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6. 천인
  • 3) 노비의 입역과 신공
  • (2) 사노비의 입역과 신공

(2) 사노비의 입역과 신공

 공노비가 그들이 소속된 국가 기관에 선상 입역의 형태로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신공을 바치듯이 사노비도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신공을 바치고 있었다.

 사노비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뉘어지며, 외 거노비는 다시 농업경영 형태에 따라 주인이나 다른 사람의 전지를 경작하는 전호적인 노비와 자신의 전지를 경작하는 자작농 내지는 지주적 노비로 나뉘어진다. 조선 초기의 사노비는 공노비에 비하여 그 수가 월등히 많았으며, 사노비 중에서는 솔거노비보다 전호적인 외거노비가 월등히 많았다. 또한 많은 재산을 소유한 지주적인 노비도 있기는 하였지만 이러한 유형의 노비는 아주 적어 극히 이례적인 존재였다. 이들은 같은 사노비라 하더라도 그 들의 존재 양태와 농업경영 형태에 따라 역 부담의 형태와 내용이 달랐다.

 솔거노비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인집의 일원으로 주인집의 행랑에 거주하며 생계를 부양받고 있었다. 이들은 주인집의 종속 노동력으로 가내 에서 사역되고 있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사대부의 수족과 같았고 노는 농 경에, 비는 길쌈에 동원되었다.398)≪成宗實錄≫권 129, 성종 12년 5월 경자.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성종 24년(1493) 韓健이 그의 권세를 믿고 다른 사람이 바다를 막아 조성한 전지를 수령과 상응하여 그의 집에 솔거하고 있는 노비를 동원하여 빼앗은 것도 솔거노비가 농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永安道에서는 노비가 없어 雇工을 노비 대신 부리고 있었던 데서, 노비가 많은 지역에서는 노비가 고공과 같이 농사에 동원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노비가 없는 영안도에서 가내의 사역이나 농사짓는데 동원되는 고공과 같은 양상으로 사역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솔거노비였던 것이다.

 솔거노비는 이 밖에 세종 즉위년(1418) 順德侯 陳理의 妻 李氏가 “성은을 입어 노비를 하사받아 짐을 지고 물을 긷는 노고를 면하게 되었다”399)≪世宗實錄≫권 1, 세종 즉위년 9월 기유.고 한 말에 나타난 바와 같이 노는 나무짐을 지는 등 남자가 해야 할 가내의 잡 일을, 비는 물을 긷고 부엌일을 하는 등 여자가 해야 할 가내의 잡일을 하 였다. 앞에서 사례로 들었던 전 승지 林樸이 그가 소유하고 있던 비 3명을 모두 그의 누이동생에게 주어서 출가시킨 것도 그의 형제들은 모두 처가 있어 몸소 부엌일을 할 필요가 없었으나, 누이동생은 노비가 없으면 스스로 물을 긷고 절구질을 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밖에 중앙 각사 관원의 솔거노는 대립에 동원되기도 하였으며, 관원이 잘못하여 죄를 짓게 되는 경우 관원 대신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솔거노비는 주인집의 농업경영에 직접 사역되고 있었으며, 이 밖에 노는 주인의 수족이 되어 가사를 처리하거나 땔나무 를 하기도 하였고, 비는 길쌈·부엌일·물긷기 등의 가사를 처리하였다. 이 외에 주인의 婢妾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비하여 외거노비는 주인집에서 독립하여 살면서 주인집의 토지를 경작하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외거노비 가운데 주인집의 토지를 경작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음은 앞에서 보았듯이 “본주의 전지를 경작하는 노비가 죽은 후에는 그 전지를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한다”는 ≪경국대전≫의 규정을 통해 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외거노비가 주인의 토지를 경작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태종 5년 (1405)에 사사노비를 속공하고서 각 사원에 남겨놓은 노비 중 사원 근처에 거주하여 사원에서 직접 사역하는 노비를 제외하고 사원의 10리 밖에 거주하는 노비에 대해서는 각기 농사를 짓고 살아가게 하고서 그들이 경작한 땅에서 나온 소출의 일부를 신공과 함께 바치도록 한 바 있는데, 이들이 경작한 토지는 예전부터 사원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로 여기에서 외거노비가 소유주의 토지를 경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세종 28년(1446)에 여러 곳에 토지를 가지고 있던 응교 魚孝瞻이 노비를 시켜 이들 토지를 경작하고 있었던 데에서도 외거노비가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400)≪世宗實錄≫권 112, 세종 28년 6월 갑인. 이와 같이 조선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외거노비가 주인의 전지를 경작하고 있는 일이 많았다.

 외거노비가 경작하는 주인의 전지는 농장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많았 다. 조선 초기의 농장은 勳舊派의 등장 이후 고관 대신들에 의해 전국 각지 에 설치되고 있었다. 이들의 농장은 특히 삼남지방에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존재하고 있었다. 세조 원년(1455)과 그 이듬해, 그리고 예종 원년(1469)에 적몰된 錦城大君 瑜, 鄭悰, 成三問 부자, 朴彭年 부자, 尹令孫 등이 소유했던 농장만 하여도 경기도 18군현, 충청도 15군현, 전라도 7군현, 황해도 6군현에 걸쳐 1인당 8∼14지역에 걸쳐 산재해 있었다.401) 周藤吉之, <麗末鮮初に於ける農莊に就いて>(≪靑丘學叢≫17, 1934) 참조.

 농장은 외거노비와 전호에 의해 경작되었다. 세종 31년 사헌부의 상소에 “하삼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朝士의 농장과 노비가 반을 넘는다”402)≪世宗實錄≫권 124, 세종 31년 4월 계축.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조사의 농장과 노비가 같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양자가 결합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 농장이 노비에 의해 경작되었음은 노비를 많이 소유하여 農舍에 나누어 살게 한 黃喜 부자의 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세조 8년(1462) 牙山의 官屯田 24개처를 자신의 농장으로 만들었다 하여 사헌부에 의해 推訴된 좌찬성 黃守身이 “신이 만약 비옥한 땅을 얻어 농장을 설치했다면 서울에 올라오는 대로 즉시 노비를 모아 그 곳에 거주시켜 갈아먹게 했을 것이다”403)≪世祖實錄≫권 28, 세조 8년 4월 병술.라고 한 바 있는 데, 이것도 외거노비가 주인집의 농장을 경작하는 주요한 노동력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외거노비 중에는 직접 주인의 전지를 경작하지 않더라도 일정한 기간 주인집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도 있었다.

 외거노비는 주인집에 직접 사역되지 않는 대신 주인집에 신공을 납부해야 했다. 성종 2년(1471) 대사헌 韓致亨 등이 “무릇 私家의 노예는 사역은 고통스럽고 신공은 무겁다”404)≪成宗實錄≫권 10, 성종 2년 6월 기유.고 한 바 있다. 여기에서 솔거노비의 사역과 외거노비의 신공이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외거노비의 신공 부담도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사노비의 신공액도 공노비의 그것과 같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공 사노비의 신공은 매년 麤布 1∼2端에 불과하다” 거나 “무릇 公私賤隷의 일 년 신공은 면포 2필에 불과하다”는 등 위정자들이 공노비와 사노비의 신공 을 같은 수준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공액은 실제 양반 소유주들이 신공을 거두는 과정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과다하게 징수되는 일이 많았다. 성종 2년 崔致江은 그의 외거노비인 同金으로부터 신공뿐만 아니라 그의 우마와 가재까지 빼앗은 바 있으며,405)≪成宗實錄≫권 10, 성종 2년 6월 병진. 같은 왕 7년 忠州·陰竹·竹山의 경계에 있는 愁理山과 驪州의 剛金山 근처에는 戚里 權■의 노비들이 그들의 주인이 신공을 가혹하게 징수하였으므로 이를 채우려고 도적이 되어 남의 재물을 약탈하고 있었다.406)≪成宗實錄≫권 67, 성종 7년 4월 신축. 또 성종 10년 私奴 李山은 신공과 잡물을 과도하게 징수했다 하여 본주 李堣의 처 權氏를 고발하였다가 오히려 告尊長罪로 치죄된 일이 있었다.407)≪成宗實錄≫권 105, 성종 10년 6월 갑진·권 106, 성종 10년 7월 임오.

 노비들은 일반적으로 신공 납부를 기피하고 있었다. 성종 8년 咸陽 사람의 노비가 長興府에 살고 있었는데 그 주인인 함양 사람이 신공을 거두려고 아들과 함께 찾아갔다가 그 마을 사람들에게 구타를 당하여 팔이 부러진 일이 있었다.408)≪成宗實錄≫권 86, 성종 8년 10월 임술. 아마 이 함양 사람은 가세가 빈한하거나 권세가 없는 양반이 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비 신공을 효과적으로 거두기 위하여 노비주들은 친인척의 권세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성종 24년 예조판서 盧公弼은 그의 妾甥인 金波回의 외거노비가 態川에 살고 있었는데 그들로부터 신공을 효과적으로 거두려는 김파회의 부탁으로 薺浦僉使에게 노비집을 完護해 줄 것을 청탁한 일이 있었다.409)≪成宗實錄≫권 279, 성종 24년 6월 정묘.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는 외거노비도 소작료 외에 신공을 더 냈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태종 5년에 사사노비를 속공하면서 사원에 남겨놓은 노비에 대해서 사원에서 사역하는 노비 외에는 모두 농사를 지으며 살게 하고「土田所出」을 신공과 함께 바치도록 하였는데, 여기에서「토전소출」은 그들이 경작하고 있는 전지에서의 산물, 즉 소작료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원의 토지를 경작한 대가로 이것을 신공과 함께 납부하게 하였던 것이다. 성종 7년 충주·음죽·죽산의 경계에 있는 수리산과 여주 금강산에는 척리 권총의 노비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권총이 신공을 가혹하게 거두자 이 노비들이 이를 채우려고 도적이 되어 남의 재물을 겁략하고 있었다 함은 전술한 바 있다. 여주 금강산에는 권총의 親墓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들 외거노비의 일부도 권총의 전지를 경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권력 있는 양반들의 묘소 근처에는 그들의 전지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도 신공과 소작료를 같이 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외거노비는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지 않는 노비는 물론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들까지도 신공을 바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사노비에게는 원칙적으로 국역 부담이 없었으나, 세종 23년 (1441)에 雜色軍을 설치하면서 여기에 편입된 私賤에게 잡역을 면제해준 조 처에 나타난 바와 같이 잡역과 함께 때때로 군역이 부과되기도 했다.410)≪世宗實錄≫권 93, 세종 23년 6월 계유. 잡 역이나 군역을 부담하는 노비는 외거노비였다.

 조선 초기에 사노비는 특수군에 입속되기도 했다. 이들이 입속하는 군종 으로는 잡색군과 壯勇隊, 彎强隊 등이 있었다. 잡색군은 세종 23년에 향리, 驛子, 공사노복 및 향교생도로 편성되었는데 여기에 편입된 사노비는 외거 노비였다.411) 위와 같음.

 장용대는 세조 5년(1459)에 창설되었는데 여기에는 공사노비 가운데 무용 있는 자를 취재하여 입속시키고 체아직으로 上林園의 잡직을 주어 거관 후 공노비는 면역시키고 사노비는 나이가 비슷한 공노비를 주인에게 대신 지급하고 면역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만강대는 세조 8년에 여러 명목의 군사 중에서 120근 이상의 활시위를 당길 수 있는 자를 선발하여 편성되었는데 같은 왕 13년(1467)에 천인도 이에 입속시켜 근무성적이 우수한 자는 거관 후 종량될 수 있었다. 장용대와 만강대에 입속하고 있는 사노비도 잡색군의 예로 미루어 보아 대체로 외거노비였을 것으로 보인다. 장용대와 만강대에는 성종 원년(1470)에 이미 입속해 있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천인의 입속이 금지되었다.

 사노비 가운데 외지노비는 이 밖에도 양인, 공사천과 함께 공조 소속의 각종 工匠으로 충원되기도 하였다. 사노비 가운데 외거노비가 공장으로 충원된 것은 세종 7년부터였다. 공조에서 “본조 소속의 여러 장인들은 그 소임이 중요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그 수가 정해졌는데, 지금 그 정해진 액수 가운데 부족한 자가 많으니 부족한 인원을 공노비 및 주인과 호를 달리하여 따로 살고 있는 사노비 가운데 재주있는 자를 골라 채워 번차를 나누어 입역시키자”412)≪世宗實錄≫권 28, 세종 7년 4월 정묘.고 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그 대상이된 사노비는 외거노비였다. 그러나 사노비는 성종대에 들어와 공장의 입속 대상에서 제외되어 ≪경국대전≫에서는 사천의 입속이 불허되었다.

 이와 같이 사노비 중에는 잡역을 부담하고 군역이나 공장에 충원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사노비 중에서도 외거노비였다. 이것은 아마도 외거노비들은 독립된 가호를 이루고 살고 있어서 솔거노비보다는 자립성이 강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