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5. 양인
  • 2) 양인의 신분적 특성
  • (1) 천인에 대한 양인의 상대적 신분 특성

가. 권리상의 특성

 조선 초기의 양인이 지닌 신분적 성격은 그 대립 신분인 천인과의 대비 속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우선 공권력에 의한 신체·생명의 보호라는 기본권에서부터 양자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양인은 자유인이며 공민으로서 기본권의 보장을 받은 반면 노비에 대한 공권력의 보호는 소유주가 자의적으로 체벌을 가하는 것을 제한한다는 소극적인 것에 그치고 있었다. 소유주가 잘못을 저지른 노비에게 체벌을 가하려 할 때 관아에 신고하여야 할 의무를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였다면 설사 노비가 벌을 받다 죽는 경우가 있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신고없이 체벌을 가하다 죽게 한 경우라도 일반 살인과 달리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는 데 그치고 있었던 것이다.268) 金錫亨, 앞의 책, 51∼55쪽.

 양인과 천인은 동일한 범죄에 대해서도 그 처벌을 달리 하였다. 노비가 양인을 구타하거나 살상한 경우는 같은 노비끼리의 경우보다 무겁게 처벌하고 양인이 노비를 구타하거나 살상한 경우에는 더 가볍게 처벌하게 한 것이 그것이다. 노비가 상관을 매도한 경우 다른 부류보다 한 등급 무거운 처벌을 가하게 되어 있었다.

 양인과 천인 사이의 권리상의 차이는 무엇보다 사환권의 유무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실제에 있어서는 양인 가운데에도 사환권이 박탈되거나 제한된 자가 적지 않았으나 양인 일반은 일단 사환권을 지닌 자로 상정되었 다. 과거응시의 기회나 공교육의 문호도 양인에게만 개방되어 있었다. “본 조정의 제도가 賤者가 공이 있으면 관작을 상으로 하지 않고 포와 비단으로 하는 것은 양천을 구분하고 존비를 엄히 하는 때문입니다”라 하고 있는 것처럼269)≪世宗實錄≫권 47, 세종 11년 2월 병술. 포상규정에서 양인에게만 관직을 주게 되어 있는 것이나 노비에게 특례적으로 관직을 줄 경우에도 항상 노비의 양인으로 신분을 일단 바꾼 다음에 수직한 것은 양인이 아니면 流品職(문무 양반직)을 수직할 수 없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유품직 이외의 잡직을 수여할 경우라도 양·천을 달리 취급함으로써 양자의 신분적 차이를 명확히 하려 하였다.270) 劉承源, <朝鮮初期의 雜職-掌樂院의 雜職->(≪震檀學報≫51, 1981).

 이처럼 양·천을 엄격히 구분한 것은 양인=신민의 자격보유자, 천인=신민의 자격상실자라는 관념에서 연유한 것임은 앞에서 말한 대로이다. 조선 초기에 아무런 관직을 갖지 않은 평민도 관인처럼 스스로를 일컬어「臣」이라 표현할 수 있었던 반면271)≪世祖實錄≫권 38, 세조 12년 3월 병신. 노비는 칭신할 수 없었던 것이라든지272) 典農寺奴로서 風水에 밝다 하여 면천되어 風水學에 종사하게 되었던 睦孝智가 상서에서 칭신하였을 때 세종이 “천인도 稱臣할 수 있는가”라 물었던 것(≪世宗實錄≫권 121, 세종 30년 8월 신유)이 그 좋은 예이다. 평민이 왕에게 직접 상언할 수 있었던 반면 노비는 조선 초기의 사회가 언로의 개방을 표방하는 유교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통해서 만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273) 앞에서 소개한 목효지는 풍수학이나 예조를 거치지 않고 직접 상언하여 사헌부 掌令 金孟獻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바 있었다(≪世宗實錄≫권 93, 세종 23년 9월 병신) . 그 명백한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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