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6. 천인
  • 1) 천인의 구성

1) 천인의 구성

 조선 초기의 천인으로는 일반적으로 奴婢가 대표적이지만, 통설에서는 노비와 함께 白丁·廣大·社堂·巫覡·娼妓·樂工 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신분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면 모두가 천인은 아니었다. 통설에서 이들 모두가 천인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이들이 사회적으로 천시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의 천인은 일반적으로 사료상 양인과 대비되어 나타나는데, 그것은 양인과 천인 사이의 신분적 장벽이 그만큼 높았던 것을 반영한 것이다. 통설에서 천인으로 간주되어 온 이들이 양인과 대비되는 천인신분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노비 외에 천인으로 간주되어 온 대표적인 존재인 白丁의 신분은 적어도 조선 초기의 사료를 통해서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양인으로 간주되고 있었 다. 백정은 고려시대 이래 북방계의 이민족 출신으로 간주되어 온 禾尺과 才人을 세종 5년(1423)에 토지에 정착시켜 일반 백성으로 동화시키기 위하여 이들에게 농토를 나누어 주고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면서 개칭한 것이었다. 이 때 병조에서 이들의 명칭을 백정으로 개칭할 것을 건의하면서 “화척과 재인은 본래 양인인데 그들의 직업이 천하고 호칭이 특수하여 백성들이 모두 異類와 같이 여겨 더불어 혼인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있다”332)≪世宗實錄≫권 22, 세종 5년 10월 을묘.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백정은 적어도 조선 초기에는 사회적으로「직업이 천하고 호 칭이 특수」하여 천시되고 있었을 따름이지 법제적인 신분은 천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살펴볼 바와 같이 이들은 양인의 역인 軍役에 편입되기도 하였으며, 양반이 입속하는 군종인 甲士에도 충원되었고, 군역을 지지 않은 백정들에게도 甲士取才가 허용되었다. 이와 함께 정부에서는 독서를 원하는 자에게는 향교에 입학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백정과 양인과의 통혼을 적극 장려하고 있었던 데에서도 이들의 신분이 결코 천인이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들은 도살업을 주로 하면서 피혁이나 유기 제조업을 겸하였고, 이러한 직업을 세습하면서 집단적으로 모여 특수 촌락을 이루고 살고 있어서 일반 양인과 동화되지 못하고 異類視되어 사회적으로 점차 천시되어 중기 이후 천인으로 굳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백정 중에도 물론 그 신분이 천인인 자들이 있었다. 세종 5년에 재인과 화척을 백정으로 개칭하여 양인과 동화시키려고 하면서, 그들 가운데 私處 奴婢에 대해서는 本主의 의견을 들어 처리하도록 하고 있는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이 경우는 백정의 신분이 천인이어서가 아니라 해당 백정 개인 의 신분이 노비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백정 중에는 노비도 있었으나 조 선 초기에 있어서 그들의 신분은 결코 법제적으로 천인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廣大는 倡優의 일종으로 고려시대에는 재인과 같은 계열이었다. 조선 초 기 사료에서는 이들도 화척과 같이 백정으로 개칭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화척만이 백정으로 불리웠고 재인은 조선 중기까지도 백정과 뚜렷이 구별되어 그대로 재인으로 불리고 있었다. 조선 초기 사료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재인 또한 화척과 마찬가지로 그 신분은 양인이었다.

 고려시대에 재인은 絃歌, 鼓吹와 雜戱 등을 演戱하는 자들이었는데,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창우와 잡희를 전업으로 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의 사료에서는 재인이 화척(또는 백정)과 구별되지 않고 함께 서술될 때에는 창 우·잡희·현가·고취와 함께 도살업에 종사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구별되어 백정은 도살업을, 재인은 창우와 잡희를 주로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재인과 백정이 명확히 구별되어 서술되는 조선 중기의 사료에서는 재인만이 優戱나 잡희를 연희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또 궁중 에서의 儺禮도 재인이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조선 중기까지도 우희나 잡희를 전업으로 하는 재인이 존재하고 있었음은 틀림없다 하겠다. 이들 재인이 조선 중기 이후 어느 시기에 광대로 불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어떻든 이들은 적어도 조선 초기에 있어서는 법제적인 신분이 천인은 아 니었으나, 그들의 직업이 사회적으로 천시되면서 점차 천인으로 간주되어 갔던 것 같다.

 社堂은 조선 초기에는 남자는 社長, 여자는 사당이라 불리웠으며, 그 기원은 불교를 믿는 신도들의 단체로서 圓覺寺 募緣으로 白蓮社를 모방하여 결사된 것이었는데, 생업이 없는 남녀가 사찰을 돌아다니다가 사당패가 되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賣技, 賣娼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333) 李能和,≪朝鮮解語花史≫(翰南書林, 1927), 142쪽.

 이들 사당패의 신분도 원래부터 천인은 아니었다. 이들 가운데는 “사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남녀가 같이 거처하면서 매음을 일삼으며, 심지어는 처자를 거느리고 마을에 섞여 살고 있으나 죄책이 미치지 않아 鄕吏·日守·正兵·船軍·公私賤隷들이 여기에 모여들어 저자를 이룬다”334)≪睿宗實錄≫권 5, 예종 원년 5월 임진.는 기록에 나타난 바와 같이 공사천, 즉 천인도 있었지만 정병·선군 등의 양인은 물론 향리까지 포함되어 있어, 사당이 전적으로 천인신분으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 었다. 정병·선군 등의 양인층이 사당패에 가담한 데 대해서는 예종 원년 (1469) 6월 공조판서 梁誠之가 사당을 금하자고 하면서 “군액의 감축, 田疇 의 황폐, 差役의 불균, 남녀의 혼음 등 양민들이 죄를 짓게 됨이 바로 이 때 문이다”335)≪睿宗實錄≫권 6, 예종 원년 6월 신사.라고 한 데서도 잘 나타난다. 이로써 보면 사당은 조선 초기에 있어 서는 독립된 신분집단이 아니라 잡다한 신분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사당이 점차 특정한 직업집단으로 화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직업이 천시되고 그들 자체까지 천인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당 역시 적어도 조선 초기에는 천인으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인식은 巫覡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즉 무격도 조선 초기에는 일종의 직업집단으로서 천인신분 집단은 아니었다. 세종 18년(1436)에 黃喜·崔允德·盧閑 등이 사헌부에서 추핵한 妖巫의 처리를 논의하면서 “良女는 관부에 소속시키고 私賤은 본주에게 주어 수령으로 하여금 수시로 규찰하여 肆行하지 못하게 하자”336)≪世宗實錄≫권 72, 세종 18년 5월 정축.고 한 말에 나타난 바와 같이 무격에는 양인과 천인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양인 무격에는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있었다. 성종 21년(1490)에 妖言으로 도성 안 사대부가의 부녀자들을 현혹시킨 金永山337)≪成宗實錄≫권 243, 성종 21년 8월 을유.은 충청도 보은에서 번상한 정병이었고, 같은 왕 20년에 魚有沼의 집에 사람의 두개골을 몰래 파묻어 재앙이 내릴 것을 빈 男巫 孟孫338)≪成宗實錄≫권 234, 성종 20년 11월 경진.도 양인이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조선 초기에 있어서 무격은 결코 그 자체로 천인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 중에는 공사천 즉 천인도 있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무격 그 자체로는 천인이 아니었으나 이들은 법제상으로 일반 양인과는 구분되어 취급되고 있었다. 즉 이들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巫籍에 올라 양인과 구별되었던 것이다. 무적은 3년마다 수정되어 작성되었는데, 그 사이 推刷·物故·加現 등으로 일어난 변동 사항을 기록하여 戶曹·濟用監 그리고 무격이 거주하는 각 도와 군현에 비치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무적에 올라있는 무격은 무세를 부담하였다. 이와 같이 무격은 신분상으로 천인은 아니었지만 일반 양인과 달리 무적에 올려져 구별되고 있었다.

 이들 무격은 세종 때에 淫祀를 금하면서 도성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되었는데 이 금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정부에서는 이들을 수시로 색출하여 도성 밖으로 축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무격의 자손들은 양인과 뚜렷이 구별되어 공사천·공상·향리의 자손과 함께 과전의 지급대상에서 제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출사도 금지되어 사회적으로 천시되어 갔다. 이렇게 하여 무격 도 그들의 직업이 천하였기 때문에 점차 천인시되어 조선 중기 이후에는 천 인으로 간주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다음 娼妓의 경우를 살펴보자. 창기란 기생을 지칭하는 용어였으나 일반 적으로 官妓를 지칭하였다. 기생에는 관기와 私妓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사료에 나타나는 창기는 예외없이 慣習都監(掌樂院)의 京妓와 외방 군현의 관기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서울의 女妓 즉 경기는 조선 초기에 관습도감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들 이 창기로 불리고 있었다. 관습도감은 세조 3년(1457)에 樂學과 통합되어 악 학도감으로 되었다. 다시 동왕 12년에 掌樂署에 병합되었으며, 장악서는 후에 掌樂院으로 개칭되었다. 이에 따라 관습도감에 소속되어 있던 창기도 장악원에 소속되었다. 경기의 신분을 살펴보면 이들은 ≪經國大典≫에 외방 官婢의 選上으로 충원하도록 되어 있어 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장악원의 창기로 선상되는 관비는 연소자이어야 했으며, 도성에 살고 있는 各司婢도 가능하였다.

 관비로서 선상되는 경기의 수는 세종 29년(1447)까지는 125명이었으나, 이 해에 蓮花臺 6명을 포함하여 100명으로 25명을 감액하였으나339)≪世宗實錄≫권 115, 세종 29년 3월 경진. ≪경국대전≫에서는 다시 증액되어 여기 150명과 연화대 10명 등 모두 16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에게는 2명의 봉족이 지급되었다.

 지방 각 고을의 여기들도 각관창기라 하여 창기로 불리고 있었는데 이를 줄여 흔히 관기라 불리고 있었다. 이들 외방 각 읍의 관기가 언제부터 설치되기 시작하였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미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방 각 고을 관기의 신분도 관비였다. 즉 이들은 해당 지방 군현의 관비 가운데서 뽑아서 정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과 양인과의 交 嫁 소생의 신분 귀속도 양인과 공사비와의 교가 소생과 같은 범주에서 결정되어 종친 緦麻 이상, 外姓 小功親 이상 및 대소 인원이 거느리고 사는 창기의 소생은 종량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340)≪經國大典≫권 5, 刑典, 賤妻妾子女.

 이렇게 볼 때 조선시대의 창기는 노비와 구별되는 별개의 천인 신분집단 이라기 보다는 노비의 변이형으로「공노비 중에서 직업이 창기인 자」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노비신분의 범주에 용해될 존재인 것이다.

 醫女의 신분적 성격도 창기와 비슷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이들도 창기와 마찬가지로 지방 각 고을의 관비 중에서 나이어린 사람을 선상하여 충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 의녀들이 지방 각 고을의 관비 가운데서 선상 되었던 것은 창기와 같지만 이들은 창기와 같이 서울에서 계속 근무한 것이 아니라 의녀로서의 재능과 기예를 익히게 되면 출신 고을로 돌아가 근무하도록 되어 있었다.

 의녀는 태종 6년(1406)에 처음 설치되었다. 부녀자들이 질병에 걸려도 수 치심 때문에 男醫들에게 환부를 드러내 보이지 않아 치료받지 못하고 죽음 에 이르는 일이 많아 부녀자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濟生院으로 하여금 나이어린 倉庫와 宮司의 비 수십 인을 선발하여 맥경과 침구의 기술을 가르치게 하였던 것이다.341)≪太宗實錄≫권 11, 태종 6년 3월 병오.

 의녀는 이것이 처음 설치된 태종 때에는 창고와 궁사의 비나 각사의 비 가운데서 선발되어 충원되었으나, 세종 이후에는 지방 군현의 官婢가 선상되 어 충원되었다. 지방 군현의 관비를 의녀로 선상시킨 것은 세종 5년에 충 청·경상·전라도의 계수관에서 10살 이상 15살 이하인 영리한 관비 2명씩을 제생원에 선상시켜 제생원의 의녀와 함께 의술을 가르치게 한 것이 시초였다.342)≪世宗實錄≫권 22, 세종 5년 12월 신해. 이들 지방에서 선상된 의녀는 의술을 제대로 익히면 출신 고을 로 돌려보냈다. 서울에는 의녀가 설치되어 있어 부녀자들이 이에 힘입은 바 가 컸으나, 지방에는 그렇지 못하여 부녀자들이 질병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의녀의 선상은 그 대상 지역이 하삼도에서 경기·강원·황해도에까지 확대되고 대상 군현도 계수관에서 일반 군현으로 점차 확대되어 문종 때에는 의녀들 대부분이 지방 각 고을에서 선상된 관비로 채워지기에 이르렀다.

 지방 각 고을의 관비가 의녀로 선상되어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의술을 제 대로 익히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아 의술을 제대로 익힌 의녀는 아 주 적었다. 이들의 어려움은 의서를 읽고 의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먼저 문 자를 익혀야 했는데 그러하지를 못했던 데에 있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관비가 의녀로 선상되기 전에 문자를 익히도록 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의녀는 설치 초기에는 창고와 궁사의 비나 각 사의 비로써 층원되었지만 본 궤도에 오른 후에는 지방 각 고을에서 선상된 관비로 대부분 층원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소생의 신분 귀속도 창기 소 생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종친 시마 이상, 외성 소공친 이상과 대소 인원이 거느리고 사는 의녀의 소생은 종량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의녀 역시 노비의 변이형으로「공노비 중에서 직업이 의녀인 자」를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도 노비신분의 범주에 포함된다 할 것이다.

 조선 초기의 樂工은 음악기관이 세조 3년(1457) 장악서로 통합되기 전에 는 典樂署·雅樂署·慣習都監에 각각 소속되어 있었다. 전악서의 악공은 향 악과 당악의 연주를 담당하였으며, 아악서의 악공은 아악의 연주를 담당하 였고, 관습도감에 소속된 악공은 여기의 반주 음악을 담당하여 敎坊工人이 라고도 불리웠다.343) 宋芳松,≪樂掌謄錄硏究≫(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0), 72쪽.
李惠求,≪韓國音樂論叢≫(秀文堂, 1976), 304∼306쪽.
그러나 이들의 신분은 소속 관사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전악서와 관습도감의 악공은 공천 즉 천인이 입속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아 악서의 악공은 양인이 입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에게는 잡직으로서 체 아직도 설정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음악 기예인이 양인과 천인을 불문하고 모두 악공이라고 불림에 따라 천인은 다투어 악공으로 투속하는 실정이었으나 양인들은 이를 기피하게 되었다. 이에 세종 30년(1448)에는 우선 양인만이 입속하는 아악서 악공들에게 주어지는 체아직 녹관의 명칭을 바꾸어 전악서 악공의 그것과 구별하였다.344)≪世宗實錄≫권 119, 세종 30년 2월 신유 또 세조 3년에는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전악서와 아악서가 장악서로, 관습도감과 악학이 악학도감으로 통폐합되었다. 이에 따라 양인으로 구성된 아악서의 악공과 천인으로 구성된 전악서의 악공이 한 관서에 소속됨으로써 양천이 혼효될 수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하여 악공도 그들의 신분에 따라 명칭상으로도 구별할 수 있도록 천인은 그대로 樂工으로 둔 채 양인을 악생으로 바꾸어 악생은 左坊에, 악공은 右坊에 소속시켰다.345)≪世祖實錄≫권 10, 세조 3년 11월 정해. 이때부터 악공은 장악서(장악원) 우방에 소속되어 속악을 연주하는 자들만을 지칭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편제는 ≪경국대전≫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장악원 우방에 소속되어 속악을 연주하는 악공은 공천으로만 충원하도록 되어 있어, 그들의 신분이 천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양인도 본인의 의사에 따라 입속할 수는 있었으나, 천인들로 구성된 악 공에 양인이 입속하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 초기의 악공의 신분은 천인이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창기나 의녀와 마찬가지로 악공이기 이전에 노비였기 때문에 노비와 구별되는 별개의 신분집단이라 할 수는 없다. 이들 역시 노비 가운데 서「직업이 악공인 노비」인 것이다.

 지금까지 통설에서 노비 이외의 천인신분으로 간주되고 있는 백정·광대·사당·무격·창기·의녀·악공의 신분관계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이들 집단은 한결같이 직업이 천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신분관계에 있어서는 모두 가 천인은 아니었다. 즉 이들 집단 가운데 백정·광대·사당·무격은 적어 도 조선 초기에 있어서는 법제적으로 천인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직업이 사회적으로 천시되면서 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까지 천시되기 시작하여 조선 중기 이후에는 천인화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창기·의 녀·악공은 법제적으로 천인인 노비만으로 충원되었기 때문에 천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은 각각 창기·의녀·악공이기 이전에 노비신분이었기 때문에 노비와 구별되는 별개의 천인신분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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