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Ⅵ. 도량형제도
  • 1. 옛 도량형 제도
  • 2) 문무왕 21년의 도량형 개혁

2) 문무왕 21년의 도량형 개혁

≪三國史記≫와≪三國遺事≫를 보면 중국의 도량형 단위인 步·丈·里·分·兩·斤·升(斗)·斛 및 畝·頃 등이 흔히 쓰이고 있다. 이는 삼국시대 중기 이후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조공과 상거래를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라 생각되지만, 그러한 단위량들이 어떠한 기준에 의해, 어느 시대의 어떠한 제도를 반영하는 단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의 遺詔에는 불편하게 여겨왔던 도량형제도의 개혁 의지를 밝히고 있다.1022)≪三國史記≫권 7, 新羅本記 7, 문무왕 21년. 통일신라와 고려 때의 제도로 보아서 이 때 개혁된 도량형제도는 里步法과 儀禮의 기준척이 되었던 周尺 및 唐大尺이 도입되었을 것이며, 기준량이 되어 온「한 되」는 본래의 양을 두 배로 하여 唐의 1升量인 655㎖와 비슷하게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 한 섬의 양도 관습에 따라서 새로운 표준량으로 삼아 15두로 증량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개혁으로 말미암아 일반 농민들 사이에는 섬[石]량의 혼돈으로 인한 큰 혼란이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또한 이러한 개혁으로 섬을 크게 만들어야 하였으므로「섬」에는 큰 섬과 작은 섬이 있게 되고,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 새로운 큰 섬량을 1碩으로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상당한 기간 동안은 본래의 되·말·섬들은 작은 되, 작은 말, 작은 섬으로 새로운 양기들은 큰 되, 큰 말, 큰 섬으로 구분되었을 것이나, 관에서는 새로운 제도에 따라 租穀을 거두어 들임으로써 점차 新量制度로 단일화되어「碩」도 石으로 통용되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옛 한 섬의 양은 옛부터 개혁 이후까지 줄곧 표준양기가 되어야 했으므로 중국의 10斗량의 단위인 斛을 도입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때 升 이하의 적은 단위량도 중국제도를 본떠서 제정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勺 = 0.1合

1合(홉) =0.1升 =60㎖

1升(되) =10合 =597㎖

1斗(말) =10升 =5970㎖

1斛(작은 섬) =7斗 5升 =4,4777㎖

1碩(큰 섬) =15斗 =8,9553㎖

이러한 量制가 개혁될 때, 물론 衡量에도 개혁이 있었을 것이다. 이 때까지 통일된 도량형제도로서의 단위량에는 稱量이 있었을 뿐 斤과 같은 양들은 중국의 형량들을 도입하여 중국식으로 제정되어 쓰여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당시 당에서 실시되고 있었던 1斤重은 668그램으로 추정되나 아직까지 그 정확한 값은 알 수 없는 형편이다. 衡量單位도 1斤=16兩=668그램, 1兩=24銖, 1銖=10分(文)이란 제도와 10進法 제도인 1貫=100兩, 1兩=10錢(絫), 1錢=10分, 1分=10釐와 같은 두 가지 유형이 있지만, 세종 때까지 전해진 단위명은 1전=10분, 1냥=10전, 1근=16냥이었다. 만일 문무왕 때 제정된 형량단위가 세종 때까지 전해진 것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이 계산할 수 있다.

1錢=10分=4그램

1兩=10錢=40.1그램

1斤=16兩=642그램

따라서 형량의 표준량도 당의 그것과 같았다고 보아야 한다. 또 문무왕 때 제정된 1근을 642그램으로 가정한다면 당시에 있어서 본래의 형량 1칭은 약 475그램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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