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1. 가족제도
  • 5) 종법제도와 친족
  • (1) 조선 초기의 종법제도

(1) 조선 초기의 종법제도

 宗法이란 宗子의 법을 의미하며 이 때 宗이란 종족의 제사를 공동으로 하 는 신분의 사람이며 여기에는 大宗과 小宗의 구별이 있다. 한편 宗族이란 同 姓同祖 즉 동종의 남계 혈연집단을 가리킨다. 대종은 한 종족에 오직 하나 만 있을 뿐이고 百世에 이르더라도 변함이 없는데 반하여 소종은 대종의 지파로서 특정인을 중심으로 하여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개념으로 5복제의 상복관계와 표리관계에 있다. 그리하여 고조부에서 4세를 한정하는「繼高祖小宗」, 증조를 중심으로 한「繼曾祖小宗」, 조부를 중심으로 하는「繼祖父小宗」, 부를 중심으로 한「繼父小宗」등 4가지 소종으로 구분된다.

 이상의 종·종족·대종·소종의 존재는 ①가계·제사·상속등에서 자신→ 부→조부→증조부→고조부 또는 자신→아들→손자→증손→현손의 부계 직계 자손이나 부계의 직계조상만을 강조하고 ②부계친 조상 위주의 제사와 상복 제도만이 중요시되고 ③입양에서는 반드시 동종의 지자를 昭穆의 순서에 맞 쳐 입양할 것이 요구되며 ④상속에 있어 사위나 외손 등이 아들이나 친손자에 비해 차등적 위치에서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한국의 친족조직에서 부계 혈연자만의 조직이나 집단을 나타내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바로「씨족」이다. 이 씨족은 종법제의 바탕 위에 형성된 부계 혈연집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씨족의 용어 이외에도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門中·宗中·宗族·宗契와 族中·門黨·門·同宗契 등의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씨족의 형성시기를 고찰하기 위하여는 먼저 한국사회의 씨족의 기초적 성격을 명확히 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의 씨족은 ① 부계의 공동조상의 제사를 위하여 조직된 집단이며 ② 구체적으로는 4대조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손자·증손·현손의 집단이며, 4대손의 입장에서 보면 형제·사촌·6촌·8촌·백부·숙부·당숙·재당숙·증조부·재종조부·종증조부의 집단인데 사위와 외손은 제외된다. ③ 아들과 딸이 모두 없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설사 딸이 있더라도 아들이 없으면 아들과 항렬이 같은 동성동본의 자를 입양하여 혈족집단의 순수성을 보장하는데, 이 입양이야말로 씨족의 성원을 충원시키는 機制이다. ④ 동성의 양자로 하여금 제사를 담당하게 한다.

 대체로 이와 같은 특성이 한국의 씨족 내지는 종족의 기초적인 성격이라 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한국사회에 부계 혈연자의 집단 즉 종법제도를 통한 씨족집단의 형성이 과연 조선 초기사회에 존재할 수 있었는가 살펴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씨족이 존재하였다고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씨족의 기초적 의의를 생각해 볼 때 우리 나라의 씨족의 형성은 조선 초기가 아닌 후기에 와서야 가능하였던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혼인 거주규칙과 그로 인 한 가족유형의 측면, 상속제도와 양자제도의 관점, 상·제제도나 족보에 수록한 자손의 종류 등의 관점에서 보아 조선 초기사회에는 씨족집단이 결코 형성되었을 리가 없다. 즉,

 ① 서류부가혼과 가족유형의 관점에서 조선 초기에는 씨족 혹은 종법제도가 존재할 수 없다. 출가한 딸과 사위,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낳은 외손이 오랫동안 함께 거주하면서 생환을 하게 되는「양변적 방계가족」의 형태에서는 이들을 제쳐 놓고 따로 사는 아들과 친손만의 집단을 형성할 수 없는 것이다.

 ② 종법제도가 존재하려면 재산의 상속대상을 종족 즉 아들과 친손에만 한정함으로써 그들만의 집단인 씨족의 결속과 유지를 위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 장남우대·딸차별의 상속형태를 취하여야 하는데, 조선 초기사회에서는 자녀 균분상속의 형태를 취하였으므로 씨족이나 종법제가 자리잡을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③ 시체를 매장하고≪주자가례≫에 따른 유교식 가묘제사를 지냄으로써 형성되고 결속되는 씨족집단은 불교식 화장제도를 실시하고 제사를 아들과 딸 이 함께 윤회하거나 분할하여 지내도록 하는 사회여건 속에서는 형성되지 않는다.

 ④ 씨족집단은 남아출산과 입양을 통한 성원의 끊임없는 충원과정이 이루어져야만 존재하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때의 입양대상자의 선 정은 혈족집단의 순수성을 보장하고 위계를 확립하기 위해 동종지자를 소목 의 원리에 따라 입양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초기 사회에서는 양자제도가 존재하지 않고 아들이 없으면 딸과 외손, 혹은 심지 어 누이의 외손에까지 자신의 제사를 부탁하는 사회적 관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충원과정이 결여된 씨족집단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⑤ 족보의 관점에서도 씨족은 존재할 수 없었다. 씨족의 성원임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로써 부계 혈연자손과 공통조상과의 계보관계 및 그들 자손 상호간 의 친소관계를 밝히는 기능을 족보가 담당하는 조선 후기사회의「씨족보」와는 달리 조선 초기사회의 족보는 친손과 외손의 차별이 없는「자손보」적 성격만을 갖고 있다. 이리하여 족보에 수록된 자손의 종류도 친손은 물론 외손·외손의 외손·외손의 외손의 외손 등이 무한정 수록되고 있다. 따라서 족보에 기재된 사람들이 씨족을 구성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초기의 족보에 기재되는 자녀의 순위가 인륜의 질서를 존중하 여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고 다만 연령순서에 입각하여 작성하는 출생순 위 방식을 취하고 있는 점은 후기의 족보가 본종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아들을 연령에 관계없이 딸보다 먼저 기재하는「선남후녀」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출생순위 방식으로 족보를 기재하는 시기에는 본종의 중요성이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는 씨족집단은 물론 종법제도 또한 결코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 초기사회에 종법제의 씨족집단이 존재하지 못했다는 점은≪조선왕조실록≫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① 詳定所에서 啓文을 올려 말하기를‘외조부모와 처부모의 服이 모두 소공에 불과하여 편치 않으니 1개월의 복을 청합니다’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우리의 풍속이 중국과 달라 親迎의 예를 거행하지 않으니 혹은 외가에서 길러지고 혹은 처부의 집에서 장성하여 은의가 매우 돈독하다’라고 하였다(≪世宗實錄≫권 48, 세종 12년 7월 경오).

② 우리 나라의 풍속은 처가에서 자라니 처부모 보기를 오히려 자기 부모처럼 하고 처부모 또한 그 사위보기를 오히려 자기 아들처럼 한다(≪成宗實錄≫권 206, 성종 18년 8월 계유).

③ 우리 나라의 풍속에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니 이성 친족의 은의의 분별이 동성과 차이가 없다. 할아버지가 계시면 종형제들이 한집에서 길러지고 증조부가 계시면 재종형제들이 한집에서 길러지니 어려서부터 장성하기까지 서로를 일컬어 형제라 하고 서로를 일컬어 祖孫이라 하니 그 은애가 어찌 동성의 친족과 다르리오(≪成宗實錄≫권 10, 싱종 2년 5월 임진).

④ 무릇 자손에게 유서를 남기거나 훈계하는 글을 남기는 것, 혹은 노비와 전택을 나누는 것은 모두 한집을 다스리는 것이다. 만일 아들과 딸이 있는 사람에게 또 繼姓子孫이 있고 외손이 있으면, 그 뜻이 어찌 아들과 딸을 구별하고 외손과 계성자손과 구별하겠는가. 조부모·부모의 마음으로 이를 보면 곧 처음에는 내외의 구별이 없고 그리하여 자녀에게 균등한 것이다(≪成宗實錄≫권 228, 성종 20년 5월 계미).

⑤ 우리 동방의 典章文物은 모두 중국을 본받았으나 오직 혼인의 예만은 옛 풍속을 숭상하여 양으로서 음을 따르니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서 아들을 낳아 손에 이르고 외가에서 자라게 되니 사람들이 本宗의 중함을 모르더라(≪太宗實錄≫권 27, 태종 14년 정월 기묘).

⑥ 우리 나라의 풍속에는 大小宗制度가 없다(≪世宗實錄≫권 41, 세종 10년 9월 계해).

⑦ 오늘날 세상 풍속에 비록 아들이 없더라도 외손이 있으면 남의 아들을 빌리는 사람이 없다(≪世宗實錄≫권 97, 세종 24년 8월 신축).

 위의 사료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는 친영의 예를 거행하지 않고 사위와 외손이 처가나 외가에서 자라나며(사료 ①∼③,⑤) 처가를 자기집으로 삼고 처부모를 자신의 부모처럼 섬기고(사료 ②) 처부모 또한 사위를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사료 ②). 또 부모를 임종할 때에 유서를 남기거나 아들과 딸, 친손(繼姓之孫)과 외손에 재산을 상속할 때에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사료 ④) 제사도 아들이 없어도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나 외손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니(사료 ③,⑦) 조선 초기에는 대소종의 제도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사료 ⑥).

 이와 같이 사위와 외손이 장기간 장인·장모와 생활을 하고 아들이 따로 나가 있는「서류부가」의 사회에서는 사위와 외손을 배제하고 아들과 친손만 의 집단을 형성할 수 없으며 외조부의 품 안에서 장성한 외손의 입장에서도 길러준 외조부를 무시하고 자신의 친조부만을 중시하는 부계계보의 존중관념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조선 초기사회에서는≪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 명백히 지적하고 있듯이 종법제와 씨족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