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1. 인구동향
  • 3) 인구이동과 그 영향

3) 인구이동과 그 영향

 조선 초기 인구의 지역적 이동은 크게 흉년·전란 등으로 인한 유이민과 국가정책에 의한 북방이민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여말 선초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삼남의 연해지방이 많은 피해를 입어 인구의 유출이 많았던 데 비해 양계와 중부 내륙지방은 상대적으로 충실한 편이었다. 그러나 세종조부터 왜구가 종식되고 정치·사회적인 안정과 함께 민생의 안집·권농정책 등으로 삼남지방에는 인구의 유입이 많은 대신 강원도와 서북지방은 점차 피폐해갔다. 피난을 목적으로 이주했던 인민이 각기 그들의 고장으로 귀환하고 여기에 계속된 흉년과 한해는 유민을 농업생산성이 높은 연해의 평야지대로 이주하게 하였으며, 한편으로 명나라나 여진과의 관계에서 국경을 방비하기 위한 과중한 부담은 특히 서북지방 주민의 유망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이민 방지책은 당시의 호구정책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농토에 비례하여 주민을 안착시켜야 농업생활의 향상과 민생안정을 기할 수 있고 신분질서의 확립과 수취체제의 공평한 부과도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란·흉년·질병 등에 의한 유망과 恒産이 없는 인민이 때로는 관가의 수탈과 침학이나 군역·요역 등 각종 역역에서 도피하고자 함으로써 유이민은 속출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인구의 지역적인 이동만이 아니라 결국은 권세가에 흡수될 가능성이 많아 국가재정 및 국역부담 자원의 감축현상을 초래할 뿐 아니라 농장의 확대와 私民의 증가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조선 건국과 더불어 추진된 북방개척과 유이민의 발생으로 인한 서북지방의 피폐와 虛殘을 보충하기 위하여 추진된 삼남주민의 북방이민은 이시기 인구 이동의 또 다른 요인이다.

 이러한 인구이동은 앞의<표 2>에서 태종 4년(1404)과≪세종실록지리지≫의 각 도별 호구수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한성부는 한나라의 수도로서 급격한 인구성장을 할 수 있는 객관적 요인을 지니고 있었다. 건국 초의 한성에는 개경의 민호를 상당수 이주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또 태조의 중앙집권적 왕권강화와 지방세력의 견제를 위한 각 지품관의 留京侍衛를 통하여 수도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였는데, 세종대 경상도에서 상경 종사하고 있던‘各品員人老弱’수는 5만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023)≪慶尙道地理志≫소재 道 總人丁條에 보면 경상도 人丁數 191,719명 가운데 上京從仕 各品員人老弱의 합계가 51,940명이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인구유치책과 함께 과전의 경기도 折授는 신왕조의 개국관료를 중심으로 새로운 지배계급의 생활기반을 수도지역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러한 인구 집중책은 큰 성과를 거두어 태종 때에는 인구의 증가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였으나 세조조에 이르러서는 한성부 거주인구가 적어도 20만 내외였던 것으로 보인다.024) 李樹健, <朝鮮初期 戶口의 移動現象>(≪李瑄根古稀紀念 韓國學論叢≫, 1974), 158쪽.

 중부지방인 경기도와 충청도는 그 지리적 위치로 보아 여말의 홍건적 침입이나 왜구가 침략할 때에도 유이민의 발생이 적었다. 그래서<표 2>에서와 같이 타도에 비해 호구 변동의 폭이 좁았다.

 여말 선초 왜구의 피해가 가장 심하였던 하삼도의 연해지방은 태종조부터 회복되기 시작하여 성종 때에는 인구의 급격한 증가를 가져왔다. 이 가운데서도 전라도는 고려 말 이래 왜구의 피해가 극심하였는데 태종 이래 점차 왜구가 그치자 유산했던 원주민이 환향하였으며, 특히 때마침 흉년이 계속되자 농업생산성 높은 이 곳으로 타도민의 이주가 많았다. 타도 유이민은 수만 호에 이르기도 하였는데, 특히 강원도와 서북지방 출신이 많은 편이었다.025) 李樹健, 위의 글, 156∼160쪽.

 전라도 지역의 호구가 격증하는 것에 비해 강원도 지역은 계속 감축되고 있었다. 이 곳은 왜구가 창궐할 때에는 오히려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으나 왜구가 종식되고 흉년이 계속되자 삼남의 연해 평야지대로의 유이민이 증가하였던 것이다.

시 대 抄 定 地 入 居 地 移民戶數
세 종 함길도(鏡城이남)
평안남도
각도 범죄인
각도 유이민
함길도 연변 제진(五鎭)
평안북도 연변 각군
평안·함길도 연변 각군
평안·함길도
3,800호 
1,900호 
800호?
약 만여명?
세 조 경상·전라·충청도 평안·황해·강원·함길도 1,760호?
성 종 경상·전라·충청도
각도 범죄인
평안·황해도
영안·황해도
1,500호 
1,000호?

<표 6>조선 초기의 북방이민 실적

 서북지방은 고려 말 왜구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고 또 내륙으로부터 유입해 오는 인구가 많아서 국초에는 어느 지방보다 충실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군사상으로 특수한 위치에 있어서 남부지방과는 달리 모든 장정이 군적에 편입되어 있었고 또 명과의 관계에서「遠東迎送問題」와 국경방비를 위한 入堡·赴防·築城 등의 부담이 과중하여 피폐한 데다가 계속된 흉작으로 남부지방으로 유망하는 인민이 속출하여 조선의 발전과 더불어 오히려 쇠잔해 갔다. 이러한 쇠잔상을 보전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 유이민의 推刷還本策과 북방이민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유이민의 문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려웠고 이에 따른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랐다. 그 구체적인 폐단으로는, ① 생산력의 저하와 민생의 불안, ② 범죄 및 도적의 횡행과 인심의 소요, ③ 군액의 감소, ④ 還穀逋脫 후의 賑濟穀의 요구 등으로 인한 국가 재정의 낭비, ⑤ 貴賤混淆로 인한 신분질서의 문란, ⑥ 이상의 여러 폐단으로 인해 法禁과 형벌이 더욱 번중해진다는 것 등이 거론되고 있다.026)≪世宗實錄≫권 33, 세종 8년 8월 무자. 여기에 따라 유이민 방지책은 일찍부터 마련되었지만 그것은 근절될 수 없었고, 유이민의 계속적인 발생은 이제 추쇄사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세종조에는 유이민 推刷事目이 마련되었는데, 이것은 제반 국역에 충당할 인적 자원의 파악, 신분질서의 확립, 지역적인 인구분포의 균형을 기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유이민 가운데 군역을 위시하여 鄕·鎭·驛吏와 公賤 등 여러 유역자의 추쇄에 특히 주력하였고, 땅은 넓으나 사람이 드문 강원도와 서북지방 출신자를 추쇄하여 환본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특히 서북지방에는 북방개척에 따라 더 많은 인민이 필요하였다. 서북지방에 대한 이민보충을 위해 하삼도 양민의 북방이민이 추진되기도 하였고, 다시 양민 대신 추쇄한 각 도 유이민의 북방입거와「全家徙邊律」에 의한 각종 죄인을 이주시키는 조치 등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 초의 북방이민의 실적은 위의<표 6>과 같다.027)深谷敏鐵, <朝鮮世宗朝における東北邊疆への徙民入居について:第一次∼第四次>(≪朝鮮學報≫9·14·19·21·22, 1956·1959·1961).
李仁榮, <李氏朝鮮 世祖 때의 北方移民政策>(≪震檀學報≫15, 1954).
宋炳基, <世宗朝의 平安道移民에 對하여>(≪史叢≫8, 高麗大, 1963).
李樹健, <朝鮮 成宗朝의 北方移民政策>(≪亞細亞學報≫7·8, 亞細亞學術硏究會, 1970).

 이러한 유이민 입거는 이후에도 상당 기간 계속되었지만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었고, 더욱이 사전 조치가 미흡한 사정에서 이것은 또 다른 사회적 혼란과 부작용을 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북방이민은 나름대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우선 국가가 목표로 하였던 국경의 방비, 土兵의 확보, 요동 영송, 성보 축조 등의 각종 역역에 동원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삼도 농민의 북방이주로 농경지의 개간, 旱田의 水田化, 남부지방의 선진농법 보급 등으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조선 초기의 인구 이동은 전국적인 범위에서 뿐만 아니라 선진농법의 보급에 따른 농업생산력과 지배층이 교체되면서 이들에 의한 향촌개발을 통해 군현 내부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각 고을의 읍치지역이 정치·행정·문학의 중심지로 주로 개발되었고, 임내나 읍치의 외곽지대, 즉 향촌지역은 인구가 희소하여 미개발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들 지역은 선토에 이르러 신흥사족·유향품관·낙향관리들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선진농법으로 일정한 노비와 토지를 소유한 채 향촌지역으로 이주하거나「卜居」하여 새 터전과 농장을 개설하거나 경영함에 따라 이곳이 사족의 집거지가 되는 동시에 주위의 오지와 벽지가 개발되어 갔다. 결국 이러한 향촌지역의 개발은 재지사족과 그들의 소유 노비 등을 중심으로 한 군현단위에서의 인구 이동을 가져왔고, 이것을 조선 중엽에 이르기까 계속되고 있었다.

 이렇듯 농업사회에 있어서 인구의 이동은 다만 인구의 수평적인 이동이 아니라 농지의 개간 또는 농업생산력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인구의 消長이 호구통계로 나타나듯이, 농업생산력의 증감현상은 전결수의 통계로 표현되고 있었다. 고려 말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왜구의 창궐로 인한 유이민의 대량 발생은 필연적으로 인구의 급격한 이동과 함께 전결수의 감소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부터 국내 정치가 안정기로 접어들고 밖으로는 왜구의 소멸에 따른 유이민의 환본과 국가의 주민안집 및 권농정책에 의하여 陳荒地의 起耕과 활발한 개간사업은 전결수의 증가를 가져왔다. 이러한 사정은 앞의<표 2>의 각 도별 전결수를 통하여 대체적인 양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표 2>에서 태종 연간은 본격적인 量田이 실시되기 이전이고, 세종 연간의 전결수는 전국적인 양전이 완료되는 시기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직접적인 비교가 어려우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정을 살필 수 있다. 즉 인구의 유입이 많은 지역은 농지의 개간이 날로 증가하여 전결수의 급격한 증가를 가져왔지만, 인구 유출이 심한 지역은 그와 반대로 開耕地까지 황폐화하여 墾田結數의 현저한 감소를 초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역별로는 전라·경상도가 계속 증가하였고, 충청·경기·황해도 등 중부지역은 증감의 폭이 좁고, 서북지역과 강원도는 급격한 감소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당시 인구 증감현상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李樹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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