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1. 가족제도
  • 5) 종법제도와 친족
  • (2) 조선 초기 친족구성

(2) 조선 초기 친족구성

 앞에서 우리는 조선 초기사회의 종법제 및 씨족제도의 존재가 불가능하였음을 여러 근거를 들어 살펴보았다. 다음에는 관점을 바꾸어 그렇다면 당시 의 친족집단은 어떤 성격의 사람들로 구성되고 있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자.

 조선 초기의 친족구성을 파악하기 위하여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실제로 사용되던 친족용어를 분석함으로써 효과적인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일상생활에 관한 기록이 희소하므로 조선 중기인 17세 기 초의 자료를 통해 조선 초기의 친족구성의 일단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 초기와 17세기 중엽까지의 조선 중기사회는 가족제도의 여러 측면에서 거의 동일한 특성을 나타내고 있음으로 두 시기의 친족구성의 모습도 거의 동일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초까지는 남편과 처가 동등한 위치에 서서 남편의 부계친·이성 친(모계친)이나 처쪽의 부계친이나 이성친을 모두「族」이라는 용어로 지칭한 듯하다. 예컨대 조선시대의 입양기록인≪繼後膽錄≫475)≪繼後謄錄≫은 광해군 10년(1618)부터 철종 14년(1863)까지 약 245년간 예조에 입양을 신청하여 허락받은 입양자에 관한 법제 기록이다.중 최초의 기록인 1618 년의 입양기록에는 모두 51건의 입양사실이 기록되고 있는데 혈족이건 인 척이건 또는 동성친족이든 이성친족이든 간에 구별하지 않고 이들 모두를「족」이라는 용어로 파악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혈연관계나 인척관계의 여부에 구별없이 모두「족」이라는 용어로 이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이「족」이라는 용어는 조선 후기에는 다만 부계 친족, 즉 同姓者 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그 사용법이 달라졌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친족과 조선 후기의 친족 중「족」의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범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1627년≪계후등록≫의 입양기록에는「족」이라는 용어 대신「兩邊門族」·「兩邊族親」이라는 친족용어가 등장하고 있다. 이 때 사용되는「족친」 과「문족」의 용어도 이미 살펴본「족」과 마찬가지로 혈연친(즉 부계친·모계친)과 인척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 나타나는「족」이나「諸族」은「문족」과 함께 동성 자 즉 부계친만을 의미한다. 18세기 이후에는 입양할 때 논의의 대상자가 부 계 친족으로 한정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입양을 협의하는 대상자로서의「제족」이나「문족」이 부계친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변화하였음이 명백하다.

 이상의 고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족」·「문족」·「족친」의 용어로 포괄되는 친족원의 범위에는 부계친과 모계친은 물론 인척(처계친)도 포함되는 특성을 보인다. 조선 초기의 친족 혹은 친족집단은 바로 이러한 부계가 아닌 친족원과 처계친까지도 포함하며 조전 후기의 부계혈연자들만의 집단 을 의미하는「문족」이나「족」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476)논리전개의 편의상 때에 따라서는 동일한 자료가 각각 婚姻規則과 宗法制度, 養子制度와 宗法制度, 家族類型과 宗法制度에 인용되었음을 부기하여 둔다.

 조선왕조는 왕조교체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방안으로 새로운 통치이념인 유교적 이상에 따른 국가의 건설을 추구하였다. 그 목적의 일환으로 특히 강조된 것이 바로 유교적 가족질서이고 이것을 조선사회의 제반 가족제 도에서 관철시키려는 노력이 행해졌다.

 유교적 가족질서로의 재편성 작업은 당시까지도 강력하게 남아 있었던 불교이념 기반을 둔 전통적인 가족제도에 의하여 많은 장애를 경험하게 되었다. 예컨대 불교적 이념에 따라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초기까지도 喪葬制에 있어 시신을 화장하고 불사에서 僧齋를 올리는 제사관행이 널리 시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억불숭유의 정책에 의해 불교의식에 따른 상·장제와 제사의 거행을 강력히 규제하고자 하는 국가권력과 당시의 보편적 관행 사이에는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또한 전통적 가족제도의 측면에서 볼 때 고려시대는 물론 당시까지도 지속되고 있던 장기간에 걸친「婿留婦家」풍습은 유교적 가족제도의 근본원리가 되는 嫡系主義와 종법질서가 조선 초기사회에 수용·정착될 수 있는 여지를 배제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바로 당시 조선 초기 가족제도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유교적 이념에 따른 가족에 관한 법적 규정과 현실적 가족생활이 모순·괴리되는 현상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법제가 아닌 실제의 측면에서 조선 초기 가족제도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초기에는 지배적 양반계급에서 조차 동성혼(동성동본혼)의 사례 가 발견되고 있다.

 둘째, 조선 초기에는 일부다처혼이 상당한 정도로 행해지고 있었으며 부 녀자의 재혼도 서인에서 사대부계급에 이르기까지 일반화되고 있었다.

 셋째, 혼인 거주규칙의 측면에서 보아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와 같이 장기간에 걸친「서류부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서류부가의 형태는 사위(딸)와 외손을 친손이나 아들에 못지않게 중요한 친족원으로 인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넷째, 장기간에 걸친 서류부가는 장인과 장모·기혼여식부부와 그들의 자녀(즉 외손)로 구성되는「양변적 방계가족」을 조선 초기의 이상적 가족유형 으로 간주하게끔 하였다.

 다섯째, 장기간의 서류부가는 자신의 노후를 봉양하는 사위(딸)와 외손을 아들이나 친손과 차별하지 않고 재산을 균분상속하게 함은 물론, 아들이 없더라도 딸이나 외손이 있으면 양자를 들이지 않고 그 딸이나 외손에게 자신의 봉사를 의탁하게 하였다.

 여섯째, 조선 초기에는 국가권력의 강력한 규제 속에도 고려시대로부터 계 속 이어져온 화장과 승재와 같은 불교식 제사가 상당한 정도로 잔존하였으며, 자녀간의 균분상속에 대응하여 부모의 제사를 딸과 아들이 분할하거나 윤회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었다.

 일곱째, 조선 초기의 족보는 후기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부계의 친족원들만을 기록하는「씨족보」의 성격이 아니라 친손과 마찬가지로 외손·외손의 외손·외손의 외손의 외손 등도 무한정 기록하는「자손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여덟째, 족보에서의 자녀기재의 순서도 남계혈족을 존중하는「선남후녀」의 방식이 아닌 인륜의 질서를 강조하는 기재방법을 취하고 있었다.

 이상의 여러 측면에서 가족제도의 특성을 종합해 볼 때 조선 초기사회에는 종법질서가 수용되고 동성자인 부계친족만의 조직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결여되고 있었다고 하겠다.

<崔在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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