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Ⅵ. 도량형제도
  • 2. 세종조의 도량형 통일
  • 3) 세종 28년의 양 체제 개혁

3) 세종 28년의 양 체제 개혁

고려 문종 때 제정된 齊價量制度는 세종 초기까지도 계속 사용되었는데, 그 네 종류의 量器尺은 모두 唐大尺이었다. 양기척은 중국에서도 점차로 길이가 길어져 옛 양기척과 같은 길이의 당대척은 없어졌으며, 그 伸長尺이 명나라 때에 營造尺으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태조 때에 이미 명나라 영조척이 도입되어 官尺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세종 12년의 표준척에 영조척이 제정될 수 있었다. 따라서 표준량을 계속 정확히 유지·보존하기 위해서도 양기척을 세종 영조척으로 교체할 필요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크기를 다르게 한 量器가 4종씩이나 있었지만, 각 시대별로 곡물가가 다양하여 이 네 종류의 양기만으로는 부족했을 뿐 아니라 1升의 가격비율도 동일할 수 없었다. 더욱이 부정이 생길 원인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세종 28년(1446)에는 양기의 체제를 바꾸어 米斛量器 하나만의 단일체제로 통일하고, 그 표준 양기척도 영조척으로 바꾸어 1두의 용적이 196입방촌이 되게 長方體形으로 개혁했던 것이다.1033)≪世宗實錄≫권 113, 세종 28년 9월 27일. 옛 양기가 입방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장방체형으로 고친 것은 옛 입방체 양기의 용적을 그대로 영조척 길이의 입방체로 표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세종 때에 양기의 표준을 영조척 196입방촌으로 결정한 것은, 고려의 표준 미곡양기의 용적을 정확히 전수받고자 한 결과로 볼 수 있다.1034)高麗때 米斛量器의 한 모서리의 길이를 35.510㎝로 보아야 했으므로, 길이가 31.220㎝의 世宗 營造尺으로 측정한다면 35.510÷31.220=1尺 1寸 3分 7釐 4毫가 되므로 米斛의 容積을 營造尺으로 表示하면 1斛=7斗 5升=(11.374寸)³=1471.43寸³, 따라서 1斗=1491.43÷7.5寸³=196.1907寸³≒196寸³이 되었기 때문에 寸單位量까지만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세종 영조척 길이만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우리나라 옛 표준량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된다.

세종 영조척 길이를 31.220㎝로 보았을 때 세종 量制度는<표 5>에서와 같이 되며, 통일신라 때 1승 즉 고려 문종 이후의 미곡 1승은 597㎤가 되고,

단 위
量器名
量器記錄寸數 계산된 용적 비 고
길이(寸) 넓이(寸) 깊이(寸) 寸³ ㎝³ 리터



小斛(平石)
大斛(全石)
2.00
4.90
7.00
20.00
20.00
0.70
2.00
7.00
10.00
11.20
1.40
2.00
4.00
14.70
17.50
1.96
19.6
196
2940
3920
59.642
596.424
5964.235
8,9463.53
11,9284.71
0.060
0.596
5.964
89.464
119.285



15두
20두

<표 5>세종 때 斛斗升合의 용적 (영조척 길이 31.220㎝)

세종 때 1승은 596.4㎤가 되어 일치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세종 때에 통일된 정확한 표준량은 중앙에서 영조척 40개를 만들어 각 관부에1035)≪世宗實錄≫권 114, 세종 28년 11월 4일. 지급함으로써 계속 보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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