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6. 천인
  • 2) 노비의 존재양태
  • (2) 사노비의 존재양태

(2) 사노비의 존재양태

 사노비에게는 공노비와는 달리 그들을 직접 구속하여 통제하는 개인으로서의 주인이 있었다. 물론 공노비에게도 그들의 소유주체로서 국가기관이 있었지만 사노비의 소유주인 개인과는 그 노비에 대한 지배와 구속력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사노비의 소유주는 노비를 토지와 함께 주요 재산으로 간주하여 소유 지배하고 있었다.

 사노비는 그 존재양태가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었다. 사노비에는 率居奴婢 와 外居奴婢가 있고, 외거노비 가운데에는 주인의 전지를 경작하는 노비와 그렇지 않은 노비가 있었다. 주인의 전지를 경작하지 않는 노비는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전지를 경작하는 것이 보통이나 그 가운데는 자신의 전지 을 경작하는 자도 있었다.

 솔거노비는 자신의 독자적인 경리를 보유하지 못하고 주인집의 가족구성 의 최하층의 일원으로 포함되어 있으면서 그 생사여탈권이 주인의 임의에 맡겨져 있었다. 이들은 주로 주인집의 농업경영에 사역되는 노동력으로 노예 적인 존재로 규정될 수 있는 존재였다.

 외거노비 가운데 주인집의 토지를 경작하는 노비는 주인집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경리를 보유하고 노동과정에서 독립적인 경영을 행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주인집의 토지에 매여 있었고 토지경작의 대가인 地代를 수탈당하고 있는 농노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유형의 노비가 조선 초기의 노비 가운데 절대적으로 우세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노비는 농노적 존재로 규정될 수 있다.357) 金錫亨,≪朝鮮封建時代農民の階級構成≫(學習院東洋文化硏究所, 1960), 61∼75쪽.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은 사노비의 유형 구분에 대하여 최근에 그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358) 통설화되어 있는 조선시대 노비=농노설에 체계적으로 반론을 제기한 것으로 李榮薰, <古文書를 통해 본 朝鮮前期 奴婢의 經濟的 性格>(≪韓國史學≫9, 정신문화연구원, 1987)이 있다. 즉 고문서를 검토하여 통설화되어 있는 조선시대 노비=농노설에 체계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노비는 농노적 관계로 토지와 결합되지 못하였으며, 노비가족은 농노처럼 토지소유와 경영의 생산단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외거노비를 在地奴婢와 外方奴婢로 나누어 외방노비를 외거노비의 전형으로 규정하고 이들 대부분이 주인집의 토지와 비결합상태에 있었음이 일반적이었으며, 외방노비에 대한 주인의 수탈은 오로지 신공의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솔거노비는 주인집의 직접적 농업경영에 사역되는 예속적 노동력과 주인집의 소작지를 차경하는 소작농의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솔거노비와 외거노비의 구분의 지표를 지금까지와 같이 거주지에 있어서 노비의 주인집과의 결합 또는 분리의 여부가 아니라 토지의 소유와 경영의 제측면, 즉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위치나 그 역할의 차이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사노비를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하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솔 거노비를 자기의 농업경영을 갖느냐 못갖느냐에 따라 家內使喚奴婢와 率下 奴婢로 구분하려는 제안도 있다.359) 李鎬澈,≪朝鮮前期 農業經濟史≫(한길사, 1986), 452∼458쪽. 즉 가내 사환노비는 주인집에 완전히 예속되어 직영지의 경영에 신역을 직접 제공하는 노비이며, 솔하노비는 주인집의 울타리 안에 따로 거주하면서 자기의 독자적 경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인집의 농장경영에 부역노동으로 동원되는 노비로 이들이 주인집의 농장경영에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노비의 유형 구분을 둘러싸고 제기된 새로운 견해들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고 있으나, 종래의 솔거노비라는 용어가 단순히 주인집에 같이 산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신역을 제공한다거나 가내에서 사역된다 는 의미도 포함하여 사용되고 있고, 외거노비라는 용어 또한 주인집에서 독립해서 살면서 신공을 제공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을 명확히 하여 개념을 규정하여 사용한다면 외거노비와 솔거노비로 구분하는 종래의 견해는 그대로 유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솔거노비 중에는 자신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자도 있을 수 있고, 외거노비 중에도 또한 주인집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가 있을 수 있으나, 이러한 예외 는 어떠한 구분에 있어서도 다 있을 수 있다. 솔거노비와 외거노비의 구분 이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의사나 노비의 형편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예외는 항상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고 있다 할 것 이다.

 조선 초기의 사료에서 솔거노비와 외거노비의 용례를 찾아보면 대체로 위에서 언급한 의미를 포함하여 사용되고 있다. 세조 3년(1457) 양성지가 사족 의 솔거노비와 평민으로 부모와 동거하는 자 외에는 3정을 1호로 편성할 것 을 제안한 바 있는데,360)≪世祖實錄≫권 7, 세조 3년 3월 무인. 여기에서 사족의 솔거노비와 평민으로 부모와 동거하는 자가 같이 제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솔거노비는 사족과 동거하고 있는 노비임이 분명하다. 평민의 경우 동거에 해당하는 것이 노비에 있어서는 솔거로 표기되고 있는 것이다. 또 성종 24년(1493) 韓健이 그의 권세를 믿고 수령과 상응하여 그의 서울집에 솔거하고 있던 노비를 다른 사람이 바다에 제방을 쌓아 만든 전지에 옮겨 새로 이사온 백성이라고 모칭하여 이를 빼앗으려 한 일이 있는데,361)≪成宗實錄≫권 274, 성종 24년 2월 기유. 이 솔거노비는 한건이 서울집에 거느리고 살면서 사역하고 있는 노비였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솔거노비는 주인가에 동거하면서 사역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使喚家內」또는「家內使喚奴婢」로도 표현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에서도 이들이 주인집에 더불어 살면서 직접 주인에 의하여 사역되고 있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솔거노비는 일반적으로 주인집의 행랑에 살고 있었다. 성종 15년 형조판 서 魚世謙이 “소를 도살하는 자들이 사대부의 행랑에서 많이 나오니 사대부 가에 의심되는 곳이 있으면 이를 수색하자”고 하자 성종이 “행랑에 거주하는 노복의 행위를 주인이 반드시 알 수는 없으므로 노비의 범죄로 주인을 같이 죄줄 수는 없다”362)≪成宗實錄≫권 172, 성종 15년 11월 계묘.고 한 말에서 행랑에 노비들이 거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바로 솔거노비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솔거노비는 주인집에 동거하면서 주인의 가내에서 사역되는 노비였다.

 외거노비는 일반적으로 외거노비라고 불리우는 외에「異居奴婢」·「別戶私 賤」·「各居奴子」로도 표기되고 있었다. 이러한 표현에서 외거노비가 주인과 다른 지방에 살거나 호를 달리하여 따로 거주하고 있는 존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외거노비 가운데는 자기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세조 4년 (1458) 형조에서 “≪續六典≫戶典에 본주의 전지를 경작하던 노비가 죽으면 그 전지를 본주에게 돌려주며, 자기 전지인 경우 그에게 자식이 있으면 자 식에게 주고 자식이 없으면 본주에게 주게 되어 있으니 지금부터 사노비와 공사노비가 혼인한 경우에 그의 노비와 가산도 전지의 예에 따라 처리하고, 만약 본주가 자식이 있는 노비의 재산과 노비를 침탈하면 그 노비의 자손으로 하여금 관청에 호소할 수 있게 하자”363)≪世祖實錄≫권 11, 세조 4년 정월 기축. 이≪績六典≫의 규정은 ≪經國大典≫에 실려 법제화되었다(≪經國大典≫권 5, 刑典 公賤).고 하여 그대로 실시된 바 있었 다. 여기에서 외거노비 중에는 주인의 전지를 경작하는 노비가 많았지만 자기 자신의 전지를 경작하는 노비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재산을 소유한 노비는 외거노비였을 것이다. 그것은 솔거노비에 대하 여 그가 경작하던 본주의 전지를 사후에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법전에까지 규 정할 필요는 없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외거노비 가운데는 전지 외에 노비까지 소유한 노비도 있었다. 그것은 앞에서 인용한 기록에도 언급되어 있거니와 세종 10년(1428) 한성부에서 “노 비가 자식없이 죽은 후 그가 사역하던 노비는 본 주인이 사역하도록 하며 문권이 없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도록 되어 있으니, 지금부터는 家舍·資産도 노비의 예에 따라 決給하자”364)≪世宗實錄≫권 42, 세종 10년 11월 임술.고 하여 그대로 실시되고 있는 것에서도 노비 중의 일부는 가옥, 자산뿐만 아니라 노비까지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조선 초기에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국가에 2,000석 이 상의 곡식을 바치고 아들을 면천시킨 노비도 있었다.365)≪成宗實錄≫권 181, 성종 16년 7월 임신·권 182, 성종 16년 8월 무신. 이러한 유형의 노비는 극히 예외적인 존재이기는 하였지만 지주적인 토지경영을 하였을 것이다.

 이상의 여러 사실을 종합하면 조선 초기의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 로 나눌 수 있으며, 외거노비는 또 주인의 전지를 경작하는 노비와 자기 자 신의 전지 등의 재산을 소유하고 이를 경작하는 노비로 나뉘어져 있었다 할 것이다. 외거노비 가운데는 물론 자기 토지를 갖지 못하고 있으면서 주인의 토지가 아닌 제3자의 토지를 경작하던 노비도 많이 있었다.

 사노비는 말할 것도 없이 개인이 소유한 노비로서, 그 소유자는 대부분 양 반 사대부였으나 일반 양인은 물론이고 노비까지도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양반이라 해서 모두 노비의 소유자는 아니었고 양인이나 노비라 해서 모두 노비를 소유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노비의 소유자 는 양반 사족이 그 중심이었다.

 조선 초기에 노비 소유자의 중심이 양반사대부였던 것은 그 당시에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노비의 규모에서도 드러난다. 태종 7년(1407) 南陽君 洪吉旼은 貴顯鉅富로서 1,000여 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세종대의 安望之의 妻 許氏도 1,000여 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또 문종대의 柳漢도 부모의 노비를 合執한 것만 1,100여 명에 달했으며, 성종대에 永膺大君은 그의 신분이 왕자였기 때문이었겠지만 무려 만여 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듯이366) 周藤吉之, 앞의 글, 13쪽. 노비 소유의 주체는 주로 왕족을 비롯한 양반 사대부들이었다.

 이와 같이 노비의 소유 주체가 사족이었기 때문에 노비는 사족 양반들이 혼인할 때에 가풍의 높고 낮음을 나타내는 지표로 여길 정도가 되어 노비를 적게 소유한 사족들은 시집갈 딸이나 누이동생에게 소유하고 있는 노비를 모두 주어 출가시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세종 9년 고려 말에 승지를 지낸 林樸은 비 3명만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동생들과 의논하여 모두 출가할 누이동생에게 주어 시집보낸 일이 있었다.367)≪世宗實錄≫권 38, 세종 9년 12월 갑술, 이는 “노비가 없으면 누가 그녀에게 장가들려 하겠느냐” 하는 생각에서였다.

 조선 초기에 사노비를 포함한 전체 노비의 인구가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성종 15년(1484)에 추쇄하지 못한 공노비가 10여 만 명이나 되고, 공사천인 중에 도망하여 숨어 사는 자가 무려 100만 명에 이르고 있었는데,368)≪成宗實錄≫권 170, 성종 15년 9월 임인 이로 미루어 보아 공노비와 사노비를 합한 인구가 이 당시의 전체 인구를 340만 명으로 볼 때 대략 조선 초기의 전체 인구의 1/3정도에 육박했을 것으로 보인다.369) 周藤吉之도 이 당시 노비 인구를 전체 인구의 1/3정도로 추산하고 있다(周藤吉之, 앞의 글, 15쪽).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인구통계가 철저하지 못하여 누락된 호구가 많았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러한 노비의 인구 비율에는 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비 인구도 그만큼 누락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노비 인구 중에서도 사노비가 공노비에 비하여 월등히 많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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