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6. 천인
  • 3) 노비의 입역과 신공
  • (1) 공노비의 입역과 신공

(1) 공노비의 입역과 신공

 노비는 그들이 소속된 국가 기관에 따라 각사노비·내노비·관노비·역 노비·교노비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함은 전술한 바 있다. 이들 공노비는 그들이 소속된 국가기관에 그들의 노동력을 직접 제공하거나 신공을 납부하였다.

 공노비의 노동력 동원은 選上立役制로 운영되었다. 물론 공노비 모두가 선상 입역의 의무만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선상 입역하는 기간을 제외하고는 신공의 납부로 그들의 의무를 대신했다. 그러나 이들은 번차가 정해져 있어 언제라도 자기 차례가 되면 선상 입역하여야 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국가 기관에 대하여 노동력의 제공자로 존재하였다.

 공노비 중에서도 선상 입역의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은 각사노비였다. 각사 노비의 선상 입역제는 ≪경국대전≫에 “서울에 사는 노비는 2번으로 나누어 서로 교대로 입역하고, 외방에 거주하는 노비는 7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선 상한다”370)≪經國大典≫권 5, 刑典 公賤.고 되어 있어 서울에 살고 있는 노비의 입역과 외방에 살고 있는 노비의 선상으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었다. 선상 입역노비의 한 번의 근무기 간은 6개월이었다.

 서울에 살고 있는 노비의 입역 번차가 2번인데 비하여 외방에 살고 있는 노비의 선상 번차를 7번으로 나누고 또 한 번의 근무기간을 6개월로 정한 것은, 외방에 살고 있는 노비의 대부분이 농업을 생업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 에 선상으로 인한 이들의 생활기반이 파괴되지 않도록 배려하고 또 서울에 올라와 입역할 때 서울생활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선상 입역노비의 수는 세종 26년(1444)에 각 도에서 선상된 수만 1,100명 에 달했는데, 그 후 계속 증가하여 성종 3년에는 중앙 각사에 선상된 奴가 4,200여 명에 이르렀다.371)≪成宗實錄≫권 16, 성종 3년 3월 기미.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는 선상 입역노비는 闕 內差備 390명, 각사의 差備奴 2,416명, 根隨奴 1,480명 등 모두 4,286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들과는 별도로 종친과 공신에게는 丘史가 선상노로서 지급되었다.372)≪經國大典≫권 5, 刑典.

 이들이 물론 모두 외방에 살고 있는 노비의 선상으로만 충원된 것은 아니었다. 궐내차비는 모두 2번으로 나뉘어 입역하도록 되어 있어 서울에 살고 있는 노비로 충원되었고, 각사의 차비노와 근수노는 서울에 살고 있는 노비와 외방에 살고 있는 노비 가운데 선상하는 자가 입역하며, 선상노가 부족 한 경우 補充隊로 충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는 선상 입역노비가 모두 외방에 살고 있는 노비의 선상으로 충당된 것은 아니었지만, 각사에 역을 서고 있는 노비가 십중 팔구는 본래 외방에 거주하는 자였던 것을 감안하면,373)≪世宗實錄≫권 36, 세종 9년 6월 신미. 이들의 대부분이 외방에 살고 있는 노비 가운 데서 선상된 자들로 충원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상 입역노비의 의무는 양인의 군역과 마찬가지로 15세에서 시작하여 60세가 넘어야 면제되었다. 선상 입역노비의 임무는 각사의 사령으로서 잡역이나 관원의 수발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맡은 바 임무에 따라 차비노와 근수노로 나뉘어졌다. 차비노는 각사 외에 궐내에도 있었다. 궐내차비가 그것이다.

 闕內差備는 대궐 내에서 각종 잡역을 담당하는 노비였다. ≪경국대전≫에서 이들이 맡고 있는 직역을 살펴보면 飯監·別監 등 모두 16가지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별도로 노비가 분급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각사노비의 입역으로 운용되었다. 궐내차비에 각사노비가 입역하게 된 것은 세종 4년(1422) 귈내차비의 역을 담당하던 其人의 역이 혁파되면서부터였다.

 한 번에 입역하는 궐내차비는 세종 5년에는 300명에 이르고 있었는데,374)≪世宗實錄≫권 19, 세종 5년 2월 신유. ≪경국대전≫체제에서는 390명으로 늘어났다. 궐내차비는 2번으로 나누어 입역하게 되어 있어 각사노비 중에서도 서울에 살고 있는 노비가 입역하였다. 궐내차비에게는 잡직이기는 하지만 체아직이 주어지는 등 각사에 입역하는 노비에 비하여 우대되었기 때문에 각사노비들이 궐내차비로 투속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각사에서는 서울에 살고 있는 노비만으로는 입역할 노비가 부족하여 외방에 살고 있는 노비의 선상을 늘려야 했기 때문에 선상의 폐를 야기시키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각사에 입역하는 差備奴는 庫直·房直·城上 등의 임무를 맡았으며, 각사 관원의 공궤를 담당하여 점심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執饌奔走한 실정이었 다. 이와 같이 각사의 차비노는 사역처가 많아 성종 24년(1493) 禮賓寺의 경우 노비를 사역해야 할 곳이 41개소나 되어 부득이 3∼4명을 2∼3개소의 役處에 함께 배정하는 실정이었는데, 이에 따라 노비들이 무거운 역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는 자가 속출하여 그 해에만 15명에 이르고 있었다.375)≪成宗實錄≫권 277, 성종 24년 5월 경술. 이 밖에 공물을 수납하는 관사에 입역하는 차비노는 대납이나 방납에 참여하기 도 하였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각사의 차비노 정액이 관사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음 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차비노가 관사의 규모와 업무량에 따라 차등있게 지급된 결과였을 것이다. 차비노는 2번으로 나누어 입역하게 되어 있는데 서 울에 살고 있는 노비가 주로 담당하였다.

 根隨奴는 각사의 잡역을 담당하는 차비노와는 달리 종친이나 각사 소속의 관원에게 배당되어 사역되었다. 이들은 관원이 출입할 때에 수종하였으며, 관원이 지방에 출장갈 때에는 관원을 수행하여 수발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 들 중 궐내에 입직하는 대소 인원을 수종하는 근수노에게는 信符가 지급되었다.376) 池承鍾, <朝鮮 前期 公奴婢制度의 構造와 變化>(≪韓國學報≫32, 一志社, 1983), 60쪽. 근수노는 관원 개인에게 지급되었기 때문에 관원의 사노와 같이 취급되기도 하여 사역에 동원되는 일도 흔히 있었다.

 각사에 분급된 근수노는 소속 관원의 관품 및 인원수에 비례하여 지급되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근수노의 정액은 다음<표 1>에 나타난 바와 같이 문무관과 종친으로 나뉘어 관품에 따라 차등있게 규정되어 있다. 이렇듯 근수노의 정액이 관원의 관품 및 인원수에 비례하여 정해졌기 때문에 각사의 근수노 수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관사에 따라 관원의 관품과 그 수 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377)≪世宗實錄≫권 18, 세종 4년 10월 을묘.

관 품 종 친 문 무 관 관 품 종 친 문 무 관
1품
2품
3품 당상관
6
5
4
5
4
3
3품 당하관
4품
5품∼6품
3
2
1
2
1
1

<표 1>관원별 根隨奴 定額(≪經國大典≫에 의함)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는 근수노 정액은 근수노가 관원의 사노와 같이 사역되는 상황에서는 부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관사에 따라서는 차비노를 근수노로 사역시키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이들 근수노는 대부분 외방노의 선상으로 충원되고 있었는데, 이들은 관원이 濫率하고 또 차비노까지 근수노로 사역시킴에 따라 외방노비의 선상수가 가정되어 이것도 선상의 폐를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선상 입역제는 공노비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강제 징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항상 그 자체 내에는 과도한 노동력 수탈로 노비 가호의 재생산 기반이 붕괴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따라서 선상 입역제가 효율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노비 가호의 재생산 기반이 위협을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노동력 징발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었다. 이들에게 신공이나 잡역을 면제하고 2명의 봉족을 지급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필요에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만으로는 과도한 노동력 징발에 따르는 선상 입역노비 가호의 재생산 기반이 붕괴되는 위험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선상 입역노비는 봉족에게서 입역기간 중 면포 1필과 正布 1필씩만을 거둘 수 있을 뿐이어서, 이것만으로는 선상 입역기간의 경비에도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侍丁을 인정해 주거나, 출산 휴가를 지급하며, 부모 처자를 完聚시켜 서로 도우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시책이 그 대책으로 실시되었다.

 시정은 세종 14년(1432)에 처음 인정되었다. 이 때의 규정에는 10세 이하의 어린 자식을 거느리고 있는 홀아비와 중병에 걸린 노비의 외아들을 시정으로 인정하여 선상 입역을 면제해 주고, 80세 이상인 노비로 가호 내의 인정이 4명이 못되고 경작토지가 4결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復戶하여 생계의 안정을 기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378)≪世宗實錄≫권 58, 세종 14년 11월 정축. 이 규정은 그 후 ≪경국대전≫에는 소생 5명 이상이 貢役하는 자와 70세 이상으로 소생 3명 이상이 공역하는 자에게는 아들 1명을 시정으로 인정하고, 80세 이상인 자에게는 이에 1명을 더 인정해 주며, 90세 이상인 자는 아들 모두를 시정으로 인정하여 역을 면제하도록 되어 있었다.379)≪經國大典≫권 5, 刑典 公賤.

 출산 휴가는 세종 8년에 처음 실시되었다. 이 당시에는 婢가 입역 중에 출산하여도 7일 후에 바로 입역을 계속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로 말미암 아 갓 출산한 비가 입역하기 위해서 갓난애를 돌보지 못하여 어린애를 상 하게 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그 대책으로 지급되었다. 이것이 처음 실시된 세종 8년에는 출산한 비에게 100일의 휴가를 지급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같은 왕 12년에는 해산이 임박하여 입역에 어려움을 겪는 비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산후 100일 외에 산전 1개월도 입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다.380)≪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0월 병술·임진. 또 같은 왕 16년에는 출산한 비의 간호를 위하여 그녀의 남편이 公奴인 경우 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주어 부부가 서로 도울 수 있도록 하였다.381)≪世宗實錄≫권 64, 세종 16년 4월 계유. 이 출산한 비에 대한 휴가지급 규정은 ≪경국대전≫에서는 비에게는 산전 한달과 산후 50일 남편에게는 산후 15일로 단축되었다.382)≪經國大典≫권 5, 刑典 公賤.

 각사노비 중에는 부모형제나 처자가 서로 다른 관사에 소속되어 모두 일시에 선상 입역됨으로써 생계의 유지가 어렵게 된 자들이 있었는데, 정부에서는 이들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같은 관사에 소속시키거나 이들 중 일부의 선상 입역을 면제하여 생계를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조처에도 불구하고 선상 입역제는 이미 그 실시 초기부터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선상 입역제 자체 내의 모순과 운영과정에서의 관리의 농간, 노비의 冒避 때문이었다.

 선상 입역제와 모순은 외방노비를 서울로 올라오게 하여 입역시키는 선상 제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이 당시 각사에 입역하고 있는 奴는 십중팔구 외방에서 선상된 자들이어서 고향에서 처자와 함께 힘써 농사를 지어도 빚 을 질 수밖에 없는 형편에 놓여 있었다. 이들은 일단 선상에 뽑히게 되면 생업을 포기하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올라와 役使에 잠시도 쉴 틈이 없어서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외방에서 농업을 생업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었는데, 선상에 뽑히는 노는 그들 가호의 중심되는 노동력이었기 때문에 한 번의 선상기간인 6개월 동안만 집에서 떠나있게 되어도 폐농하여 생업을 잃게 될 정도로 농업 생산력의 유지를 크게 위협을 받고 있었다.383)≪世宗實錄≫권 30, 세종 7년 11월 임진.

 지방에서 올라와 입역하는 동안 연고가 없는 서울에서의 생활도 선상노에 게는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에게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2명 의 봉족을 지급한 것 외에는 따로 경제적인 반대급부가 없어서 선상기간 동안의 식량과 경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데다가 서울에 올라와서도 마땅한 거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정부에서는 외방에서 선상 된 노비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세종 5년(1423)에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외방노비의 선상을 금하고 서울에서 6∼7일 걸릴 정도 떨어진 비교적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노비로 부모형제와 함께 살면서 서로 도와줄 수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자 중에서 연소자를 선상하도 록 조처하였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모순은 選上代立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각사노비를 노비가 부족하거나 별도로 분급되어 있지 않은 관사나 직역에 옮겨 사역시키는 移役도 선상제 모순의 하나였다. 이역은 조선 초기부터 새 로운 노동력의 수요가 있을 때마다 수시로 행해졌는데, 이로 말미암아 선상 노비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역은 궐내차비·의녀·창기·악공을 비롯하 여 匠人·丘史·養蠶人·屯田耕作人·圓覺寺 照羅赤 등의 직역에서 주로 행해지고 있었다.

 각사노비가 다른 관사나 직역으로 이역된 실상을 성종 18년(1487) 長興庫 노비의 예를 들어 살펴보면, 115명의 노비 가운데 守僕·各色掌·別監 등 궐내차비로 10명, 구사로 43명, 장인·악공·잠실고직으로 43명, 照羅赤·蠶母·房子로 10명 등 모두 69명이 다른 관사나 직역으로 이역되고 있으며, 이 밖에 시정 6명, 도망 6명, 거지 10명이 또 있어 역을 담당할 수 있는 자들은 노 8∼9명, 비 10여 명에 불과한 실정이었다.384)≪成宗實錄≫권 199, 성종 18년 정월 갑자. 이러한 현상은 각 사노비가 이역되는 직역이 대체로 각사에 입역하는 것보다 비교적 쉬운 역이었으며, 궐내차비와 같은 경우에는 잡직이기는 하지만 관직까지 보장되어 각사노비들이 다투어 이러한 역에 투속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역은 정부의 필요에 의해서도 이루어졌으나, 고된 역을 피하여 노비들이 이러한 헐한 역에 적극적으로 투속함으로써 더욱 조장되었다.

 각사노비가 이역하거나 투속하는 직역이 서울에서 근무하는 역인 경우에 는 선상노를 더 뽑아올려 지급했으며, 지방에서 근무하는 역인 경우에는 이 들을 선상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데다가 봉족까지 각사노비로 지급했기 때문 에 각사에 선상해야 할 대상자는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각사 노비가 선상할 차례는 그만큼 더 빨리 돌아오게 되어 이것도 선상의 폐를 가중시켰다.

 외방노비의 선상제는 지금까지 살펴본 제도상의 모순뿐만 아니라 이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관리의 농간과 노비의 모피로 더욱 제대로 유지되기 힘들게 되었다. 관리의 농간은 선상노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뇌물을 받고 부유한 노비를 방면하고 가난한 노비를 선상시키는 방법으로 행해졌다. 이 에 따라 가난한 자들만이 선상되고 부유한 자는 빠지는 이른 바「貧者選上 富者免」의 현상이 초래되었다 관리의 농간은 주로 지방에서 선상노 선발의 실무를 맡고 있는 향리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의 대책으로 정부에서는 각도 관찰사의 주관 아래 差使員으로 하여금 노비의 빈부와 입역의 선후를 살펴 선상노를 선발하게 하여 향리의 농간을 막아보려 하였다.385)≪世宗實錄≫권 30, 세종 7년 11월 임진.

 그러나 이러한 조처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자만이 선상으로 뽑히고 부자는 빠지는 폐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선상노의 선발을 차사원이나 수령 이 직접하지 않고 여전히 향리에게 위임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계속되자 이번에는 정부에서 좀더 구체적인 개선책을 마련하였다. 중앙 각사 의 외방노비안에 올라 있는 노비의 이름 아래에 선상 여부와 정역인가 봉족 인가를 분간하여 표시하고 한 번도 선상하지 않은 자가 있는데도 앞서 선상 했던 자를 다시 정역으로 삼아 선상시키거나, 이전에 봉족이었던 자를 다시 봉족으로 삼는 일이 있을 때는 당해 각사에서 이를 자세히 조사하여 형조에 보고하고, 형조에서 다시 해당 군현에 공문을 보내 사실을 조사한 뒤 담당 色吏 및 수령과 차사원 등을 賦役不均律로 다스리도록 하였던 것이다.386)≪世宗實錄≫권 105, 세종 26년 윤 7월 정해. 그러나 이러한 개선책이 마련된 후에도 향리의 농간은 근절되지 않았다.

 부자는 다 선상에서 빠지고 가난한 노비만이 선상으로 뽑히는 폐단은 부유한 노비들이 서울에 살고 있는 입역노비의 봉족이 되거나, 각사에 입역하 는 것보다 부담이 가벼운 閑役이나 歇役에 투속하여 선상을 모피함으로써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역으로는 궐내차비·장인·악공 등이 있었다 함은 전술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가난한 자들만이 선상되었는데, 이들은 고역을 맡아 밤낮으로 관아에서 사역하느라 자신의 생업을 돌볼 여가가 없어 스스로 살아갈 길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각사노비를 사역하는 관사나 관원이 정액보다 많은 노비를 점유하는 濫占 도 선상제의 유지를 어렵게 만든 요인의 하나였다. 남점은 특히 각사의 提 調들의 근수노에서 심하여 근수노를 6∼7명에서부터 30∼40명까지 거느리 고 있는 실정이었다.387)≪世宗實錄≫권 3, 세종 원년 3월 무신·권 32, 세종 8년 5월 갑인.

 이러한 상황에서 가난한 노비만이 선상으로 뽑히게 되자, 이들 중의 일부 는 도망 유리하여 선상을 면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도망 유리하는 노비가 증가하면 남아있는 노비의 선상 부담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노비들이 선상으로 뽑히게 되면 자기 대신 다른 노동력을 고용하여 대신 역을 서게 하고 선상을 면하는 代立의 현상도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대립은 조선 초기 군역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었는데 노비에 있어서도 외방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자들 사이에 선상을 피하는 방법으로 널리 행해졌다.

 선상대립 현상이 나타난 것은 기본적으로는 선상제의 모순 때문이었으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선상 자체가 고역인 데다가 연고가 없는 서울생활의 어려움과 선상으로 초래되는 생활기반의 파괴를 우려한 노비들이 선상을 기피한데서 기인하였다.

 외방의 선상노는 상경하면서 불과 몇 말의 식량만을 짊어지고 올라오기 때문에 열흘만 지나면 식량이 떨어져 굶주림에 직면하였으며, 거처를 마련 할 길이 없어 관청 청사의 처마에 의지하여 겨우 비바람을 피하고 있었고, 침구도 없고 취사도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은 서울생활의 어 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선상노비들은 너도 나도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대립 시키고 있었다.

 또 이 당시에 농업을 생업으로 하고 있는 외방노비들은 농사철에 선상되 지 않으려고 閑遊人을 고용하여 대립시키고 있어서 왕과 신하 모두가 “선 상노가 다른 사람을 대립시키고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는 일은 온 나라에 예사로 있는 일”388)≪成宗實錄≫권 276, 성종 24년 4월 병오.로 인식하고 있을 정도였다.

 선상노의 대립이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 처음 논의된 것은 세종 18년(1436) 의 일이었다.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은 한 번의 선상기간인 6개월의 代立價가 15필이나 될 정도로 비싸서 대립가를 지불하고 나면 노비가 파산하게 되어 선상제 자체가 제대로 유지될 수 없다는 우려에서였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 는 선상노의 대립을 금하고 본인 자신이 직접 입역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선상대립이 선상제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부 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선상대립은 이후에 더욱 성행하여 “외방에 사는 각사 노 모두가 남을 고용하여 대립시키고 있다”389)≪端宗實錄≫권 12, 단종 2년 12월 기묘.할 정도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이와 같이 선상대립이 만연되어감에 따라 직접 입역할 때 드는 비용의 배가 넘는 대립가를 마련하느라 외방노비 중에는 가산을 모두 날리고 파산하는 자들이 속출하였다.

 이와 같이 선상대립 현상이 확산되어 선상노들이 대립가를 마련하기 위하 여 가산을 팔고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어 유망하는 사태가 속출하였으나 정 부에서는 선상대립을 전적으로 금할 수도 없었다. 다만 각사노비의 多寡가 같지 않고 苦歇이 균등하지 않은 데서 오는 노비의 모피행위를 막기 위하여 선상노의 수를 조정하여 균일하게 선상케 하는 소극적인 정책이 정부에서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그것은 선상대립이 선상제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금하면 반대로 差役을 피하여 도망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의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선 상대립이 확산되자 세조 4년(1458)에는 정부에서 이를 공식적으로 허용하기 에 이르렀다.390)≪世祖實錄≫권 14, 세조 4년 11월 무자.

 선상대립의 공인만으로 선상대립을 둘러싸고 나타난 문제점이 완전히 제 거된 것은 아니었다. 이 당시 선상대립은 대립가가 정해져 있지 않고 선상 노와 대신 역을 서는 사람과의 사이에 맡겨져 있어서 대립시키기를 원하는 선상노들이 불리한 위치에서 많은 대립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어 큰 피 해를 입고 있었다. 선상대립이 공인되기 전의 대립가는 세종 18년(1436)에는 한 번의 선상기간인 6개월에 면포 15필이었으며, 같은 왕 21년에는 한 달에 면포 3필에 이르고 있어 대체로 한 달에 2.5필 내지 3필 수준이었다. 이 정도 수준에 머물던 선상대립가는 선상대립이 공인된 후에 모리배의 농간으로 배 이상이 높아졌다. 이렇게 선상대립의 공인 후에 대립가가 높아지자 세조 4년(1458)에 정부에서는 선상노의 대립가를 한 달에 2필을 넘지 못하도록 公定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는 처벌하도록 했다.391)≪世祖實錄≫권 14, 세조 4년 11월 무자.

 그러나 국가에서 정한 선상대립가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그 피해 도 여전하여 각사 선상노의 대립가가 관사 역사의 고되고 쉬움에 따라 한 달에 9필 또는 7∼8필에 이르고 있었다. 선상노들이 이를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면 서울의 부호에게 빌려 충당하는데, 그 물주는 선상노의 고향에 내려 가 대가를 배나 징수하기 때문에 원근의 친척이 그 해독을 입어 생계가 막 연하게 되어 유망하는 자가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선상대립가를 공정한 후에도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성종 5년(1474)에는 선상대립 가를 선상노가 거주하는 군현에서 직접 거두어 소속 관사로 직송하여 지급하도록 하는 官收官給制를 실시하였다.392)≪成宗實錄≫권 38, 성종 5년 정월 임자.

 선상대립이 공인되고 대립가의 관수관급제가 실시된 뒤에는 관리들이 선 상대립가를 노려 직접 입역하려는 노비에게 대립을 강요하거나 선상노를 사사로이 돌려보내고 면포를 수취하는 폐단이 나타났다. 이러한 일은 주로 선 상노를 선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는 수령이 대립가를 강제로 거두어 각사에 올려보내 대립케 하거나, 남은 수의 선상노를 관장하는 형조의 관원이 대립 가를 받고 이들을 방면하는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남은 수의 선상노는 그 일부를 형조에 남겨 사령으로 부리고 나머지는 장례원으로 보내 각 처에 나뉘여 역을 지고 있는 奴에 궐액이 생겼을 때 충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들도 관수관급제 실시 후에는 한 달에 면포 2필씩만 내면 대립이 가능하 여 형조 관원들이 이들을 남점하여 대립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선상대립의 공인과 대립가의 관수관급제 실시 이후 수령이 선상노의 대립을 조장하고 형조 관원들이 선상대립가를 수취하는 폐단이 나타나 자, 성종 6년에 다시 선상대립을 금하고 다만 부득이한 사유가 있어 대립이 불가피한 경우에 한하여 본인이나 경주인이 형조에 신고한 뒤 대립을 허가하고 대립가도 역을 대신 서는 사람이 역을 마친 후에 이를 증명하는 牒文을 발급받아서 수취하도록 하였다.393)≪成宗實錄≫권 61, 성종 6년 11월 계유.

 이리하여 부득이한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선상대립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부득이한 사유가 있을 때 본인과 함께 경 주인도 형조에 신고하여 대립을 허가받을 수 있도록 한 예외 조항을 이용한 농간이 많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1개월 후에는 이것도 금하여 본인이 직접 형조에 신고한 경우에만 대립을 허가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부득이 한 사유가 있는데도 본인이 직접 신고하지 못할 때는 수령이 그 사실을 조사하여 첩문을 발급하고 대립가를 거두어 형조에 보내 대립시키도록 하였으며, 사적으로 대립할 경우에는 해당 선상노와 대립인 모두를 죄주고 대립가를 관에서 몰수하도록 하여 불법적인 대립을 철저히 금하였다.394)≪成宗實錄≫권 62, 성종 6년 12월 정해.

 선상대립은 부득이 한 사유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전면 금지되었으나, 이후에도 선상대립은 끊이지 않아 “각사의 선상노들이 직접 입역하지 않고대립가를 마련하여 보내면 사대부들이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395)≪成宗實錄≫권 239, 성종 21년 4월 임진.고 할 정도로 일반화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선상노 대립가의 族徵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이 무렵에 들어와 선상대립은 주로 관원의 근수노와 종친이나 공신에게 지급된 구사를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었으며, 이와 관련된 관원도 형조 관원 에 한정되지 않았다. 이들 근수노와 구사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외방의 선상노로서 관원이나 종친 또는 공신에게 지급된 자들이었기 때문에 쉽게 대립이 행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정부의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선상대립이 만연되어가자, 성종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정부의 대책도 선상대립의 전면적인 금지보다는 대립가의 남징을 막으려는 데 치중하였다. 이에 따라 선상대립은 더욱 성행하였으며, 이와 함께 대립인을 세우지 않고 대립가만을 받고 선상노를 방면 해 주는 일이 만연되어 갔다. 이렇듯 대역인을 세우지 않고 선상노를 대립 가만 받고 돌려보내는 것은 선상노의 입장에서는 면포만을 내는 것이 되어 후일 布納化의 단서가 되었다.

 한편, 공노비들은 선상 입역하는 기간을 제외하고는 신공을 바치도록 되 어 있었다. 신공 납부의 의무가 있는 노비는 내수사 노비와 각사노비 가운 데 외방에 살고 있는 노비였다. 서울에 살고 있는 노비는 이들이 당연히 입 역노비가 되었기 때문에 신공 납부의 의무에서 제외되었다. 신공 납부의 의 무 역시 선상 입역과 마찬가지로 15세에서 60세까지였으며, 60세가 넘어야 면제되었다. 이들은 선상 입역이 아니라도 雜故가 있으면 신공이 면제되었 다. 잡고에는 질병·侍定 등이 있었다.

 각사노비의 신공은 사섬시에서 관장하였다. 그러나 모든 공노비의 신공을 사섬시에서 관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수사 노비의 신공은 내 수사에서 관 장했으며, 각사노비 중에서도 尙衣院 노비와 養賢庫(成均館) 노비의 신공 가운데 면포는 각각 해당 관사에서 직접 수납하였다. 공노비 신공은 면포로 납부하는 元貢과 쌀 또는 楮貨로 납부하는 餘貢으로 되어 있었는데, 상의원과 성균관의 납공노비의 신공 가운데 원공인 면포만은 각기 본사에서 관장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들 관사가 다른 관사에 비하여 재력이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각사노비의 신공은 그들이 거주하는 군현의 수령이 매년 가을과 겨울철 안에 거두어 사섬시에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다.

 노비의 신공이 처음 정해진 것은 태종 7년(1407)으로 그 전 해에 사사노 비를 속공하고 이 해에 이들의 신공액을 정했던 것이다. 이에 의하면 壯奴 는 쌀로 平 3석을, 壯婢와 처없는 장노는 2석을, 남편없는 장비는 1석을, 노비끼리 결혼한 자는 五升布로 각 1필씩을 바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신공액은 그 후에 몇 차례 조정을 거쳐 세종 초에 베로 내는 원공과 저화로 내는 여공으로 구분하여 노는 원공으로 正布 1필과 여공으로 저화 2장을, 비는 원공으로 정포 1필과 여공으로 저화 1장씩을 바치게 하였다가, 같은 왕 7년에 원공은 그대로 두고 여공을 노는 錢 100문, 비는 50문을 바치도록 고쳤다.396)≪世宗實錄≫권 28, 세종 7년 6월 임자. 그 후 세종 28년(1446) 공법이 제정되어 시행되면서 노비 신공액도 크게 낮아졌으나, 세조 때에 들어와 면포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다시 증액되어 노는 면포 1필과 쌀 2말을, 비는 면포 1필과 쌀 1말씩 바치도록 고쳐진 뒤, ≪경국대전≫에서는 노는 면포 1필과 저화 20장을, 비는 면포 1필과 저화 10장을 바치도록 규정되었다. 이 당시는 저화 1장의 가치가 쌀 1되의 가치와 같았으므로 세조 때의 여공인 쌀의 가치와 ≪경국대전≫에서의 여공인 저화의 가치는 같았다.

 노비의 신공은 국가 재정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성종 16년(1484)의 경우 사섬시에서 거두어들인 노비 신공이 면포 72만 4천 5백여 필, 정포 18만여 필에 이르고 있었다.397)≪成宗實錄≫권 184, 성종 16년 10월 을유. 노비들은 이러한 신공 외에 그 운반비인 輸轉價를 부담하였는데, 그 비용이 본래의 신공보다 배나 무거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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