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3. 양반
  • 3) 양반의 특권
  • (1) 문음의 특전

(1) 문음의 특전

 그러면 문음의 특전으로는 어떤 것이 있었는가. 문음자제들에게는 우선 음직이 주어졌다. 음직은 공신이나 2품 이상관의 아들·손자·사위·동생·조카(단 原從功臣은 아들·손자), 실직 3품관의 아들·손자, 앞에서 언급한 양반 청요직을 지낸 관원의 아들에 한하여 주어졌다. 이들은 20세가 되면 5경과 4서 중 각 1경씩을 시험보며 여기에 합격하면 종9품부터 정7품에 이르는 參下官職을 받게 되어 있었다.112) 태종 4년(1404) 8월에 제정된「勳親之嗣加冠從仕之法」에 의하면 勳親子弟(蔭子弟)들은 18세에 初入仕할 수 있었다(≪太宗實錄≫ 권 8, 태종 4년 8월 갑오). 그러나 그 후 蔭職을 받을 蔭子弟의 수가 늘어나자 세종조에는 25세로 初入仕 年齡을 늘였다가(≪世宗實錄≫ 권 43, 세종 11년 정월 신해), ≪經國大典≫에서는 다시 20세로 내렸다(권 1, 吏典 取才 蔭子弟). 그리고 蔭子弟는 守令·外敎官·驛丞·渡丞·書題·錄事·道流·書吏取才와는 달리 製述과 書算은 시험보지 않고 단지 講經만 시험보았는데 5經·4書 중 각 1經씩을 선택하게 되어 있었다(위와 같음). 음직은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역임한 실직 관품의 높고 낮음에 따라 다음과 같은 관품을 받게 되어 있었다.113)≪世宗實錄≫권 29, 세종 7년 7월 임오.

祖父 또는 父의 官品 長子의 散官 長孫·次子의 散官
정 1 품
종 1 품
정 2 품
종 2 품
정 3 품
종 3 품
정 7 품
종 7 품
정 8 품
종 8 품
정 9 품
종 9 품
종 7 품
정 8 품
종 8 품
정 9 품
종 9 품
종 9 품

<표 1>문·무 3품 이상의 자손 음직표

 음직은 원칙적으로 장자만 받을 수 있었으나 장자가 유고일 때는 장손이나 次子·壻·弟·姪까지 받을 수 있었으며 父祖가 사망하거나 致仕했어도 음직을 받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물론 음서에는 直子가 일차적인 대상이 되었고 같은 托蔭者의 음서에는 1子만이 혜택을 받을 수 있었으나 다른 기회에는 다른 대상자들이 혜택을 받을 수도 있고 또 탁음자가 다를 경우에는 혜택의 범위가 넓어질 수 있었다. 조선 건국 초기의≪元六典≫에서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1인 1자의 원칙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나 고려 후기부터 현실적으로 넓어진 양반관료층의 자제들을 포용하는 새로운 관료체제를 지향하는 새 왕조에서는 이것을 그대로 실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음서대상이 장자→장손→차자로 이어지는 1인 1자의≪원육전≫규정은 세종대에≪續六典≫에 이르러 아들·사위·동생·조카 등의 衆子·衆孫으로까지 확대되어 갔고 여기에다 3품 이하 청요직의 아들에게까지 음직을 주도록 되어 있었다.114) 이러한 蔭敍 대상의 확대는 ≪經國大典≫권 1, 吏典 蔭子弟에서 품급별로 음서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정하였다.≪경국대전≫에는 음서 대상을 1인 1자에 제한하되 탁음자의 공훈이나 관품에 따라 수시로 아들·손자·사위·동생·조카들 중 어느 범위까지를 음직 수혜대상으로 정하고 있다. 만일 음직 수혜대상자를 1인 1자로 국한한다면 공신이나 2품 이상관 및 청요직을 가진 3품 이하관의 혜택이 다를 것이 없게 된다. 그리고≪원육전≫에 정·종 1품의 장자는 정·종 7품, 정·종 2품의 장자는 정·종 8품을 주되 장자가 없으면 장손이나 차자가 減等受職 한다고 한 것을 보아 장자우선주의가 적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도 실제로 중자·중손의 음서가 제한되지는 않았다. 세종조의≪속육전≫에서 음서 대상을 확대한 것이 그것이며 黃喜의 아들인 黃守身·黃哲身이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도 고위관직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음직규정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음서대상자가 많아지자 아들에게도 4서 5경 중 1서·1경을 시험보여 합격자에 한하여 음직을 제수하게 되었다. 음서대상자를 늘이는 대신 이들에게 시험을 치루게 하여 하급관리가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로 하여금 조선왕조 관료층을 형성하는 기층이 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렇게 뽑힌 자도 사실상 모두 流品職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內侍·茶房·宣差房 등 성중관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자는 이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국대전≫에 녹사에 입속하기를 원하는 자는 들어준다고 한 것은 이를 법제화한 것이다. 상급 서리인 성중관은 뒤에 녹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115) 韓永愚, 앞의 글 참조.

 그러나 음자제라고 모두 蔭子弟取才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음자제 취재뿐 아니라 일반 취재나 과거에 합격하여 얼마든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능력이 없어 음자제 취재조차 합격하지 못하는 사람은 功臣嫡長·忠義衛·忠■衛·忠順衛 등 특수군에 입속할 수 있었다. 정권 안보적인 차원에서 이들로 하여금 정치보위군이 되게 하는 것은 가장 안전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공신적장은 공신의 적장자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長番武衛로서 모두에게 체아직을 주었다.116)≪經國大典≫권 4, 兵典 功臣嫡長. 공신적장의 체아직이 無定數로 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층의위에는 공신적장을 제외한 공신자손 및 첩자손 承重者가, 충찬위에는 원종공신의 아들·손자 및 첩자손 승중자가, 충순위에는 왕의 異姓緦麻 外六寸以上親·왕비의 緦麻 外五寸以下親(선왕·선후의 친족도 같다), 동반 6품 이상·서반 4품 이상의 실직 顯官을 지낸 사람이나 문·무관출신·생원·진사·유음자·문음을 받을 대상이 되는 아들·손자·사위·동생·조카가 각각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117) 위와 같음. 공신 및 양반관료의 자제들로 하여금 특수군을 편성함으로써 그들의 진출로를 열어 줄 뿐만 아니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자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제도라고 생각된다.118) 蔭敍에 대해서는 李成茂, <朝鮮初期의 蔭敍制와 科擧制>(≪韓國史學≫12,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1), 140∼142쪽 참조. 조선시대에는 동정직·검교직·첨설직과 같은 산직을 없애고 모든 입사 대상자에게 시험을 보여 관직에 임명하는 취재 시험제도가 발달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관료제 발달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에 아무리 음자제라도 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관리가 될 수 없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가 음서 인원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물론 음자제에게는 처음에 1경만 시험보였다. 그러나 ≪경국대전≫에는 4서 중 하나를 보이는 것으로 되었다. 비록 음자제라 하더라도 일정한 시험을 거쳐 관직을 준다는 것은 고려의 음서 제도와 크게 다른 점이라 하겠다.119) 李成茂, 위의 글, 143∼144쪽.

 한편 조선 초기에는 2품 이상 관료의 자제에 한하여 四部學堂에서 成均館으로 올라 가는 시험인 陞補試를 거치지 않고 직접 성균관 寄齋(下齋)에 올라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고 있었다. 이를 門蔭陞補라 한다. 이들은 上齋生인 생원·진사와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학당에서 성균관으로 올라가려면 원칙적으로 15세가 되어 소학과 4서에 통달하고 승보시에 합격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음자제들에게는 4서 중 한 책을 시험보여 합격하면 성균관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 문음승보의 혜택은 세종조에 4祖 안에 3품 이상관을 지낸 사람이나 의정부·6조·대간 등 청요직을 지낸 사람의 아들과 손자에게까지 화대되었다. 이는 음직제수 대상자와 그 범위가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성균관 기재생은 거의 문음승보생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이에 세종 15년(1433) 9월에는 문음 승보생의 수를 30인으로 제한하고 세종 18년부터는 소학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누구도 성균관에 입학할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향교에는 승보시가 유명무실하고 중앙의 4부학당에만 승보시가 중시되었던 것도 경중 양반자제들에 대한 하나의 특권이었다.

 또한 음자제들은 중앙에 있는 관청에 南行으로 들어가 행정실무를 익힌 다음 실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문과출신자도 가문의 배경이 없으면 三館(承文院·成均館·校書館)의 權知(修習職)로 6∼7년을 지나야 비로소 9품을 받고, 6품까지 올라 가려면 8년이 걸리므로 나이 30∼40에 급제하면 3관의 한 귀퉁이에서 늙어버리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세종 10년 11월에는 음자제 대신 3관권지를 각 관청의 남항으로 쓰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항직은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음자제의 진출로로 광범하게 이용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남항수령이 많았던 것은 그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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