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3. 양반
  • 3) 양반의 특권
  • (2) 과거의 특전

(2) 과거의 특전

 양반은 과거시험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양반이 응시하는 과거시험은 문과와 무과였다. 그러나 무과에는 뒤에 일반 양인들도 응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무과는 조선 초기에는 28명의 정원이 지켜졌으나 조선 후기에는 이른바 萬科라 하여 수천 명씩 뽑기도 하였으므로 양반들에게 매력을 잃게 되었다. 그러므로 양반들의 주된 관심은 문과와 그 예비시험인 생원·진사시에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범죄자·국가재정을 횡령한 자의 아들과 재가하거나 행실이 나쁜 부녀의 아들과 손자·서얼의 자자손손을 제외한 양인 이상의 모든 사람은 문과, 생원·진사시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노비를 비롯한 천인이나 身良役賤은 여기에 응시할 수 없었다.120)≪經國大典≫권 3, 禮典 諸科. 국가의 공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양인은 향리나 역리처럼 身役을 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양반과 마찬가지로 과거에·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인이 과거에 응시하는 데는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

 첫째, 양인은 장기간에 걸친 과거준비를 할 수 있을 만한 경제력을 가지지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통계에 의하면 과거에 급제하기까지는 적어도 25∼30년간의 준비기간이 필요하였다.121) 宋俊浩, <朝鮮時代의 文科에 關한 硏究>(프린트본, 1975), 86쪽. 그런데 조선 초기의 양인들은 대부분 영세농민이었다.122) 세종 18년(1436) 7월 江原道監司 啓에 의하면 總 家戶 11,538호 중 5결 이하를 경작하는 殘戶가 전체의 67.4%나 되었다고 하였으며(≪世宗實錄≫권 74, 세종 18년 7월 임인), 세조 4년(1458) 정월 平山都護府使 鄭次恭의 上書에 토지없는 농민이 거의 10분의 3이나 된다고 하였다(≪世祖實錄≫권 11, 세조 4년 정월 병자). 토지없는 가난한 양인의 아들이 적어도 25∼30년간 과거 시험 준비에만 몰두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둘째, 교육환경이 양반자제에 미치지 못하였다. 양반자제들은 그들의 특권적인 과거준비 교육기관인 私學을 설치하여 학덕있는 선생을 모셔다가 특별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는 家塾을 세워 5살만 되면 童蒙교육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향교나 학당에 가서 국비로 공부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학당에는 경중의 양반자제들이 들어가고 향교는 유교윤리를 보급하려는 국초를 제외하고는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국가에서는 모든 것을 국비로 하여 향교를 계속 충분히 지원할 수 없었으며 양반들이 그들의 자제를 향교에 보내어 양인자제들과 공평하게 경쟁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향교교육은 부실해지고 유능한 교관이 향교교관으로 가는 것을 기피하여 향교는 점차 양인자제들의 군역을 피하는 소굴로 바뀌어 갔다. 따라서 국초를 제외하고는 향교생도(校生)가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123) 李成茂, 앞의 글(1970). 이러한 상황에서 양인의 문과, 생원·진사시 합격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서책도 구하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셋째, 양인들은 과거응시 절차에 있어서도 양반보다 까다로운 점이 있었다. 과거응시자들은 응시서류로서 호적과 保單子(身元保證書)를 내게 되어 있것다.124)≪大典後續錄≫권 3, 禮典 諸科. 4祖 안에 顯官(東·西班 正職)이 있는 양반은 보단자를 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4조 안에 현관이 없는 양인은 보단자와 아울러 지방에 사는 사람은 경재소원 3인, 서울에 사는 사람은 해당 部의 관원 3인의 추천서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다.125) 위와 같음. 양인이 이들의 추천서를 받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4조 안에 현관이 있나 없나에 따라 양반과 비양반을 가리는 관행도 이러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양인이 전혀 문과, 생원·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집안이 넉넉하고 여건이 갖추어진 사람이면 문과에 급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일설에는 양인은 양반과 아무런 차별없이 문과, 생원·진사시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양반이란 문관직이나 무관직을 가진 점이 양인과 다를 뿐이라 하기도 한다.126) Choe Yong-ho, Commoners in Early Yi Dynasty Civil Examinations:An Aspect on Korean Social Structure, 1392-1600,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33. No. 4, 1974, pp. 616∼623. 이러한 주장은 조선 초기의 사회신분을 법제적인 측면에서만 이해하려는 데서 오는 오해이다. 사회신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법제적인 측면에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적 측면에서 보는 것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물론 실록에도 金義精·崔湑·崔岦·潘碩枰·宋尙問·趙成·李順命·李得全·高荊山·方有寧·安中孫·崔山斗 등 양인으로 보이는 급제자도 있었다.127) Choe Yong-ho, 위의 글. 그러나 이 중 반석평(?∼1540)은 어느 재상집 종이었다가 주인의 알선으로 어느 부자집 아들이 되어 문과에 합격한 사람이고, 송상문은 주인을 배반하고 몰래 과거시험을 본 私奴였으며, 조성은 首陽大君의 종으로서 세조의 佐翼功臣이 되었던 趙得琳의 아들이었다. 즉 이들은 사노로서 비상한 방법으로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최서·최립·고형산·방유령·안중손·최산두·김의정 등은 門地가 한미하였다고 한 것을 보아 양인일 수도 있고 영락한 양반일 수도 있는 인물들이다. 또한 이순명과 이득전은 향리였다. 이렇게 보면 1392년부터 1600년까지 200년간 고작 12건의 양인급제자의 사례가 발견된 셈인데 이것을 가지고 모든 양인이 아무런 제약없이 문과, 생원·진사시에 급제할 수 있었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더구나 문지가 한미하였다고 해서 무조건 양인이었다고 할 수도 없다. 혁혁한 양반도 몰락하여 가난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중손의 경우를 보더라도 가난했지만 노비를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양반이었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모두 양인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과거를 거쳐 양반으로 상승한 사례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가 드물었기 때문에 특별히 실록에까지 기록되게 된 것일 뿐이다. 그러니 소수의 사례를 가지고 모든 양인이 양반과 아무런 차별없이 문과 생원·진사시에 급제할 수 있었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128) 李成茂,≪朝鮮初期兩班硏究≫(一潮閣, 1980), 62쪽. 이로 미루어 보아 조선 초기에는 양인의 과거응시가 법제적으로 보장되어 있었으나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문과, 생원·진사시에 급제한 자는 적은 수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129) 李成茂, 위의 책, 63쪽.

 그러면 양반과 양인의 신분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이었나. 家世와 門地였다. 양반의 가세와 문지는 가계 안에 천계 혈통이 섞이지 않아야 하고, 과거급제자나 현관이 많아야 하며, 훌륭한 양반가문과 통혼할수록 높아지게 되었다. 과거시험에서 응시자에게 호적과 보단자를 내게 하여 4조-부·조·증조·외조-를 따지는 것도 가세와 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우선 4조 안에 천계 혈통이 끼어 있으면 그 응시자는 서얼로 판정을 받아 문과, 생원·진사시를 볼 수가 없었다. 따라서 과거시험이나 관리선발에 있어서 재능만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가세와 문지를 따졌다. “우리 나라 과거의 법은 試才만이 아니라 족속으로도 판별한다”130)≪太宗實錄≫권 33, 태종 17년 2월 경진.고 한 것이나 “옛부터 用人할 때에는 재주만으로 하지 않고 반드시 먼저 그의 가세와 문지를 살펴본다”131)≪世朝實錄≫권 43, 세조 13년 9월 경인,라고 한 것 등이 그 예이다.

 양반들은 ≪경국대전≫에서 양인에 대해서는 과거응시 자격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자기들과 경쟁대상이 될 만한 향리와 양반서얼에 대해서는 일정한 규제를 하였다. 향리자제에게는 문과, 생원·진사시에 응시하는 것은 제한하지 않았지만 잡과에는 세 아들이 있으면 한 아들만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132)≪經國大典≫권 1, 吏典 鄕吏. 그렇다고 조선 초기에 향리출신이 문과, 생원·진사시에 많이 합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 초기에 군현제를 정비하면서 향리를 대폭 이동시키는 등 향리세력을 크게 억제하였고 또 향리가 과거시험을 볼 때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랐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향리자제가 생원·진사시에 응시하려면 반드시 자기 소속 군현의 수령에게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든지, 무과 初試에 향리에게는 과외로 武經七書를 시험보여 粗 이상의 성적을 받아야 응시를 허락했다든지, 생원·진사시 覆試 전에 보이는≪小學≫·≪家禮≫의 講 시험인 學禮講 외에 향리는 4서와 1경의 강 시험을 더 보아야 한다133) 宋俊浩,≪李朝生員進士試의 硏究≫(國會圖書館, 1970), 31쪽.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 이외에도 향리역을 질 사람이 줄어든다는 핑계로 양반관료들이 보단자를 써주기를 꺼린다든가, 4조 판정에 불리한 판정을 받기 쉬운 점 등 여러 가지 난관이 따랐을 것이다.134) 李成茂, <朝鮮初期 文科의 應試資格>(≪論文集≫9, 國民大, 1975), 89쪽. 어떻든 조선 초기에는 향리의 문과 급제자수가 적었으며 향리가 구태여 사족을 사칭하여 문과에 응시하려는 것도 그들의 응시에 일정한 제약이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향리나 서얼에 대해서는 ≪경국대전≫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조문이 있고 양인에게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고 하여 향리나 서얼보다 양인의 신분이 높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역으로 해석해야 될 것 같다. 향리나 서얼(양반서얼)은 과거시험에 있어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부류였으므로 구체적인 규제 사항을 정해 둘 필요가 있었지만 경쟁대상이 아닌 양인에 대해서까지 제한을 가하는 문구를 만들어 저항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이것을 가지고 양인이 양반과 아무런 차별없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오히려 양반들이 법전에 양인 응시자들의 응시자격에 대하여 가부간에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음으로써 이들을 置之度外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135) 李成茂, 위의 글, 90쪽.

 그러면서도 양반은 과거시험에 있어서의 자기들의 특전을 많이 마련해 놓고 있었다. 과거제도를 비롯한 관료제도를 만든 것도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6품 이상의 참상관은 과거시험을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136)≪高麗史≫권 105, 列傳 18, 許冠.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참상관도 과거, 특히 문과, 생원·진사시를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과거에 응시할 경우 떨어지고 붙고를 막론하고 職牒告身을 반납하게 되어 있었으나 이 원칙은 곧 무너져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직첩을 돌려줄 뿐 아니라 응시자에게 휴가의 편의까지 제공하였다. 그 후 ≪경국대전≫에는 문·무과의 경우 당하관(정 3품 통훈대부 이하)이, 생원·진사시의 경우 낭관(5품 통덕랑 이하)이 응시할 수 있도록 되었다.137)≪經國大典≫권 3, 禮典 諸科. 다시 말하면 당상관이 된 사람은 문·무과를 볼 필요가 없고, 大夫가 된 사람은 생원·진사시를 볼 필요가 없다는 뜻도 된다. 10년에 한 번씩 보는 문·무과 重試도 당하관만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이 현직관료들을 문·무과에 응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음자제들에게 매우 유리하였다. 유직자의 상당 부분은 음자제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無職者를 새로 관리로 뽑는 데도 의미가 있었지만 기왕에 관리가 되어 있는 사람의 관품을 시험 성적에 따라 몇 등급씩 올려주거나 실직 자체를 올려주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즉 초입사와 超資·超職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직자도 시험 성적에 의하여 초자·초직될 수 있었고 유직자는 시험 성적에 따라 자기가 가진 관품에서 또 몇 등급씩 초자·초직될 수 있었다. 무직자 및 유직자의 초자·초직 규정은 다음<표 2>와 같다.

 <표 2>에서 우리는 무직자라도 예컨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면 참상관의 실직을 직접 받게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양반관료가 근무일수에 따라 단계적으로 승진하는 승진법(循資法)에 따라 올라가려면 순조롭게 올라간다고 해도 7년이 넘게 걸리는 기간을 단축하는 특혜를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퇴직·사고·고과로 인한 무직상태를 고려한다면 얼마가 더 걸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성적이 낮은 사람들도 장원보다는 못하지만 각각 일정한 승진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과 별 문 과 무 과
무 직 자 유 직 자 무 직 자 유 직 자
장 원 종 6 품직 加 4 階    
갑 과
을 과
병 과
정 7 계(직)
정 8 계(직)
정 9 계(직)
加 3 階
加 2 階
加 1 階
종 7 품계(직)
종 8 품계(직)
종 9 품계(직)
加 1 階
加 1 階
加 1 階

<표 2>문·무과 급제자 超資·超職表

 그런데 정1품관의 아들인 경우는 이미 음직으로 정7품을 받고 있었다. 이것은 이미 무직자가 문과장원을 했을 때와 같은 기간을 뛰어 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관직에서 4계를 뛰어 올라갈 수 있었으니 이들은 곧 4품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階窮者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상관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것은 장원뿐 아니라 갑과 급제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단 을·병과 급제자는 일단 정3품 당하관의 실직에 准職시켰다가 당상관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138)≪經國大典≫권 1, 吏典 諸科. 그리고 加階된 품계가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 할 품계와 같을 때에는 거기서 또 1계를 더 올려받았다.139) 위와 같음.≪元六典≫에는 을과 3인. 병과 7인을 합하여 10인에게 실직을 바로 주던 것을140)≪世宗實錄≫권 44, 세종 11년 4월 갑신. 世祖朝 이전에는 1등∼3등을 乙科, 4등부터 10등을 丙科, 11등부터 33등을 同進士로 부르다가 세조 12년(1467) 5월부터 甲科·乙科·丙科로 바꾸어 불렀다(≪世祖實錄≫권 39, 세조 12년 5 월 경진). 태종 원년(1401) 4월 부터는 을과 3인만 실직을 바로 주었으며, 세종 26년(1444) 11월에는 을과 3인 이외의 급제자에게는 散官職만을 주었다. 세종 26년의 丙科·同進士와 산관제수 규정은 다음의<표 3>과 같다.

문 과 무 과
병 과
동 진 사
정8품 산관직
정9품 산관직
2등
3등
종8품 산관직
종9품 산관직

<표 3>문·무과의 병과·동진사·산관직 제수표

 산관직이란 관품만 가진 관직을 의미한다. 이것은 ≪경국대전≫에도 그대로 법문화되어 있다. 을과(뒤에 갑과) 3인 이외에도 참상관으로 급제한 자로서 50세가 넘은 자에게는 또한 실직을 주게 되어 있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