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1. 가족제도
  • 3) 장례와 제사
  • (2) 조선 초기 상·제의 실제

(2) 조선 초기 상·제의 실제

 앞에서는 주로 조선 초기의 상·제에 관한 법적 규정에 관하여 살펴보았는데 다음에서는 실제로 조선 초기에 상·제가 어떻게 행해지고 있었는가 하는 측면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초기에 수차례에 걸쳐 여러 번 끈질기게 유교식 상·제의 법제화를 추구하였다는 것 자체는 당시에 불교식을 위주로 하는 비유교적인 상·제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실제의 상·제의 형태는 법제적 상·제 와는 상위하다는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고려시대에는 100일상이 일반의 풍습이고≪주자가례≫에 있는 3년상의 제 사가 행해지지 않았는데 이러한 사정은 다음의 태조 7년(1398)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즉 “묵은 습관에 따라서 겨우 100일만 하면 吉服을 입고 白笠으로 朝路에 분주히 돌아다니면서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461)≪太祖實錄≫권 15, 태조 7년 2월 무인.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정종 원년(1399)에도 “3년상은 천하에 공통의 상인데 겨우 100일만에 길복을 입고 음주와 육식을 하여 남녀가 혼인한다”462)≪定宗實錄≫권 1, 정종 원년 2월 경진. 고 하였으며, 태종 3년(1403)의 기록 역시 “부녀자는 前朝의 弊習에 따라 모두 100일을 한계로 삼아 상복을 벗는다”463)≪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4월 경술.고 하였다. 또한 태종 4년의 기록에서도 “사대부 집안에서 자신과 혼인을 주관하는 자가 衰絰 중에 있더라도 혼인을 허락하거나 成婚하는 경우가 있다”464)≪太宗實錄≫권 8, 태종 4년 8월 기축.고 지적하였다.

 개국한지 40년이 경과한 세종 14년(1432)의 기록을 보면 불교식으로 상을 치르는 자가 사대부 10명 중 6·7명에 달하고 유교식으로 상을 치르는 자는 겨우 3∼4명에 불과한데 불교식으로 治喪을 하는 자는 제를 올리고 불사를 찾는다고 적고 있다.465)≪世宗實錄≫권 55,세종 14년 3월 갑자.

 심지어 16세기의 중종 때까지도 사대부들이 상·제를≪주자가례≫대로 거 행하지 않아 哭踊하는 수나 음식절차, 期功의 복제가 모두 실시되지 않는데 도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 실정이었다.466)≪中宗實錄≫권 26,중종 11년 11월 계미.

 이렇게 볼 때 조선 초기에는≪주자가례≫에 의한 유교식 상·제가 강요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따르는 자가 비록 사대부계급이라 하더라도 10명 중 3∼4명에 불과한 실정이었으며 대다수는 3년상과 유교식 상·제 절차를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불교식 상·제를 따르는 경우가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상장제에 대하여 알아보았는데 다음에는 실제의 제사가 어떻게 거행되고 있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를 위하여 먼저≪주자가례≫에 의한 가묘의 설립이 어느 정도로 널리 시행되고 있었는가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국 첫해부터 가묘제사를 법제화하고자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5년이 경과한 태조 6년에도 “사대부의 가묘제도가 이미 명령된 바 뚜렷한데도 전적으로 불교를 숭상하고 귀신에 아첨하여 가묘를 세워 제사를 받들지 아니한다”467)≪太祖實錄≫권 11, 태조 6년 4월 정미.고 하였다. 또한 태종 원년(1401)에는 “가묘설치의 명령이 내린지 이미 여러 해가 경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현혹되어 가묘를 세우지 않을 뿐 아니라 가묘제사를 즐겨 행하는 자가 없고 이단의 邪說 즉 불교에 굳어져서 이를 깨뜨릴 방법이 없으며 가묘를 설치하는 방법조차 모르고 있다”468)≪太宗實錄≫권 2, 태종 원년 12월 기미.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에 대하여 태종 6년의 기록에 “지금 가묘를 설치한 집은 100집에 한 두 집도 없고, 나라의 명령에 따르지 아니하고도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고 있다”469)≪太宗實錄≫권 11, 태종 6년 6월 정축.고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당시의 실제를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세종 13년에는 국법으로≪주자가례≫를 따라 위로는 경·대부로부터 아래로는 서인들에 이르기까지 가묘를 세워 제사를 지낼 것을 규정하였으나 사람들이 불교에 감염된지 오래되어 유식자도 재를 올리는 풍속을 혁파하지 못하였고 조상의 기일에도 僧齋라 부르는 재를 행하고 승려에게 밥을 대접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가묘의 제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하였다.470)≪世宗實錄≫권 54, 세종 13년 12월 정사. 또한 다음해인 세종 14년(1432)에도 대소 人吏 중에 가묘를 세우지 않은 자가 대단히 많았다고 하였다.471)≪世宗實錄≫권 26, 세종 14년 2월 신묘.

 이와 같이 조선 초기에는 국법에 따라 경·대부로부터 서인들에 이르기까지 주자가례식의 가묘를 세워 제사하는 유교식의 제사절차를 따르도록 강요하였으나 가묘를 세워 제사를 지내는 자가 100집에 한 두 집도 안될 정도로 유식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래의 불교식 제사인 재를 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가묘를 설치하고 유교식으로 제사를 거행하기 위하여는 그 제사의 주재자를 장남·장손으로 이어지는 적장계열의 혈손에 국한하여 제사가 상속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들과 딸이 제사를 분할하게 윤회봉사하고 아들이 없더라도 딸이 있으면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나 외손으로 하여금 자신의 제사를 담당하게 하는 조선 초기의 사회적 현실 속에서 유교식 가묘설립과 가묘제사는 시행될 수 없었던 것이다.

 16세기인 중종조와 명종조에 들어와서도 아들이 없는 사대부가 가묘를 설립하지 않고 딸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중국과 달리 종법이 없어 장남의 처라고 할지라도 남편이 죽고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이지 않고 직접 자신이 제사를 주재하였는데도 당시 사람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기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472)≪中宗實綠≫권 26, 중종 11년 10월 기사.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정부에서는 상·장제는 물론 조상의 제사까지 도 일관하여≪주자가례≫에 의거하여 유교식 상·제를 확립하고자 지속적으 로 법제화함과 동시에 불교적 상·제의 규제를 시도하였지만 실제의 유교적 상제는 당시 조선 초기사회에서는 거의 수용되지 못하였으며 여러 기록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오히려 고려에서 전래된 불사에 의한 불교식 상·제가 널리 시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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