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4. 중인
  • 4) 서얼

4) 서얼

 225) 庶孽에 관한 내용은 다음의 글을 주로 참고하였다.
李相佰, <庶孽禁錮始末>(≪東方學志≫1, 1954).
李泰鎭, <庶孽差待考>(≪歷史學報≫27, 1965).
朴天圭, <朝鮮前期 庶孽의 社會的 地位>(≪史學硏究≫30, 1980).
李鍾日, <16·17世紀의 庶孽疏通論議에 대하여>(≪東國史學≫19·20, 1986).
裵在弘, <朝鮮前期 妻妾分揀과 庶孽>(≪大丘史學≫41, 1991).
庶孽은 사족의 혈통을 받았으면서도 모계가 正妻가 아닌 첩이었기 때문에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된 존재였다. 庶는 양첩의 자손을, 孽 은 천첩의 자손을 뜻하는 것이다.226)≪明宗實錄≫권 15, 명종 8년 10월 무자.

 서얼차대가 관념적·법제적으로 강화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 다. 고려시대에 婢妾 소생의 신분 귀속이 賤者隨母法에 따르게 됨으로써 차 대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비교적 약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유학사상이 국가의 지도이념이 되고 사대부관료들에 의해 지배신분의 양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서얼에 대한 차대가 엄격해지게 되었다.

 다처제와 축첩제의 풍습은 여말 선초에도 여전하였다. 이러한 혼인풍습의 부조화는 재산상속과 관련하여 다처간 또는 처첩간에 爭嫡相訟을 자주 유발시킴으로써 사회문제화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재산상속권에서 제외된 첩이 상속재산을 차지하고자 처라고 주장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나 嫡·庶의 분간 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첩에 대한 제재가 불가피해지게 됨으로써 처·첩의 분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개국 초에 유교적인 사회윤리를 보급시키는 과정에서 당시의 重婚制的 혼인형태를「禮無二嫡」이라는 유교적 명분론에 맞는 혼인형태로 개편하기 위해서도 처·첩의 분간이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태종 14년(1414)에 妻妾分揀法이 제정되어 첩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게 되었다.

 이와 함께 적자와 서얼의 分限을 엄격히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첩이 천 신분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신분이 천한 첩의 소생은 당시의 천자수모법이 적용되는 풍습 하에서 천 이상의 신분이 될 수 없었 다. 이러한 천자수모의 풍습과 정신에다 조선 초기의 유교적 예교화운동의 진전과 함께 적서의 구분을 엄격히 하려는 새로운 사조가 복합됨으로써 서 얼이 차별대우를 받게 되고, 나아가서는 서얼금고 단행의 사상적인 기초가 되었다.

 한편 서얼은 여말 선초에는 부친이 양반관료 특히 현관이나 공신일 경우에 부친의 음덕으로 양반관직에 진출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조선 초기에 적·서 구분을 엄격히 하려는 사조 하에서 서얼의 관직 진출에 제한을 가하는 차대를 촉진시켰던 것이다. 또한 조선 초기에 지금까지의 천자 수모법의 제도가 천인의 증가를 초래하고 양인은 감소시키고 있으므로 국가의 인적 자원인 군역 대상자로서의 양인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태종 때 일시적이지만 奴婢從父法을 실시한 적이 있으며, 또 천자수모법의 제도하에서 양반관료의 비첩 소생은 천신분이 되게 마련이었지만 그들을 구제한다는 차원에서 身良役賤 계층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司宰監 水軍(뒤에는 補充軍)에 定屬시켰다가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조치로 서얼들의 관직 진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천자수모라는 관념에 사로잡혔던 사대부관료들은 첩의 자손에 대한 끊임없는 제재를 가하였다. 우선 태종 때 서얼은 顯職에 임용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얼과 그 자손이 양반관료가 되는 길을 막기 위하여 서얼금고의 규제를 가하였다. 즉 서얼과 그 자손이 생원·진사시와 문·무과에 응시하는 것을 불허하였는데, 이 규정이 ≪경국대전≫에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곧 이어 ≪경국대전≫에 註釋을 가하면서 서얼자손이 庶孽子子孫孫으로 확대되어 서얼의 자손들은 대대로 영원히 금고되게 하였다. 세조·성종 연간에 국왕의 특허를 받아 柳子光 등 일부 서얼들이 문·무과를 거쳐 관인이 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일시적 특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서얼에 대한 차별대우로 한품서용의 규제를 가하게 되는데, 먼 저 천첩의 자손에서부터 적용되기 시작하여 양첩의 자손에게도 적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기적인 차이가 큰 것은 아니었으며, 태종 때부터 ≪경국대전≫이 완성되기 전인 조선 초에 서얼의 한품서용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서얼은 제한된 품계의 범위 안에서 서용될 뿐이었다. 즉 문·무관2품 이상의 양첩 자손은 정3품 당하관, 천첩 자손은 정5품을 한품으로 서용하고, 3품 이하 6품 이상인 관리의 양첩 자손은 정4품, 천첩 자손은 정6품을 한품으로 서용하며, 7품 이하의 관리에서 관직이 없는 사족에 이르기까지는 양첩 자손은 정5품, 천첩 자손은 정7품을 한품으로 서용한다고 되어 있다.

 서얼에 대한 이 같은 조처는 사대부관료들이 지배자집단으로서의 입장에서 서얼의 양반관직으로의 진출을 막아 자신들의 지위와 권한을 고수하려는 점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동시에 사대부관료 자신들이 첩자손을 두고 있다는 자기 모순으로 인하여 첩자손에게도 제한적이나마 관직의 혜택을 부여하여 가부장으로서의 사족의 입장을 합리화하려는 점도 작용되어 취해진 것이었다.

 이와 같이 문·무과에 응시할 수는 없었지만 한품서용될 수 있었던 서얼들에게 허용된 관직 가운데 좋은 것이 기술관직이었는데, 그것도 고위관료 의 첩자손에게만 국한되었다. ≪경국대전≫규정에 의하면 2품 이상 관리의 첩 자손의 경우 각각의 재능에 따라 사역원·관상감·전의감·내수사·혜민 서·도화서·산학·율학 등의 기술관직에 임용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리 고 얼마후에는 2품 이상 관리의 첩 소생의 증손과 현손에게도 잡과 응시가 허용되었다.

 결국 서얼은 조선 초기 신분제의 재편성에 따른 지배신분층의 양분화 과정에서 상급 지배신분층인 사족의 자손이면서도 그의 모친이 양첩 또는 천첩이라는 이유로 천시되어 차별대우를 받게 됨으로써 상급 지배신분층인 사족신분층에 들지 못하고,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되었다. 이와 함께 서얼에 대한 가정에서의 차대도 심하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고 嫡出의 형제를 형 또는 아우라 부를 수도 없었다.

 한편 2품 이상 관리의 첩자손에 대한 기술관직 임용의 허용으로 조선 초 기 이래 그 자격을 갖춘 서얼로서 기술관이 된 자가 상당수 있게 되었다. 이 에 따라 조선 초기에 함께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된 서얼과 기술관은 서로 연계되는 점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 좁은 의미의 중인으로 불린 기술관은 서얼과 함께「中庶」로 병칭되기도 하였다.

 서얼은 조선시대에 적장자가 후손이 없고 衆子에게도 후손이 없을 경우 戶主가 되어 제사를 계승하는 家長權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의 사족들은 비록 자신의 혈육이지만 사족신분에 들지 못하는 서얼에게 가 장권을 넘겨주지 않고 동족 가운데서 양자를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서자가 가장권을 상속하게 되면 관록으로부터 멀어져 양반신분의 유지가 어렵게 되기 때문이었다.

 서얼에 대한 강한 천대의 풍조때문에 상당수의 서얼들은 깊은 산속에 은 둔하여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행실을 수련하며 자신의 내적 생명을 깊이 하 는 데 전념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학문에 정진한 후 사적으로 양반자제의 선생이 되어 후진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 전기에는 서얼 출신의 명사가 많이 나왔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適菴集≫·≪謏聞錄≫으로유명한 曺伸,≪稗官雜記≫의 저자이고≪攷事撮要≫의 편자인 魚叔權, 蓬莢 楊 士彦, 守菴 朴枝華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대부들의 축첩행위의 보편화로 서얼자손이 가속적으로 증가되자 16세기에 들어와서는 그들이 음양으로 疏通運動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16세기 중엽에 양첩 자손은 손자 때부터, 천첩 자손은 증손자 때부터 과거에 응시하도록 허용되었으나 소수 權臣家의 첩자가 허통된 것 이외에는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반대세력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곧 폐지되고 말았다. 그 후 16세기 말경에 서얼들이 納粟하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나, 납속액의 과다로 보편화되지 못하고 일부 부귀한 가문의 서얼들에 대한 특혜로 그치고 말았다. 따라서 서얼허통의 문제는 조선 후기로 넘겨져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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