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5. 양인
  • 3) 양인의 존재양태
  • (1) 농민

가. 양인 농민의 호칭

 조선 초기의 양인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상류층이나 중류층을 범칭하는 용어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283) 兩班·衣冠·士大夫·士類·士流 등과 같이 오직 관인을 나타내는 용어가 발달되어 있었을 뿐이다. 다만 士族은 양반 등의 용어에 비하여 좀더 넓게 사용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 역시 관인 당사자를 가리키는 데 주로 사용되었고 관인 이외의 자를 가리키는 경우에는 관인의 아주 가까운 혈족에 한하여 대부분「士族婦女」처럼 연칭으로 사용하였다. 하류층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그들이 영위하는 특수한 생업이나 그 들이 부담하는 특수한 신역으로 개별집단을 지칭하고 있었을 뿐이다. 다만 피지배층의 주축이 되는 일반 양인 농민을 가리키는 용어만은 일찍부터 발달되어 있었으니 그것이「평민」이었다.

 당시에는 평민과 동의어로 常人·平人 등이 함께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들 용어 모두는 보통을 나타내는「平」·「常」과 사람을 뜻하는 「人」·「民」이 한 데 어울려 만들어진 용어로서 「平常之人」 즉 문자 그대로 「보통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284) 세종대의 ■成事 許稠는 상인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常者 平常也 平常 之人”(≪世宗實錄≫권 49, 세종 12년 9월 을사). 다만 조선 초기에는 평민이 단연 많은 용례를 보이고 다음은 상인 그 다음은 평인의 순으로 나타나며 같은 뜻을 나타낼 수 있는 常民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서 보통사람이란 개인의 능력이나 인격을 표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를 기준으로 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사회적 위치가 보통사람과 다른 특별한 사람은 평민으로 지칭될 수 없었다. 예컨대 관인과 같이 높은 지위를 차지한 자나 노비처럼 엄격한 차대를 받는 자는 평민일 수 없다. 승려·무격·백정처럼 특수한 업무에 종사하는 자도 보통사람으로 간주되기 어렵다. 향리·역리·목자·염간 등과 같이 특이한 신역을 부담하는 자도 보통사람에서 제외되기 쉽다. 그리하여 이들이 평민과 구별되어 평민과 나란히 표기되고 있는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결국 가장 순수한 평민이라 할 수 있는 자는 조상 가운데 이렇다할 만한 현달한 자도 없고 그렇다고 뚜렷한 신분적인 흠도 가지지 않은 일반 양인 농민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양인 농민을 「양민」이라 부르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양민은 천인이 아닌 자의 일부, 즉 주로 평민에 해당하는 자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양민과 평민으로 번갈아 표기한 경우가 나타난다.285)≪世宗實錄≫권 10, 세종 2년 11월 신미. 그러나 평민과 양민은 다소 어의상의 차이가 있어 서로 다른 문맥에서 쓰이고 있었다. 즉 평민이 주로 사족과 같은 양인의 상층부 또는 향리·승려와 같은 특수부류를 의식하여 「보통사람」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였다면 양민은 노비와 대조하여 천인이 아닌 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많이 쓰였으며 유력자의 침탈로부터 국가가 보호해야 할 선량한 인민임을 강조할 때도 자주 나타난다.286)≪經國大典≫권 5, 刑典 元惡鄕吏條에 원악향리의 한 유형으로 명시된 “良民을 불법적으로 점유하여 은폐하고 부리는 자”는 그 좋은 예다. 그리고 천인(또는 승려)과 달리 군역을 부담하는 자임을 강조할 때에도 곧잘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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