기, 곧 鬃과 말꼬리는 갓의 원료로써 鬃帽·馬尾帽·鬃笠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사회는 유교적인 예법이 발달하여 국왕은 물론 관료들은≪경국대전≫禮典 儀章條에 따라 朝服·祭服·公服·常服別로 품위에 따라 차등을 두고 갓을 쓰게 되었으며, 일반 서민들도 갓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따라서 갓은 지위와 교양·인격을 표징하는 것으로서 다투어 좋은 갓을 구하려는 풍조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중 종모와 종립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정부는 갓생산을 위하여 공조에 帽子匠·紗帽匠·草笠匠을, 尙衣院·濟用監에 毛冠匠, 지방에 鬃帽兒匠을 배치하였으며, 민간에서도 갓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종모·종립의 수요를 감당치 못하여 그 가격이 등귀하고, 이에 따라 말갈기와 말꼬리 값도 오르게 되어 심지어는 대낮에 서울시가에 세워둔 말의 갈기와 꼬리를 도둑맞기 일쑤였다.

국초부터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책이 여러 번 강구되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성종 17년(1486)에는 사복시 제조 尹壕가 “사람마다 종립쓰기를 좋아하여 공사의 말갈기가 다 짤렸으니 법을 세워 금지함이 옳다”고까지 주장하였다. 이에 국왕은 領敦寧 이상에게 이 문제를 논의케 하였던 바, 鄭昌孫·尹弼商은 종모·종립의 사용으로 말꼬리를 도둑질하는 자가 많이 생겼으니 비록≪경국대전≫에 그 사용규정이 있더라도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용을 금지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沈澮·盧思愼은 그대로 사용하여야 한다고 맞섰다. 이 양론에 대해 성종은 단안을 내려 종모는 정1품에 한하여 쓰도록 하고, 종립은 大典에 따라 時散官에게 쓰도록 하였던 것이다.0968)≪成宗實錄≫권 188, 성종 17년 2월 기묘.

말갈기와 꼬리는 갓 이외에 체를 만드는 원료로도 사용되었으므로 馬尾篩匠을 膳工監에 배치하여 제조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또 말꼬리는 동아줄 원료로도 공급되었다.

한편 말힘줄[馬筋]은 활 만드는 원료로, 말가죽은 가죽신·주머니(橐:활·화살촉용 등)의 원료로 사용되었으며, 이를 구어서 아교를 만들기도 하였다.0969)≪成宗實錄≫권 188, 성종 17년 2월 기묘.
≪文宗實錄≫권 8, 문종 6년 5월 기축

특히 靴鞋(정강이까지 덮는 목이 달린 가죽신)는 의장용으로서 관료들이 품위에 따라 신게 되어 있었는데, 일반 서민들까지 상·하의 구별없이 가죽신을 사용하게 되어 가격이 오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말·소가죽 값도 등귀하여, 이를 얻기 위해 불법으로 우마를 죽이는 자가 속출하게 되었다.0970)≪世宗實錄≫권 31, 세종 8년 1월 신유 및 권 48, 세종 12년 4월 계미·12년 5월 갑인 등. 그러자 정부는 말가죽을 각 목장에서 공납케 하는 한편 세종 8년(1426)에는 사헌부가 다음과 같이 건의하는 계를 올렸다.

의장복식의 절차는 상·하를 구별하며 계급의 위신을 밝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뚜렷한 형식이 갖추어져 있는데 다만 靴鞋에 대한 절차가 아직도 상세히 제정되지 아니하여 심지어는 거리의 工商人이나 公私賤隷까지도 모두 가죽신을 신으며, 參外와 직책이 없는 사람까지도 套(비올 때 신는 반장화)를 신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상하 계급을 없게 할 뿐 아니라, 가죽값을 뛰어 오르게 하여 禁殺令이 엄중할지라도 몰래 우마를 훔쳐 가는 일을 잇달아 일으키는 것이니…바라옵건대 예조에 명하시어 상세한 제도를 제정하여 상하의 구별을 밝히고, 도둑질하는 근원을 막게 하여 주십시오(≪世宗實錄≫권 31, 세종 8년 1월 신유).

이에 국왕은 의정부와 諸曹가 함께 논의할 것을 예조에 명하였다. 이에 따라 마침내 수요의 제한을 두는 최초의 화혜제도를 마련하였다. 즉 時散 동서 7품 이하는 套의 착용을 금지하고, 대소의 승려·經師 및 별군 내의 대장 이하 近仗隊長과 隊副·보충군·조예·杖首·所由·喝導·螺匠·도부외·庶人·공인·상인·공사천인은 가죽신을 신는 것을 금하며, 武工과 樂工 중에서 7품 이하는 음악을 연주할 때 이외에는 가죽신을 신는 것을 금지하며, 皮草鞋도 남녀 모두 금지케 하되 각 궁의 별감과 小親衛만은 가죽신을 신게 허용하였다. 이로써 화혜는 관료층만이 독점 사용토록 되었다.0971)≪世宗實錄≫권 31, 세종 8년 1월 신유. 그러나 이 조치에도 불구하고 화혜는 일반 서민에서 수요되어, 세종 11년(1429)에 보다 강화된 단속법이 제정되었다.0972)≪世宗實錄≫권 43, 세종 11년 2월 신사. 그 이듬해에는 우의정 孟思誠의 “常人들의 皮鞋와 긴요하지 않은 皮物은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0973)≪世宗實錄≫권 48, 세종 12년 4월 을해. 한성부는 우마피 단속책을 다음과 같이 세워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울 안 5부 및 성 밑 10리 안에서 죽은 말과 소의 날가죽은 한성부에 들여서 火印을 받게 하고, 익혀서 시장에 팔 적에도 또 京市署에 고하게 하여, 그 표가 붙어 있는가를 조사받게 한 뒤에 매매를 허가하고, 그 표는 곧 거두어 불태워 없앤다. 만일 표가 없는 가죽을 사사로 매매하는 자에게는 서울 안에서는 管領 및 五家의 長이 성 및 10리 안에서는 勸農과 坊의 別監 등이 이를 곧 한성부에 보고하면, 한성부는 형조에 공문을 보내어 표 없는 고기를 매매하는 예에 의하여 죄를 논하고, 가죽은 관가에서 몰수하며 지방 각 도는 그 고을 이름의 글자로 된 화인으로 표를 붙여서 관리하도록 한다(≪世宗實錄≫권 48, 세종 12년 4월 계미).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화혜제도는 ≪경국대전≫ 예전 의장조의 조문으로 확립되었다.0974)≪經國大典≫권 3, 禮典 儀章 靴鞋. 그러나 말가죽은 생활필수품으로서 여전히 암거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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