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4. 중인
  • 2) 중인의 성립과정

2) 중인의 성립과정

 조선시대 중인 형성의 단초가 열리는 것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士大夫官僚 들이 고려 말에 크게 문란해진 사회신분의 재편성을 추진하면서 지배신분층 을 상·하층으로 양분화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191) 中人의 성립과정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은 다음의 글을 참고하였다.
李成茂, 앞의 글(1978).
―――,≪朝鮮初期 兩班硏究≫(一潮閣, 1980).

 고려 말 공민왕 이후 添設職이 남발되어 향리·양인 출신의 군인들이 대거 兩班官人의 신분으로 편입됨으로써 양반 관인사회의 수적인 팽창이 급격히 이루어졌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왕조를 개창한 사대부관료들은 지배신분의 자기도태 및 양분화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러한 방향의 신분제 개편은 대체로 조선 초기의 사대부관료들이 유학사 상을 지배이념으로 채택하고 양반관료 체제를 확립하여 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사대부관료들은 유학사상에 입각하여 관념적으로「刀筆之任」을 맡는 서리직은 물론 기술직도 잡직이라 하여 천시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직에 종사하는 자들, 즉 중앙의 서리나 지방의 향리 및 기술관들을 천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사대부의 첩자식인 서얼에 대해서도 일부일처제를 강조하는 유교적 윤리관념에 따라 천시하기 시작하였다.

 위의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천시관념은 현실에 반영되어 이들은 여러 면에서 양반관료에 훨씬 못미치는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양반관직 특히 문반직으로의 진출도 막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양반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사족과는 신분적으로 구분되는 하위의 신분층이 되었다. 그 결과 전·현직 양반관료를 비롯하여 사족들은 상급 지배신분층으로 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 반면 이들은 여기에서 도태되어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되었다. 조선 초기 이래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된 부류는 향리·토관·중앙서리·기술관·서얼 등이었다.

 향리는 고려시대에 과거와 서리직을 통하여 양반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그들 가운데 일부가 양반 관인사회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조선 왕조 개창 이후 향리는 지배신분의 양분화 과정에서 조정의 향리 억압정책에 따라 상급 지배신분층인 사족에 들지 못하고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되게 된다.192) 李成茂, <朝鮮初期의 鄕吏>(≪韓國史硏究≫5, 1970) 참조.

 우선 향리는 사족과 달리 관직 진출에 큰 제약을 받았다. 향리의 관직 진출은 이미 고려 말 잡과를 통한 향리의 免役을 줄인다는 차원에서‘三丁一子’에 한하여 잡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규제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이 규제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향리는 生員·進士試에 응시하려면 반드시 소속 군현인 본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이들에게는 생원·진사시의 覆試 전에 보이는 學禮講(소학·가례시험) 이외에 4書와 1經을 더 시험보였다. 이처럼 조선왕조에 접어들어 합리는 과거 응시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으며, 따라서 조선 초기 이래로 향리로서는 과거에 급제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이와 함께 조선왕조에서는 군현의 개편을 단행하여 향리들을 本貫地로부터 다른 군현으로 이동시킴으로써 그들이 오랫 동안 본관지에 쌓아 놓은 사회경제적 기반을 한꺼번에 무너뜨렸다. 그리고 留鄕所를 설치하여 향리의 작폐를 규찰하는 동시에 元惡鄕吏處罰法을 마련하여 토호적 향리를 제거하였다. 또한 향리는 세종 때 外役田이 혁파됨으로써 국가로부터 녹봉은 물론 토지도 지급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향리는 단지 지방관아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향역부담자로 전락되었다.

 이와 같은 향리 억압정책의 결과 향리는 조선 초기의 세종 때 이전인 14세기 전반에 상급 지배신분층인 사족과는 구분되는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되어 갔다. 그리하여≪世宗實錄地理志≫姓氏條에 士族姓은 土姓, 鄕吏姓은 續姓193) 土姓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이 郡·縣으로 성립될 당시부터 조선 초기까지 그 지방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姓氏를 뜻하며(李樹健, <土姓硏究 其一>,≪東洋文化≫16, 1975), 續姓은 古籍에는 없고≪世宗實錄地理志≫를 편찬할 때 各道 關文에 의하여 새로 追錄된 姓氏를 뜻한다(李成茂, 앞의 책, 33쪽).으로 나뉘어 정리되게 된 것이다.

 토관은 평안·함경 양도의 일부 지역에 설치된 것으로서 대체로 그 지방 의 閑良 등 토착의 유력층이 향리직이나 군직을 거친 다음 임용되었는데, 비 록 5품까지밖에 올라갈 수 없는 한품의 제약이 있었지만 조선 개국 초에는 자신의 토관직 품계보다 한 등급 낮추어 京·外의 양반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토관 역시 이미 15세기 전반에 衙前과 같은 부류로 인식되어 양반관직으로의 진출이 어려워지게 되었다.194) 李載龒, <朝鮮初期의 土官에 對하여>(≪震檀學報≫29·30, 1966).
李章熙, <朝鮮初期 土班武職의 性格>(≪韓國史論≫7, 국사편찬위원회, 1978).
이에 따라 토관도 상급 지배신분층에서 배제되어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중앙의 胥吏는 고려시대에는 소정의 복무기간을 마친 후 문·무 양반관직 에 등용될 수 있는 신분으로서 대체로 동반에 흡수되어 양반체제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195) 李佑成, <高麗朝의「吏」에 對하여>(≪歷史學報≫23, 1964), 25∼26쪽.
金光洙, <高麗時代의 胥吏職>(≪韓國史硏究≫4, 1969).
그리고 녹봉과 함께 전시과 규정에 의한 전지와 시지를 지급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조선 초기에 사대부관료들에 의해 여러 가지 차별대우를 받고 양반관직으로의 진출이 어려워지게 됨으로써 상급 지배신분층에서 배제되어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되고 있었다.196) 중앙의 상급서리인 錄事와 하급서리인 書吏의 하급 지배신분층으로의 격하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였다.
申解淳, <朝鮮前期의 錄事>(≪論文集≫18, 成均館大, 1974).
―――, <朝鮮初期의 下級胥吏「吏典」>(≪史學硏究≫35, 1982).

 중앙의 서리는 상급서리인 錄事197) 조선 초기에는 상급서리가 소속 관아에 따라 錄事·知印·宣差 茶房·內直別監·司樽別監 등으로 불리웠고, 이것을 총칭하여 成衆官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경국대전≫에는 錄事로 일원화되어 나타난다(韓永愚, <朝鮮初期의 上級胥吏「成衆官」>,≪東亞文化≫10, 1971)와 하급서리인 書吏198) 조선 초기에는 하급서리가 소속 관서에 따라 典吏·椽吏·書吏·令史·司吏 등으로 불리웠고, 이것을 총칭하여 吏典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경국대전≫에는 書吏로 일원화되어 나타난다(申解淳, 위의 글, 1982) 두 층으로 구분된다. 중앙의 서리에 대한 차별대우는 이미 고려 말부터 나타나고 있다. 대체로 하급서리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서리직을 통한 수령 진출의 길이 제약을 받기 시작하고, 서리들은 양반관료들과 구분되어 白方笠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199) 고려 말에 중앙의 서리는 士人으로 보임하는 상급서리인 錄事·知印 등과 良家子弟로 充定하는 하급서리인 椽吏·典吏·書吏 등이 있었다(鄭道傳,≪三峯集≫권 7, 朝鮮經國典 上, 治典 補吏). 그런데 상급서리는 조선 초기에도 士族으로 보임되었고 去官 후의 守令 진출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하급서리는 조선 개국 초에 수령 진출이 가능했다고는 하지만 상급서리에 비해 힘들었다. 따라서 고려 말에 수령 진출에 제약을 받고 백방립을 쓰게 된 서리는 하급서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에 접어들어서도 중앙의 서리를 양반관료와 차별하는 정책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중앙의 서리는 고려시대와 달리 과전은 물론 녹봉도 제 대로 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다만 이들은 輪次除授되는 遞兒職 에 의해 遞兒祿을 가끔 받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하급서리인 吏典의 경우에는 議政府·六曹·司憲府·司諫院·承政院 등 사무가 많은 중요 관아에 소속된 자에게만 주어졌고, 그나마도 세종 30년(1448) 이전에 혁파되어 버렸다. 따라서 하급서리직은 조선 초기부터 役으로 파악되어 하급서리인 이전이 京役 부담자로 여겨지고 있었다.

 또한 중앙의 서리는 승진할 수 있는 품계가 제한된 한품의 적용을 받았으며, 승급을 위한 근무일수도 양반관료보다 더 많았다. 상급서리인 녹사는 종6품까지 올라가서 근무를 마치면 去官했고, 하급서리인 서리는 상급서리인 녹사보다 못해서 종7품 또는 종8품까지 올라가서 근무를 마치고 거관하였 다. 그리고 승급에 있어서 양반 참하관의 경우 450일만 근무하면 한 품계를 올려받을 수 있었지만, 상급서리인 녹사는 그보다 약간 많은 514일, 하급서리인 書吏는 거의 6배나 많은 2,600일을 근무해야만 한 품계를 올려 받을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중앙의 서리들이 소정의 복무기간을 마치고 거관한 뒤에 양반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던 길이 조선 초기 이래 사대부관료들에 의해 점차 봉쇄당하여 가고 있었다. 이것은 중앙의 서리직을 통한 양반관직으로의 연 결이 단절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중앙의 서리가 상급 지배신분층에서 배제되어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되는 보다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하급서리인 吏典(書吏)도 조선 개국 초에는 종7품 또는 종8품으로 거관한 뒤에 동·서반 참하직이나 감무·현령같은 하급수령으로의 진출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사대부관료에 의해 15세기 전반인 세종 이전에 하급서리로 거관한 자의 동반 참하직 및 수령으로의 진출이 봉쇄되고, 서반 참하직으로 의 진출도 그 직후인 15세기 중엽 즉 세조 때 봉쇄당하게 된다. 그렇지만 종9품직인 驛丞·渡丞으로의 진출만은 ≪經國大典≫규정에 의해 법제적으로 보장받고 있는데, 역승·도승이 비록 종9품직이라 하더라도 사족 출신자가 보임되는 관직이 아니었고 또 그 직을 통해 상위 양반관직으로의 승진이 안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양반관직이라 보기 어렵다.200) 驛丞마저도 中宗 30년(1535)에 혁파됨으로써 書吏去官者가 제도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은 渡丞 5員뿐이었다. 따라서 하급서리 거관자의 양반관직으로의 진출 봉쇄는 실질적으로 세조 때인 15세기 중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급서리인 녹사는 대체로 조선 초기에는 종6품으로 거관한 뒤에 중앙의 동·서반직이나 지방의 수령으로 진출하는 것이 본인의 능력만 있다면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경국대전≫이 반포 시행된 뒤에도 해마다 녹사로 거관하는 자 10인 가운데 수령취재에 합격하는 자는 수령에 임용될 수 있었고, 합격이 안되더라도 서반 체아직을 받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상급서리인 녹사는 하급서리인 서리와는 달리 대체로 15세기 말까지는 일반 士流와 동등한 신분으로 간주되어 상급 지배신분층의 말단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비록 錄事 去官者들의 수령 등 양반관직으로의 진 출이 법제적으로 봉쇄되지는 않았지만, 「刀筆之任」을 맡는 서리들이 유학을 전업으로 하는 사대부관료들에 의해 천시되는 경향이 갈수록 두드러짐에 따 라 현실적으로 제약을 받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성종조에 「試可之法」201)「試可之法」에 의해 錄事去官者들은 守令取才에 합격하더라도 바로 서용되지 못하고 먼저 主簿·引儀와 같은 京職에 임명되어 수개월 동안 행정사무를 익히고 그 능력을 시험받은 연후에 수령에 서용되게 되었는데, 이 경우 한정된 경직의 빈자리 부족으로 수십 년을 기다려야 했으므로 실제로 수령에 서용되는 것은 극히 힘들었다.을 일시적으로 채택한 것, 중종조에 녹사 거관자의 감찰 임용에 있어 사헌부가 署經을 거부한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따라 16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상급서리 녹사도 사대부관료에 의해 그 미천함이 일반 서리와 다름이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그 신분적 지위가 저하 되고 있었다. 이와 함께 녹사거관자의 수령 등으로의 진출도 갈수록 힘들어 져 16세기 중엽인 명종 때 이르면 현실적으로 거의 봉쇄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사족자제들이 상급서리인 녹사직에 종사하기를 꺼리게 되었다. 결국 16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상급서리 녹사는 양반신분화하는 상급 지배신분층에서 도태되어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되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중앙 서리의 경우 하급서리인 이전(서리)은 15세기 중엽 이전에 이미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상급서리인 녹사는 하급서리보다 약 1세기 정도 뒤늦은 16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되 고 있었다.

 技術官은 고려시대에는 문·무관에 비해 별로 차별대우를 받지 않아서 녹 봉은 물론 田柴科 규정에 의해 전지와 시지를 지급받고 있었다. 조선왕조에 접어들어 15세기 전반까지도 기술학이 국가적으로 장려되어 사족자제들이 각종 기술학을 배워 기술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경부터 기술관들이 사대부관료들에 의해 차별대우를 받기 시작하였다.202) 기술관의 하급 지배신분층으로의 격하에 대해서는 李成茂의 앞의 글(1971)을 참고하였다. 15세기 후반에 반포 시행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기술직으로 가장 높은 품계는 정3품 堂下官(通訓大夫)이었다. 따라서 기술관은 정3품 당하관을 상한으로 한품서용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도 역관·의관·천문관·지관같은 상급 기술관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그 밖의 하급 기술관들은 그보다 낮은 정4품 이하부터 종6품까지의 참하관이 한품이었다. 간혹 역관·의관 등이 국가나 왕실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당상관 벼슬을 받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것은 특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기술관이 양반관직으로 진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2품 이상 관료의 첩자손이기는 하지만 사족 신분에서 도태당한 서얼들의 기술관 서용이 ≪경국대전≫규정에 의해 허용됨으로써 기술관직이 양반관직과 차별되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기술관직은 ≪경국대전≫에 의하면 모두 체아직으로 되어 있다. 따라 서 기술관은 정식 녹봉을 받지 못하고 다수의 관원이 돌아가며 가끔씩 체아록을 받는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개국 초에는 기술관이 科 田을 지급받았으나, 세조 때는 職田法으로 바뀌면서 체아직에는 직전을 지급 하지 않게끔 되어 기술관들은 직전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기술관은 참하직의 경우 한 등급 승진하는데 소요되는 근무기간이 양반 참하직과 같이 450일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상급서리인 녹사와 같은 514일이었다. 그리고 기술관은 文散階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조회 때 동반에 섰는데, 성종 이후에는 서반에 서게끔 되었다. 이는 유학을 正學으 로 여기는 사대부관료들이 기술관을 잡학 종사자라 하여 천시한 결과였다.

 결국 기술관에 대한 천시관념과 차별대우는 사족자제들로 하여금 기술학 입학을 기피하게 하였다. 이에 기술학이 침체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상급 지 배신분에서 도태된 부류인 2품 이상 관료의 첩자손 즉 서얼을 기술학 생도 로 받아들이는 방안과 기술관보다 하급신분인 교생과 향리 3정 1자 및 지방 의 의·역·율학생도를 選上·歲貢토록 하는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이들 사 족신분이 아닌 자가 기술관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리하여 15세기 말인 성종 13년(1482)에 기술관은 사족이 아니므로 사대부 또는 士類와 같은 줄에 설 수 없는 부류라는 인식이 팽배하게 되었다. 당시 사대부관료들은 왕이 역관 출신을 당상관으로 임명하려는 것에 대해 반대하면서 그 명분으로, 역관·의관은 사족과 같은 줄에 설 수 있는 신분이 아니므로 淸班에 발탁·등용할 수 없다는 점과 함께 사족은 문·무관에, 기술관은 기술직에, 그리고 농·공·상고는 농업·수공업·상업에만 종사해야지 각 각 주어진 직분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들었다. 이처럼 15세기 말경에 사족과 기술관이 신분적으로 같은 줄에 설 수 없는 구분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와 함께 기술관은 상급 지배신분층에서 도태되어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2품 이상 고관의 첩 소생 曾·玄孫에게 잡과 응시가 허용되어 16세기 중엽인 중종 38년(1543)에 편찬된 ≪大典後續錄≫에 의해 하나의 법규로 제정되었다.203)≪大典後續錄≫권 3, 禮典 諸科. 이러한 과정에서 사족자제들의 기술관 기피현상은 갈수록 현저해져 16세기 후반기 이후로는 사족 출신으로서 기술관이 되는 자가 거의 없게 되었던 것이다.204) 譯科入格者의 前歷에 나타나는 幼學의 비율이 중종 2년(1507)에는 63.2%를 차지하였으나, 그 후 중종 8년에는 50%, 중종 20년에는 35.3%, 명종 4년 (1549)에는 15.8%로 급격히 줄다가 선조 9년(1576) 즉 16세기 후반기 이후로는 역과입격자의 전력에 幼學이 보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상급기술관인 역관직도 16세기 이후 士族身分인 幼學의 기피대상이 되었다(이남희, <朝鮮中期 譯科入格者의 身分에 관한 硏究>,≪淸溪史學≫4, 1987).

 庶孽은 고려시대에는 婢妾 소생의 경우 賤者隨母法에 따라 차별받기는 했 지만 그 정도가 비교적 약했으며, 여말 선초에는 그 부친이 현관이거나 공신일 경우 부친의 蔭德으로 양반관직에 진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왕조 개창 이후 사대부관료들은 일부일처제를 강조하는 유교적인 가족관념에 따라 자신들의 분신인 서얼에 대해서도 차별대우하기 시작하였다.205) 서얼의 차별대우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였다.
李相佰, <庶孽禁錮始末>(≪東方學志≫1, 1954).
李泰鎭, <庶孽差待考-鮮初 妾子「限品叙用」制의 成立過程을 中心으로->(≪歷史學報≫27, 1965).
朴天圭, <朝鮮前期 庶孽의 社會的 地位>(≪史學硏究≫30, 1980).

 서얼은 15세기 초인 태종 때 庶孽差待法이 마련됨으로써 兩班顯職에 서 용될 수 없게 되었는데, 15세기 후반에 반포 시행된 ≪경국대전≫에 서얼자손을 禁錮한다는 규정이 16세기 중엽에 편찬된 ≪經國大典註解≫에 의해 자자손손토록 영원히 금고하는 것으로 규정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서얼과 그 자손들은 문과와 생원·진사시에도 응시할 수 없었다. 다만 이들은 자기 父祖의 관품의 고하에 따라 최고 정3품 당하관에서 최하 정8품까지를 한품으로 기술직이나 잡직에 서용될 수 있었다.

 서얼에 대한 이 같은 차별대우는 서얼로 하여금 부의 신분을 세습하지 못 하게 함으로써 서얼이 사족신분에서 도태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리하여 서얼과 그 자손들은 상급 지배신분층인 사족에도 끼지 못하고, 그렇다고 피지배계층인 양민도 아닌 중간적인 신분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요컨대 조선 초기 이래 사대부관료들이 신분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지배계층의 하부에 위치해 있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상급 지배신분층인 사족과는 구분되어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되고 있었다. 대체로 15세기 초·중엽에 향리와 중앙의 하급서리인 이전(書吏) 및 서얼이 먼저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되었다. 軍校 가운데 장교층도 고려시대에 향리층들이 겸하는 것이었다는 점206) 李成茂, <朝鮮初期의 鄕吏>(≪韓國史硏究≫5, 1970), 90쪽.
羅恪淳, <高麗鄕吏의 身分變化에 관한 硏究>(≪成均館大 博士學位論文≫, 1987), 30 쪽.
을 감안한다면 역시 이 때쯤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편입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어 15세기 말부터 16제기 초·중엽에는 기술관과 상급서리인 녹사가 각각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되었다.

 이와 같이 1세기가 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유교적 직업관 내지는 가족관 에 따라 지배계층 하부에 있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차례차례 하급 지배신 분층으로 격하시키고 우뚝 선 상급 지배신분층인 사족은 점차 배타적인 특권 신분층, 즉 양반신분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와 함께 이들은 종래 사족자제들이 많이 종했던 기술직이나 상급서리직인 녹사직에 종사하기를 기피하게 되었다. 사족이라도 기술관이나 녹사가 되면 門地가 낮아져 서 사족과 같은 줄에 설 수 없게 되어 다른 사족과 통혼하는 길은 물론 華·要·淸職으로 진출하는 길이 막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이미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된 여러 부류의 사람들도 양반신분은 못되더라도 피지배계층인 양민보다는 우월한 신분이라 는 그들의 현실적 지위를 대대로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특히 15세기까지는 사족자제들이 많이 종사했던 기술관 특히 상급 기술관에게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즉 한 기술관 가문에서 같은 계통의 기술관직을 世傳시키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명문 기술관 가문으로 등장하게 되며, 더욱이 같은 계통의 기술관 가문 또는 다른 계통의 기술관 가문과의 통혼을 통하여 그 세전성을 보다 강화시키는 동시에 명문 기술관 가문으로서의 지위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207) 이남희는 앞의 글에서 譯官家門의 경우 그러한 경향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특히 다른 기술관 가문과의 통혼과 같은 깊은 유대관계는 자기 가문에서 세전하는 기술관직이 아닌 상대방의 기술직종을 세습케 하는 경향도 나타나게 하였다.208) 李洪烈, <雜科試取에 대한 一考察>(≪白山學報≫3, 1967). 물론 기술관이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직종이라는 점도 기술관직 제전의 한 요인으로 작용되고 있었다.

 기술관직의 세습이 이루어지면서 기술관들의 同類屬性이 나타나게 되고, 이러한 동류 속성이 대체로 3세대 정도의 세습화를 거치면서 더욱 굳어져209)朴龍雲의<高麗 家産官僚制說과 貴族制說에 대한 檢討>(≪史叢≫21·22, 1977)에 의하면, 貴族家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적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지위에 오른 당사자로부터 3세대 정도「歷史의 堆積」이 이루어져야 家格을 인정받는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조선시대 中人家門도 대체로 그 정도의「歷史的 堆積」을 거치면서 형성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약 1세기쯤 뒤인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기술관들의 신분적 성격이 양반도 아니고 양민도 아닌 그 중간적 존재로서의 특이성을 뚜렷이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신분적 특이성 때문에 17세기부터 기술관들 이 중인(좁은 의미의 중인)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그런데 중인의 의미는 점차 확대되어 역시 조선 초기에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된 서얼·중앙서리·향리·토관·군교 등이 기술관과 함께 중인(넓은 의미의 중인)로 불리게 되었다. 이와 달리 평민신분으로서 校生이 된 자들 이 또한 중인(넓은 의미의 중인)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다.210) 앞의 주 2) 및 韓永愚, 앞의 글(1988). 평민 신분으로 교생이 된 자들은 대체로 양민 상층부의 사람들로서 이들은 교생이 되어 免 役의 혜택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技術學 生徒로 들어갔다가 기술관이 되기도 하고, 또 중앙의 하급서리인 書吏가 되기도 하여211) 李成茂, <朝鮮初期의 鄕校>(≪漢坡李相玉博士回甲紀念論文集≫, 1970).
―――, 앞의 글(1971)
李範稷, 앞의 글(1976).
申解淳, 앞의 글(1982).
넓은 의미의 중인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기에 스스로를 중인이라 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평민 출신의 교생들은 조선 후기에 중앙관아의 書吏나 지방관아의 吏校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그렇게 되지 못하면 本里의 約正·勸農이 되었다.212) 鄭玉子, 앞의 글(1986).
韓永愚, <조선후기 中人에 대하여-哲宗期 中人通淸運動 자료를 중심으로->(≪韓國學報≫45, 1986), 83∼84쪽.
이와 같이 중인의 의미가 평민 신분의 교생으로까지 확대되자 중인 상층부에 위치하고 있던 역관·의관 등의 상급기술관들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스스로 중인이라 불리는 것을 꺼려할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