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1. 가족제도
  • 3) 장례와 제사
  • (1) 법제로서의 상·제

(1) 법제로서의 상·제

 전술한 바와 같이 상장법은 한결같이≪주자가례≫에 의한 유교적 예법을 따르도록 하였다. 세종 24년(1442)에 외조모의 상에 상주노릇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承重長孫이고 외손은 상주노릇을 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451)≪世宗實錄≫권 97, 세종 24년 7월 무인. 한편 성종 5년(1474)에는 부모의 화장을 엄히 다스리도록 하고 위반자를 검거하지 못한 관리나 管領·里正은 물론 가까운 이웃까지도 논죄하도록 하였다.452)≪成宗實錄≫권 41, 성종 5년 4월 기묘. 또한 중종 11년(1516) 鄭光弼 등은 서인이나 천민들도 모두 3년상을 거행하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서인 중에서 役事를 피하려고 3년상을 치르기를 자청하는 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서인들이 모두 3년 상을 거행하도록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다만 진정으로 이를 행하려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만 허락하도록 하였다.453)≪中宗實錄≫권 26, 중종 11년 9월 갑진.

 이러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적어도 성종조까지는 백성들 중에 부모의 장례를 불교의 전통의식에 따라 화장하는 자가 적지 않았으며 상주가 될 수 있는 사람에서 외손을 제외시키려고 법제화를 시도할 정도로 외손봉사 또한 널리 행해졌던 것이다. 화장을 엄금하고 상주가 될 수 있는 자에서 외손을 제거하려고 하는 시도 자체도 당시 법령에 위배되는 외손봉사와 화장 등이 만연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 3년상의 시행에서는 서인이나 천민 에 대하여도 논의한 바가 많았지만 주로 사족에 대하여만 3년상의 시행이 강력히 요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가 개국한 태조 원년(1392)에 벌써 가묘를 세워 선조에 대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밖의 제사는 일체 금단하게 하였다.454)≪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9월 임인. 태조 6년(1397)에는 기일을 정하여 기일까지 사당을 세우게 하되 소위 구폐인 불교식 제사를 따르는 자는 헌사로 하여금 糾理하도록 하였다.455)≪太祖實錄≫권 11, 태조 6년 4월 정미. 이 때는≪經濟六典≫이 반포 된 해인데 여기에 보면 차자는 가묘 즉 사당을 세울 수 없게 하였다. 즉 적장주의를 적극 권장한 것이다.

 한편 태종 원년(1401)에는 대사헌 李至 등의 상소를 받아들여 사대부 집안에서 솔선수범하여 가묘를 세우게 하고 만일 수령이 적장자이면 신주를 받들고 임지로 부임케 하여≪주자가례≫에 따른 제사의식을 거행하도록 하였다.456)≪太宗實錄≫권 2, 태종 원년 12월 기미. 태종 16년(1416)에는 가묘 설치의 기한을 그 해로 잡으면 범법자가 많을 것이나 다음해 12월까지로 기한을 길게 잡을 것과 3품 이하로 집이 가난하고 터가 좁아 가묘를 세울 수 없는 자는≪경제6전≫에 의거하여 방 한 칸을 골라 제사지내게 하였다.457)≪太宗實錄≫권 11, 태종 16년 6월 정축.

 또한 세종 11년(1429)에는 전년의 詳定所와 예조의 가례제사에 관한 상소를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① 만일 장자와 장손이 잔약하고 용렬하여 남의 집에 고용되어 살고 있어 宗人이 상조하더라도 마침내 사당을 세울 수 없는 사람은 차자가 묘를 세울 수 없는≪경제6전≫의 예에 따라 正室 한 칸을 가려서 신주를 받들도록 한다.

② 장자와 장손이 사당을 세우게 되면 신주를 奉還한다.

③ 그 밖의 장자와 장손은 廢疾者라 하더라도 진실로 舍宅만 있으면 모두 사당을 세우게 한다.

④ 曾祖廟는 文公家禮의 大宗·小宗의 그림에 의거하면 증조의 장자와 장손은 모두 宗이 되어 사당을 짓고 신주를 세워 제사를 지내는 것이므로 그 밖의 증조의 衆曾孫은 그 집에 가서 執事와 더불어 물건으로 상조한다.

⑤ 그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은 문공가례에 의거하여 제사를 지낼 때에만 신주를 설치하므로 紙榜으로 표기했다가 제사를 마치면 이를 불사르고 조부와 아버지의 廟祭 또한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이상≪世宗實錄≫권 44, 세종 11년 4월 정유).

 세종 12년(1430)에는 判漢城府事가 금년이 5·6품들이 가묘를 세우는 연 한이라고 아뢰니 세종은 다만 가묘의 설립 여부만을 고찰하라고 하였다.458)≪世宗實錄≫권 49, 세종 12년 9월 계유. 다음해는 대사헌이 가묘 설치의 연한을 계축년(1433)으로 하면 가묘를 설치하지 못하여 죄를 범하는 자가 많아질 것이므로 그 시한을 무오년(1438)으로 연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상언하자 국왕이 또다시 기한을 늦출 수 없다고 하였다.459)≪世宗實錄≫권 54. 세종 13년 12월 계유. 또한 세종 14년(1432)에는 차소 人吏 중에서 가묘제사를 하지 않는 자는 갑인년(1434) 정월부터 조사하여 처벌케 하였다.460)≪世宗實錄≫권 55, 세종 14년 2월 신묘.

 한편 성종 16년(1485)에 반포된 ≪경국대전≫예전 봉사조에서는 적장자가 제사를 지내되 적장자에게 후사가 없으면 衆子가 봉사하고 중자에게 아들이 없으면 다시 첩의 아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규정하였다.

 이렇게 볼 때 조선 초기의 법제적 측면에서의 상·제에 관한 규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불교식 상·제에서 유교식 상·제로 바꾸었다.

 둘째, 유교식 상·제 가운데에도 꼭≪주자가례≫의 내용만을 고집하였다.

 셋째, 반드시 가묘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넷째, 반드시 장자가 제사를 봉사하도록 하였다.

 다섯째, 장기간에 걸쳐 여러 차례 끈질기게 상·장이나 제사의 개혁을 추구하고 법제화하고자 하였다.

 여섯째, 상제가 변혁된 것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에 의한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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