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4. 중인
  • 5) 중앙서리

5) 중앙서리

 227) 中央胥吏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주로 참고하였다.
申解淳, 앞의 글(1974) 및 앞의 글(1982).
韓永愚, 앞의 글(1971)
중앙의 胥吏는 중앙의 각 관아에 소속되어 행정 말단의 실무, 즉 기록을 담당하거나 문서·전곡 등을 관장하는「刀筆之任」을 맡고 있던 상급서리인 錄事와 하급서리인 書吏를 지칭한다. 이러한 서리는 또한 吏胥라고 불리기 도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상급서리가 소속 관아에 따라서 錄事·知印·宣差·內直院別監·茶房別監 등으로 불리웠는데, 이를 총칭하여 成衆官이라 하였다. 그리고 하급서리도 마찬가지로 掾吏·典吏·書吏·令史·司吏 등으로 불리웠는데, 이를 총칭하여 吏典이라 하였다. 그러나 세조 때 상급서리와 하급서리의 명칭을 일원화하여 상급서리는 녹사, 하급서리는 서리라 하였으며, 이것이 ≪경국대전≫에서 동반 소속 京衙前으로 제도화되었다.

 ≪경국대전≫반포 시행 이후 상급서리인 녹사는 정원이 110인으로서 議政 府와 中樞府에 나뉘어 소속되어 있었으며, 동반 각 관아에는 의정부에서, 서 반 각 관아에는 중추부에서 각기 소속 녹사를 분송하게 되었다. 분송 대상 관아는 동반의 경우 의정부·육조, 서반의 경우 中樞府·都摠府·五衛·內 禁衛·巡將二所·兼司僕이었다. 그런데 녹사는 관아에 소속된 隨廳錄事와 문·무 고관에게 배속된 專屬錄事(陪錄事라고도 함)로 구분된다. 대체로 전속 녹사를 배속받은 문·무 고관은 의정부의 領議政·左右議政·左右■成·左 右參■, 육조의 判書·參判, 그리고 도총부의 都摠管·副摠管, 5위의 將·巡將이었다. 요컨대 상급서리 녹사는 종2품 이상의 관아와 당상관 이상의 문·무 고관 중에서도 실권이 있고 실무가 많은 일부 관아와 문·무 고관에게 만 배정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하급서리인 서리는 상급서리인 녹사와 달리 거의 모든 관아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그 수도 훨씬 많아서 1,300명 이상이었다. 하급 서리인 서리도 상급서리 녹사와 마찬가지로 관아에 소속된 隨廳書吏와 문·무 고관에게 배속된 전속서리(陪書吏라고도 함)가 있었다. 전속서리의 경우 상급의 전속녹사와는 달리 거의 모든 당상관에게 배속되었으며, 또한 大君·王子君·君 및 국왕의 사위인 尉에게도 배속되었다.

 조선시대에 상급서리 녹사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해야만 하였는데, 대체로 조선 초기에는 吏科取才, ≪경국대전≫완성에 즈음해서는 錄事取才를 통해서 선발되었다. 그 시험과목은 이과취재의 경우 개국 초에는 書·算·律이었던 것이 세종 때 家禮와 元·續六典 및 訓民正音이 추가되었으며, 녹사취재로 바뀐 뒤에는 더 늘어나서 講으로 5경 중의 하나와 4서 중의 하나 및 大明律·經國大典, 製述로 啓本·牒呈·關 중의 하나, 그리고 書算으로 楷書·諺文·行算의 8과목이었다.

 하급서리인 서리도 개국 초에는 상급서리와 함께 이과취재에 의해 선발되었으나, 얼마 뒤에 하급서리 선발시험이 분리되어 吏典取才에 의해서 선발 되었으며, ≪경국대전≫완성에 즈음해서는 書吏取才에 의해 선발되었다. 그 시험과목은 상급서리를 선발하는 이과취재보다 적어서 이전취재의 경우 서·산·훈민정음의 세 과목이었는데, 서리취재로 바뀐 뒤에는 서와 산 두 과목으로 줄었다.

 취재에 의해 선발된 녹사와 서리는 각 관아에서 말단 행정사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먼저 수청녹사와 수청서리는 공통적으로 공문서의 작성과 취급 및 관리, 등사, 공적인 연락 보고 등과 행정실무를 맡고 있었다. 그 이유는 상급서리 녹사가 배속되지 않은 대다수의 관아에는 하급서리인 서리만이 배속되어 행정실무를 담당해야 했고, 상급서리 녹사가 배속된 관아라 하더라 도 그 정원이 적어서 하급서리인 서리가 다수 배속되어 행정실무를 함께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앙의 거의 모든 관아에 소속되어 있었던 하급서리인 서리는 행 정실무 외에 전곡의 출납과 장부의 정리와 같은 경리사무를 맡기도 하였다.그리고 司正과 刑事의 업무를 관장하는 관아인 司憲府·義禁府·刑曹·漢城 府 등에 소속된 서리는 도성의 각종 범죄를 예방하는 동시에 각종 금령을 위반한 자를 체포하며, 각종 범죄행위를 수사하고 그 관련자를 체포 압송하는 등의 일도 맡고 있었다. 즉 오늘날 경찰의 소임과 유사한 직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전속녹사와 전속서리의 경우 주로 소속 고관의 명령을 받아 관아에 또는 관원에게 공문을 전달하거나 공사를 구두로 전달하는 등의 일을 맡았고, 또한 소속 고관에 가까이 있으면서 공적인 잡무도 보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속녹사나 전속서리는 오늘날의 비서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권이 있고 실무가 많은 문·무 고관의 경우 상급서리인 녹사와 하급서리인 서리가 함께 배속되어 있었으므로 전속 녹사가 고급비서라 한다면 전속서리는 하급비서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녹사와 서리는 이와 같이 국가의 중앙통치기구 안에서 공문서의 작성과 처리, 기록사무, 연락사무를 비롯하여 경리사무와 경찰업무 등을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중앙 관료기구의 모든 말단 행정사무는 이들의 손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따라서 중앙의 서리들은 지방의 향리들과 함께 조선왕조 통치기구의 행정실무를 실제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조선시대 중앙의 서리들은 행정 말단에서 10년 이상 공무를 수행하면서 도 고려시대와는 달리 국가로부터 일정한 녹봉이나 토지를 지급받지 못하였 다. 다만 상급서리인 녹사는 10여 년 재직하는 동안 소수의 체아직을 여러 사람이 서로 번갈아가면서 받았는데, 대체로 조선 초기의 경우 2년에 한 두 번, 많아야 세 번 정도 체아록을 받았을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경국대전≫의 반포 시행과 함께 더욱 나빠져서 거의 3년에 한번 정도 받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하급서리인 吏典(書吏)의 경우 상급서리인 녹사보다 그 대우가 훨씬 못하였다. 하급서리의 경우 개국 초에 의정부와 6조 및 사헌부·사간원·승정원 등 사무가 많고 번거로운 관아에 소속된 자들에 한하여 극히 소수의 체아직이 주어졌을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세종 이전에 혁파되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하급서리는 출발부터 사실상 거의 보수를 받지 못하고 국가에 봉사하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하급서리는 개국 초부터 일종의 역으 로 파악되어 1∼2결 이하의 토지를 소유하여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자 에게는 奉足 1戶가 지급되었으며, ≪경국대전≫의 반포 및 시행 이후에는 서 리 모두에게 동거 족친 중 2인을 다른 역에 충정하지 말게 함으로써 給保의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조선 중기 이후에는 실질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중앙의 서리들이 국가로부터 제대로 반대 급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지방출신자였던 녹사나 서리들은 10여 년 서울에서 복무하는 동안 자기 집에서 생활비를 마련해와야 했으므로 큰 고통을 당하였다. 체아록이라도 받을 수 있었으며, 그래도 지방에서 어느 정도의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집안의 출신이었던 상급서리 녹사의 경우는 비교적 덜했으나, 대부분 그렇지 못했던 하급서리의 경우 그 고통은 아주 심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하급서리의 경우 때때로 직무와 관련하여 관아의 공금이나 재물을 횡령하거나 뇌물을 요구하는 등의 부정을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다. 16세기 후반 이후 중앙 서리의 작폐가 극심해진 것도 근본적으로 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228) 申解淳, <朝鮮時代 胥吏의 作弊에 대하여>(≪千寬宇先生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1985).

 조선시대에 중앙의 서리가 되면 품계를 받아 승진하다가 거관하였는데, ≪경국대전≫규정에 의하면 상급서리인 녹사의 경우 實仕로 따져 514일을 근무하면 한 품계가 올라가고, 이렇게 해서 종6품까지 승진하여 복무한 뒤 거관하였다. 그러나 하급서리인 서리의 경우 실사 2,600일을 채우면 소속 관아의 등급에 따라 7품 또는 8품으로 거관하였다. 실사로 따지기 때문에 녹사 나 서리가 된 후 거관하기까지 소요되는 복무기간은 대체로 10년 안팎 정도 걸렸다.

 거관 후 상급서리와 하급서리 모두 조선 개국 초에는 중·하급의 동·서반 京職이나 수령에 진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 개국 초만 하더라도 서 리직은 고려시대처럼 양반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입사로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 말 이래로 士族이 상급서리가 되고, 또 향리 3정 1자나 양가자제가 하급서리가 되었다가 거관한 뒤 양반관직으로 진출하여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지배신분층을 상·하로 양분화시키는 정책을 취한 사 대부관료들에 의해 하급서리의 경우 이미 15세기 전반기에 양반관직으로의 진출이 봉쇄되고 단지 문·무출신자의 職事가 아닌 종9품의 驛丞·渡丞에만 진출할 수 있게 됨으로써 사실상 양반관직과의 연결이 단절되게 되었다. 즉 하급서리직이 입사로로서의 기능을 갖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조선 초기부터 사대부관료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아온 하급서리는 하급 지배 신분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하급서리가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되고 있지만, 서리가 되는 자 들은 대체로 중등정도의 지식을 갖추고 있는 교생 가운데 나이가 많고 재주와 실력이 떨어지는 자 또는 향리자제들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업무 처리에 필요한 정도의 기본지식인 문자와 산술을 깨우친 無役平民이 서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교생의 경우 이미 언급했듯이 16세기 이후 사족신분이 아닌 양민이나 향리자제(3정 1자)가 다수를 이루고 있었는데, 교생 가운데 하급서 리인 서리가 된 자는 대체로 이러한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양민의 경우 서 리가 됨으로써 하급 지배신분층으로의 신분 상승이 이루어지고, 향리자제의 경우 서리 거관을 통하여 그 자신은 물론 자손에게까지 鄕役이 면제되는 특혜를 받았다.

 한편 상급서리는 거관 후 양반관직으로의 진출이 15세기까지는 그다지 어 렵지 않았다. 따라서 상급서리가 되는 자들은 비록 가문이 한미하기는 하지 만 지방의 사족들이었다. 대체로 이들은 재능이 뛰어나지 못해서 과거에 자 신이 없었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녹사같은 상급서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 밖에 門蔭取才(≪경국대전≫반포 시행 후에는 蔭子弟取才)에 합격한 공신이나 고관의 자제를 비롯하여 생원·진사가 상급서리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하급서리 출신자인 吏典去官人이 상급서리가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에는 상급서리가 되는 자의 신분이 이전 거관인을 제 외하면 대체로 사족으로서 과거 응시자보다 결코 낮은 것이 아니었다. 이러 한 까닭에 조선 초기의 경우 상급서리의 사회신분적 지위는 유품관원·유음 자제·생원·진사 등의 일반 사류들과 거의 동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 이래「도필지임」을 담당하는 서리직이 유학을 전업으로 하는 사대부관료들에 의해 차별되고 천시되는 경향이 갈수록 두드러지게 된 데다 상급서리 녹사가 ≪경국대전≫에서 하급서리인 서리와 함께 京衙前으로 제도화되어 하급서리와 동류로 여겨지게 됨으로써 상급서리 녹사의 사회신 분적 지위가 15세기 말 이후 크게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법제 상으로 보장되어 있던 녹사거관자의 品官(수령) 진출이 사대부관료들에 의해 현실적으로 제약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품관에 서용되기를 기다리는 녹사거관자들이 계속적으로 밀리게 되었고, 따라서 녹사로 거관한 후 품관 으로 승격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게 되었다. 즉 녹사라는 상급서리직을 거 쳐서 품관으로 상승하는 통로가 크게 봉쇄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상급서리 녹사의 사회신분적 지위는 더욱 떨어져 16세기 초인 중종 때에는 문신들에 의해 녹사의 미천함이 일반 서리 즉 하급서리와 거의 다름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일반 사족들은 녹사를 더욱 천시하게 되었을 것이고, 또 조선 초기와는 달리 녹사가 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녹사 입사자의 신분도 떨어져 1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양반 벼슬길이 거의 막힌 부류인「遠方寒生」이 주로 녹사가 되었다. 결국 상급서리 녹사는 16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사족의 소업에서 벗어나게 됨으로써 상급 지배신분층에서 도태되어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전락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기술관 등과 함께 중인 신분층의 일원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에 직제상 경아전은 아니었지만, 內需司에 소속된 書題 20인도 넓게는 서리의 범주에 들어가는 존재였다.229) 內需司書題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였다.
申解淳, <朝鮮前期 內需司書題에 대한 小考>(≪溪村閔丙河敎授停年紀念史學論叢≫, 1988).

 내수사는 왕실 사유재산을 관장하는 內官的·私司的 성격을 가진 관아로서, 여기에는 경아전인 녹사나 서리 그 어느 것도 소속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서제들이 행정실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서제는 내수 사 소속 노비의 관리를 비롯하여 奴婢身貢의 수납과 上送, 내수사 長利의 수 납, 지방 소재 내수사전의 田租 수납과 상송 등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 초기부터「胥徒」로 인식되고 있었다.

 서도로 인식되었던 서제는 법제적으로 상급서리인 녹사와 비슷한 대우를 받아서 종6품이 한품이었고, 한 품계 올라가는 데 실사로 514일이 필요하였으며, 복무기간 중 토지나 녹봉과 같은 정식 반대급부를 받지 못하고 다만 1년 3개월만에 한 번 꼴로 체아직을 번갈아가며 받아 체아록을 받을 뿐이었다. 따라서 서제의 지위는 대체로 상급서리인 녹사와 비슷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서제도 설치 초기인 개국 초만 하더라도 생원이 입속하였고, 또 거관 후의 수령 진출이 가능하게 되어 있어서 그 사회신분적 지위가 일반 사류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에 내수사 서제가 서도로 여겨지게 된 데다 수령 진출에 제동이 걸리게 되고, 또한 15세기 중엽 무렵부터 서얼 출신이 다수 서제가 됨으로써 그 신분적 지위도 크게 떨어져 결국은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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