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2. 신분의 구분
  • 1) 신분제의 개편

1) 신분제의 개편

 고려 말기의 사회·경제·정치적 모순과 갈등 속에서 나타나는 사회신분 문제는 대체로 國役 부담층의 혼란에 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한 정치권의 법제적 노력은 호적법의 정비와 호적법의 정확한 운영으로 추구되었다. 이와 같은 노력은 양인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국역 부담층의 혼란은 국역 담당자인 사회기층민, 즉 良人層의 불안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 또한 정치권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따라서 이들 기층민을 안집시키려면 국역에 대한 보상을 적절히 하여 국역 담당층이 다른 신분층으로 전입할 경우 불리해지는 여건을 창출 유도해야 했다. 여기에는 기층민의 현실적 이해와 관념적 동의가 필요했다. 먼저 이 시기의 역사적 상황에서 문제제기의 내용을 검토하면서 그 해결의 방향과 내용을 검토하기로 하겠다.

 개국 초 조선은 고려시기의 사회신분제에서 파생된 여러 문제점을 진단하여 새 정권의 사회정책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신분제 정비는 고려시대가 신분제에 기초해 정치를 운영하였다는 데서 비롯된다. 정치적으로 사회기층민의 안정과 중앙정치권에서의 국가재정의 안정이 연계되는 제도적 장치는 바로 사회신분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신분은 각 시기마다 특성이 있으며, 이른바 사회신분의 관행에 기초한 법제 운영이 있게 된다. 법제 운영은 사회관행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법치의 기초내용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회신분은 기층사회의 질서와 정돈으로 표현되며, 국가는 사회신분을 토대로 하는 법제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려 말기의 정치적 불안은 여러 부문에서 제기되었지만 특히 사회 경제적 모순과 갈등으로 표출되는 사회신분 및 농지소유와 경영의 문란에서 야기되었다. 이른바 사회신분은 정치권에서, 또는 경제활동에서 일정한 직업을 혈연적으로 세습하면서 형성된 사회관행에 토대를 갖고 있었다. 사회관행은 고려사회가 지니는 정치적 질서로 자리잡고, 더 나아가 법제적으로 보호되어 이를 기초로 한 국가의 재정구조가 짜여지게 되었다. 국가의 재정기반으로서 사회신분의 역할 분담과 행동이 경제활동에서 유기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정치적 안정을 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기의 사회신분은 職役과 혼인을 통한 직역의 세습을 통하여 한 시기의 질서체계를 형성하였다. 그것은 직역이 효율적이고 성장 지향적인 속성을 세습이라는 관행을 통하여 유지·보존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었다.

 여말 선초를 통하여 주목되는 지배 신분층의 구성요건의 특징은 이른바 權門勢家의 부류로서 제한된 특수계층만이 배타적으로 보전되는 것이 아니라, 유교교육과 과거제를 통하여 개방된다는 데 있었다. 향리층은 그 일부가 양반층으로 진출하고 나머지는 군현의 吏族層으로 남는 양상으로 진전되고 있었다. 지배층 내부에서의 양극화와 혼입 현상은 지배층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피지배층까지 포함하는 국가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어 전 사회체제의 정비를 요구하게 되었다.

 고려 말 정치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사회신분 문란의 내용은 대다수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양인 농민층에 천민층이 흡수되어 국가재정에 결손을 초래하는 점이었다. 이 시기의 정치권은 그 같은 현상 자체만으로도 국가질서가 붕괴된다는 인식에서 양인 농민층의 안정과 그들의 사회경제적·정치적 욕구까지도 배려하면서 당시의 사회신분을 재정비하고자 하였다.

 양인 농민층의 감소원인의 하나는「壓良爲賤」으로, 양인 일반농민들이 귀족층의 농장에 강점되거나 투탁하는 추세로 인하여 천인 신분인 사노비의 수가 증가하는 것이었다.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커다란 인력손실이었다. 압량위천 현상이 토지제도의 문란과 표리가 되어 이 시기의 사회혼란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자, 정부는 양인신분의 농민을 안집하기 위한 정책으로 압량위천을 금지하여 양인을 보호하는 정책을 구상하였다. 이 같은 토지제도와 신분제의 혼란 문제를 해결하려고 설치한 기구가 田民辨正都監이다. 전민변정도감은 토지문제와 함께 양인신분의 대상을 확보하고, 나아가서 그러한 사회관행을 지키려는 규범을 사업내용으로 삼았다.028) 池承鍾, <朝鮮前期의 投扥과 壓良爲賤>(≪한국사회의 신분계급과 사회변동≫, 文學과 知性社, 1987).

 그러나 전민변정 사업은 쉽지 않았다. 그것은 이 사업의 주체인 관인층이 노비를 소유하려는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권귀들의 농장에 투탁과 압량위천의 형태로 藏獲·處干 등으로 전락한 양인의 수가 점차 증가하여 군현이 전부 비었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한다.

 양인 확보를 위한 고려 말의 전민변정도감 운영에 이어, 조선왕조는 良人과 賤人을 분간하려는 구체적 법규를 마련하였다.029) 뒤의<4분설>과<양분설>참조. 조선왕조의 양인 확보와 양천분별 의지는 법제적 노력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양인을 농업 생산기반에 귀속시켜 안정된 생활기반을 갖도록 하는 한편 이들에게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감을 갖도록 하는 사회적 의미가 있었다. 補充軍 제도의 설치가 바로 그 예이다.

 태종대 좌의정 朴誾이 “국가 백성 중에 천인이 많고 양인이 적어서 보충군 제도를 만들어 從良하는 길을 넓혔던 것입니다”030)≪世宗實錄≫권 9, 세종 2년 9월 병인.라고 올린 상소 요지는 그러한 왕조 초기의 양인확보 정책의 의지를 잘 반영한 것이다. 보충군은 태종 14년(1414) 양천 분간의 기준이 세워진031)≪太宗實綠≫권 27, 태종 14년 정월 기묘. 다음해에 후속 조치로 설치되었다.032)≪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3월 병오. 그것은 양인을 되도록 많이 확보한다는 방침에 의거, 천인이거나 양천의 분간이 어려운 자들을 일괄적으로 보충군에 속하도록 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군역에 종사하면 양인이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보충군 제도는 조선 초기 兵種으로 존속하여 양인 증대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도 양인 증대를 위해 良賤交嫁 소생의 신분에 대한 從母法(從母爲賤法)의 적용 관습을 바꾸어 어느 한 쪽이 양인이면 양인이 되게 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양인을 늘리기 위하여 奴婢從父法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양인 증대책은 양인의 대부분이 담당하는 군역의 증대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국가재정 기반의 확대를 의미하였다.033) 李成茂, <朝鮮初期 奴婢의 從母法과 從父法>(≪歷史學報≫115, 1987).

 이처럼 조선왕조가 신분을 법제화하면서 정비하려는 주된 목적은 신분에 따른 役의 배분을 통해 국가재정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특히 양인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농민에게 국역의 대상으로서 여러 종류의 국역을 부과하였다. 또한 신분적 위상이 비슷한 공인이나 상인들에게도 국가의 수요에 따라 필요한 인원을 책정하여 소정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그것은 곧 국역의 이행으로 간주되었다.

 신분과 역의 연계성에서 나타난 것이 이른바 身良役賤層이다. 대다수 농민의 사회적 위치를 밝히기 위해서는 이 시기에 자주 거론되는 이른바 신량역천층을 농민층과 대비하면서 그들이 수행한 직역이 국가가 지정하고 있었던 구체적 직역이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량역천층은 신분이 일단 양인으로 파악되지만, 그 역이 고되어 사회적으로는 천시되는 사회계층이었다. 이른바 稱尺者:楊水尺·水尺·禾尺·量尺·刀尺·琴尺·廩尺·海尺, 稱干者:處干·直干·國農所干·鹽干·鐵干·水站干·生鷹干·酥油干·守護干·烽火干·牧子干·生鮮干·庭燎干·毛物干·營繕干·宗廟干·迎曙亭干·鮑作干·山丁干 등에서 보이는 직역은 국가가 국역으로서 일정한 인민이 담당하도록 신분적으로 제한하여 세습토록 하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역을 수행하거나 물품을 조달, 공급하도록 법제화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왕조가 이들의 성과를 공적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반대급부로서 그들에게 入仕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것의 명분으로 그들을 양인의 범주에 포함시키려 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사회신분과 국역과의 연계는 모든 신분에 있었다. 그러나 양인층 가운데 관인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직역이 곧 국역으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면 위로는 양반관료직에서부터 중간계층에 포괄되는 譯官·醫官·天文官·地官 등의 기술직, 그리고 서리직 등에 이르기까지 이에 종사하면 국역을 따로 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관행으로 지배신분층의 직역은 곧 역으로 환원되고 피지배신분층은 力役이 직역으로 명명되면서 신분제 사회로 고착화되었다. 이에 피지배신분층은 국가의 노동력 수취대상이 되면서 농업생산에 기초한 조세와 함께 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신분을 구성하는 직역은 사회신분으로 구현되어 신분층의 다양화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지배신분과 피지배신분으로 대별되었다. 그것은 지배층을 구성하는 직업과 피지배층을 구성하는 직업에 따라 종사하는 사람들의 혼인권이 스스로 구별되었고, 이들은 각자의 직업을 세습 하면서 이 시기 생산성의 효율성을 유지하였음을 의미한다.

 지배신분층은 제도적 장치와 통혼이라는 사회관행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우위와 사회적 제반 특권을 유지하였다. 거기에는 자신들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지배층의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신분상승이라는 역사현상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하는 점은 사회발전 과정의 역사이었다.

 여말 선초의 신분제 정비는 1차적으로 지배층의 배타적인 특권유지를 위한 법제적 조치(정치적 조치)와, 2차적으로 피지배층의 신분적 구성이 사회 관행과 제도에 의해 매우 불안하게 이루어진 이 시기 사회 전반의 불안정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고 있었다.

 지배신분층으로 합류될 수 있는 방법은 관리가 되어 지배신분을 얻거나 혼인을 통하여 그들의 생활권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지배신분층은 피지배신분층 모두를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호적법에 기록하고 있었다. 고려시기부터 지배신분층은 정치적 능력의 기준인 학문적 능력을 평가하는 과거시험을 통하여 여과되기도 하였지만, 여말 선초에는 사회관행과 법제적 내용을 충족시키는 것으로서 호적의 등재와 정리가 이루어졌다. 지배신분층과 피지배신분층과의 사회신분의 정비를 의미하는, 즉 호적의 정리는 정치적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호적의 정리를 통하여 입사할 수 있는 신분층을 제한하려 는 노력은 이른바 양반 호적의 정리로 나타나기도 하였다.034) 金光洙, <高麗官班體制의 變化와 兩班戶籍 整理>(≪歷史敎育≫35, 1984) 참조.

 호적은 법적 자료로서 강제 근거가 되는 사회경제적 기초 자료였다. 호적은 사회관행의 현실을 반영하는 법제적 자료가 되는 셈이다. 고려정부는 이를 토대로 국가재정을 입안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였다. 호적은 주로 호주를 중심으로 하여 호주의 부계에 曾祖·祖·父·外祖, 모계에 曾祖·祖·父·外祖의 혈연내용을 기록하고, 率居하고 있는 자·손·노비까지 식솔 모두의 출생과 사망을 기록하였다. 호적자료의 내용이 시사하는 것은 인력의 파악과 혈통에서 오는 세습적 요소와 정치력과의 상관관계를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호적을 통해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 수취대상을 파악하였던 것이다.

 호적기재 사항 중 신분과 연계되는 것은 직역 부분이다. 직역으로 표시되는 것은 前錄事·學生·前別將·白丁·戶長·散員同正·노비 등으로 관직·鄕職·散職·正役奴婢에 종사했거나 종사함을 기록하였다. 정부는 호적의 사회신분 관행에 대응하는 법제적 기록의 관리를 통하여 국가의 인력을 동원하였던 것이다.

 호적제의 붕괴로 표현되는 사회현상으로는 권세가들의 사민화와 양인 스스로 어려운 생활을 타개하기 위해 농지로부터 이탈하여 역역 파악 대상으로부터 도피하고 유망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는 새 왕조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그것은 국가재정의 안정과 함께 대다수 인민에 해당되는 농민이자 기층민의 안집과 직결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차적으로 기층민의 안집과 국가재정의 확보를 위한 양민층 확대책의 일환으로 양인의 색출작업이 진행되었다. 이것은 호적법의 쇄신과 그 법제적 운영인 전민변정 사업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이 사회전체를 조감하면서 기층민의 확보에 유의하여 진행되려면 양반직역에 해당하는 사회계층을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점과 전국민을 산업구조와 어 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문제도 고려되어야 했다.

 다시 말하면 국가의 직역에 따른 신분개념이 산업구조에 종속될 수 있다면, 조선왕조는 직역에 대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조정작업과 사회신분의 관행과의 조화를 모색해야 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신분은 양인으로 파악되었으나 직역이 고되어 사회적으로 천시되는 신량역천층이 나타났던 것이다.

 전 사회구성원에게 국가적인 차원에서 직역이든 역역이든 일정한 역을 맡게 하는 정치적 구상을 가능케 한 이념은 유교논리였다. 신분체제를 이론적으로 강조한 것도 바로 유교의 정치이념이었다. 유교는 신분체제의 구조와 윤리적 내용으로 상하관계를 강조하고 있었다.

 유교정치 이념에 대한 사회질서와 신분의 체제상의 구상은 이른바 유교적 職役觀에 따른 국가적 分役上의 구상이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지배영역에 종사하는 전문인 양성·보호와 함께 사회적으로는 피지배층에 속하는 생산영역에 종사하는 다양한 직역까지도 국가가 정책적·법제적으로 분화시키고 있었음을 유의해야 하겠다. 고려의 정치사회 안에서 고려왕조가 지향하였던 유교적 직역 분담을 고려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수정·보완해야 하는 역사적 필연의 문제는 여말 선초의 시점에서 제기되었고 이는 또 다시 조선 왕조에서 신분의 재정비라는 과제로 표출되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생산품과 이를 생산·유통·분배하는 과정의 유기적 관계, 그리고 이 체제를 지속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왕조는 국가적 체제 위에서 국가가 수요로 하는 필수품에서부터 고급문화 수요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품을 생산토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인원을 양성·귀속시켰으며 그것을 세습토록 하였다. 조선왕조는 가장 중요한 농업의 식량생산에서 농민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려는 정치적 노력을 기울이고 극히 소량의 전문품목 생산에 종사하는 匠人에 이르기까지도 생산, 또는 운영 부분의 인력을 배양하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국가의 이러한 구상과 운영체제는 불가피하게 변화와 수정을 맞이하였다.

 이를테면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의 경우, 이들의 지속적인 생산활동을 위해 국가는 토지와 영농기술의 향상, 생활보호를 위한 국가적 배려를 하였다.그러나 토지에 대한 점유·매매·양도·상속 등으로 표현되는 토지에 대한 권리를 농민들이 자유롭게 행사하지 못하게는 할 수 없었다.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유리하여 이탈되도록 한 사회적 변화를 맞이하였을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국가 즉 왕조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국가의 절대적인 인구를 차지하는 농민인 인민이 토지로부터 유리되어 불안한 삶을 영위하게 되었을 때 왕조가 정치적으로 가장 큰 부담을 갖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도 이 시기의 정치권에서는 호적법을 통하여 농민의 이동을 억제하여 농업생산의 안정을 모색하였다. 물론 농민의 사회생활을 토지와 함께 안집토록 유도하는 직접적인 방법이 호적 정리와 신분제 정비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세의 보편적 제도로서 직역이라는 제도적 장치는 모든 국가 구성원이 분담하는 역할에서 적어도 3중적 원리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농민의 경우, 농업생산의 역할을 담당하여 농업부분에서의 역할 수행이 만족스럽다고 해서 모든 의무를 수행한 것은 아니다. 농민의 경우, 身役(力役)과 戶役이라는 3중의 역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중세가 신분제 사회라는 특징으로 표현되는 것이 田結의 결수에 신역과 호역의 기준이 있었다는 점과 관련됨을 유의한다면, 농민의 농업생산에서의 이탈은 호적의 문란 그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즉 호적의 정리와 사회신분 파악의 문제는 단순히 직역의 표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질서의 혼란이라는 면과도 연계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국가적 입장에서 농업부문의 생산성 낙후와 농민의 농지에서의 이탈은 농민이 농업과 아무런 관계가 없이 부담하였던 신역과 호역부문의 결손까지 그대로 큰 재정적 손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농민의 사회생활의 안집 자체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즉 국가재정면에서 큰 결손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므로 농민의 안집문제는 우선적으로 정치적·경제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었다. 따라서 고려 말 농민이 토지로부터 유리되고 있다거나 농민의 생활이 불안하다고 하는 지적이 있었던 데서, 우선적으로 농민의 생활 근거인 토지문제를 해결하면서도 그와 연계되는 신분문제 또한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왕조의 교체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이 변화된 산업구조와 사회구조를 반영하여 새로운 유교적 산업구조의 편성을 모색하는 신분제 재편성의 의지를 읽게 된다. 따라서 인민이 구성하고 있는 농업부문과 관련된 변화상에 대해 간략한 검토가 필요하다.

 고려 말 농민은 전주의 수취 강화로 인하여 경작을 포기하거나, 流離逃散 하였다. 그것은 수조권자인 전주들이 佃客 농민들에게 2중·3중 또는 5·6중의 수취를 하자 농민들이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가 지정해 주는 농민적 지위를 포기하고 전객으로서 농장 속에 私民化되었기 때문이었다.035) 金泰永,≪朝鮮前期土地制度史硏究≫(知識産業社, 1983).
李景植,≪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一潮閣, 1986).

 국가는 고려 시기에 발생한 사전의 폐단을 구제하기 위한 私田改革論에서 수조지 전주의 폐단을 개혁하자고 논의하고 후에 科田法에서는 전주에 대한 조세 수취율을 10분의 1로 조정함으로써 농민에 대한 과도한 수취를 억제하도록 하였다. 이에 농민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농법의 향상과 동시에 자신들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법제적으로 느슨한 보호와 국가재정의 확보를 위한 농민의 생활 안정 조치가 요구되었다. 토지 소유권의 안정을 통한 경제적 조처가 이루어 지면서 농민들 자신이 갖는 사회신분을 공적인 신분으로 보호받았고 그것은 상급 신분과 연계될 수 있는 명분적 내용으로 발전되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새 왕조는 현실적 필요성과 명분에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들을 포섭해야 할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신분의 재정비로 구현되었고 그것은 호적정리에서 읽을 수 있다.

 호적에는 부계 및 모계의 혈통과 직역, 생활단위인 가족 속에서 역역을 동원할 수 있는 실제 인물수를 사실대로 표시되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조세 담당자로서 농민을 확보하는 전제의 정비·개혁과 함께 그들의 신역으로서 표기되는 역역을 신분과 연계하여 신분을 정비·정돈하는 문제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전민변정도감의 置廢가 거듭되고 있었던 것도 당시의 이러한 사회경제적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전체 산업구조와 사회구조의 발달로 말미암아 일반인이 쉽게 특정한 역을 수행할 수 있고 유통구조에서 필요한 물품을 쉽게 공급받을 수 있을 때036)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장시에서 필요한 물품을 공급받고 있었다. 국가가 지정하는 특수 定役의 법제는 스스로 소멸할 수밖에 없었다.

 여말 선초에 이어 진전된 조선 초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는 농업부문 등의 생산성 향상을 가져와 고려 이래 유교정치권에서 지향하였던 직분의 정역구조에서 양인·양민들의 내적 발전을 가져왔다. 이는 그들의 정치적 요구로 정치권의 참여 기회를 양인의 범주로까지 확대시키는 한편 이와 정반대로 아예 공민의 범주에서 벗어나 사민화되는 양극화 현상으로 나타났다.

 후자의 현상을 우리는 사료에서「壓良爲賤」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위험스러운 사회현상으로 정비의 대상이었다. 양인의 사민화를 막고 그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정치적 노력이 새 왕조가 해야 할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모두 포함해서 교정할 수 있는 것은 전민변정도감의 치폐 과정에서 거듭 논란된 호적법의 정비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곧 사회신분제의 재정비로 표현되었다.

 새 왕조에서 사회신분제를 재정비하면서 미래지향적으로 갖추려고 한 요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새 왕조의 公民 확보·확대를 달성하고, 둘째로 공민인 양인들에게 의무만 지울 것이 아니라 새 왕조에서 그들의 법제적 권리의 일부로서 신분상승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였다. 셋째로 유교정치 논리가 지향하는 국가적 직역 논리와 모순되지 말아야 하므로, 느슨한 양인·천인의 범주 안에서 특수한 기술과 독점적 이익이 보장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지정된 직역을 점차 줄여가는 방향으로 사회신분의 법제화를 이루려고 하였다. 넷째는 새 왕조의 집권층은 새로운 권력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고도의 배타적인 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사회신분과 연계되는 직역을 호적에 표시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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