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2. 의식주 생활
  • 1) 의생활
  • (2) 조선 초기 복식구조

가. 왕실 복식

 왕실 복식은 왕과 왕비를 비롯하여 왕세자·왕세자빈·후궁·왕자·왕녀와 그 배우자 등 왕족들의 복식이 포함된다. 역대 국왕이 즉위할 때 명나라로부터 고명과 함께 사여되는 왕의 冕服과 왕비의 적의와 같은 관복류는 왕권의 상징과 직결되는 복식으로, 왕세자용 관복과도 차등을 두어 국왕의 표신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常服 및 便服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복식구조였으며 착용자의 신분과 의식 종류에 따라 옷감·색깔·부속제구·장식 등에 차이를 두었다.

 또한 왕과 왕비의 복식류는 통칭 衣襨라 하여 바지·저고리를 鳳池·동의대(왕용)·소고의(왕비용)로 지칭하는 등 동일한 복식이라도 명칭을 달리하여 엄격히 구분하였다. 그리고 단령·원삼 등 왕실 평상복은 일반인의 대례복으로 허용되기도 하였다.

가) 왕 복

 왕복에는 대례복과 조복·상복이 있다. 대례복은 면류관 면복·조복은 遠 遊冠·絳紗袍, 상복은 翼善冠·袞龍袍 등으로 크게 구별되며 유사시 戰笠과 戎服, 연거시에 편복을 착용한다.

(가) 면 복

 冕旒冠(平天冠)과 袞服을 면복이라 하며 朝覲 및 奉祀服으로서 종묘·사직·선농 등 吉禮 때의 제복으로, 正朝·冬至·朝賀·受冊·納妃 등 嘉禮 때와 衤付廟·大斂 등 凶禮 때의 법복으로 착용되었다.

 면류관의 장식과 곤복의 章紋은 등급이 있어, 황제는 12류면류관·12장 복이나 親王制는 9류면류관·9장복이어서 조선조 역대 군왕은 이에 해당하였다. 태종 3년(1403) 명나라로부터 9장면복 일습을 사여받은 것이 최초이 며493)≪太宗實錄≫권 6, 태종 3년 10일 신미. 이는 고려 공민왕 19년(1370) 제도와 동일하였다.494)≪高麗史≫권 72, 志 26, 輿服 1.

 그 내용을 보면 香皀皺紗九旒平天冠 1頂·九章絹地紗袞服 1套內 : 深靑粧花袞服 1件·白素中單 1件·薰色粧花前後裳 1件·同蔽膝 1件·同錦綬 1件·同佩玉 1副·紅白大帶 1條·玉圭 1枝·大紅紵絲舃 1雙·大紅素綾緜襪 1雙 이었다. 이는 명나라의 永樂制를 따른 것으로 구체적 내용은≪국조오례의≫에 반영되었다.495)≪國朝五禮儀序例≫권 1, 吉禮 祭服圖說. 9장면복은 다음의<그림 1>과 같이 圭·冕·衣·裳·大帶·中單·佩玉·後緩·方心曲領·蔽膝·襪·舃으로 구성되며 왕세자용은 8류면·7장복이었다.

 규는 행례할 때 손에 잡는 의식용 제구로 청옥으로 하며 길이 9촌이다. 면은 면류관을 말하며, 겉과 속을 각각 玄繒·纁繒으로 싸고 넓이 8촌, 길이 1척 6촌에 前圓後方으로 만든다. 금선으로 장식하고 전후 9줄이며 구슬을 한 줄에 9개씩 5색으로 꿰는데 朱·白·蒼·黃·黑 순으로 9촌 길이로 하며 양옆에 玉瑱을 달아 充耳로 사용한다. 金簪으로 고정시키며 아래로 자주와 붉은 빛의 끈이 있다. 왕세자는 8류면에 주·백·창의 3색을 사용한다.

 의는 겉옷을 말하며, 현증으로 만들고 양쪽 어깨에 용, 등에 산, 소맷부리 바깥에 火·華虫·宗彛 순으로 5장문을 陽事 의미로 그려 장식한다. 왕세자는 3장문으로 불·화충·종이로 한다. 상은 앞이 3폭, 뒤 4폭의 의식용 주름치마로, 3번 염색을 거친 훈증으로 만든다. 주위에 선을 두르고 전면에 藻·粉米·黼·黻의 4장문을 쌍으로 하여 陰事의 의미로 수놓아 장식한다.

 대대는 의식용의 띠로서 緋·白羅로 한다. 중단은 玄衣 속에 입는 직령의 포로서, 백라로 만들고 주위를 청색비단으로 선을 두르며 깃 좌우로 불무늬를 11개 그린다. 패는 패옥이며, 옷을 갖춘 뒤 양옆에 다는 의식용 제구로서 5줄의 옥구슬이 있으며 사이에 대·소 玉版이 있다. 아래에 小綬로 장식되 며 보행할 때에 옥 부딪치는 소리로 행동의 규제를 나타낸 것이다.

 수는 후수이며 옷을 갖춘뒤 후면에 부착한다. 紅花錦의 화려한 비단을 사 용하였고 위에 双金環이, 아래에 綱綬가 있다. 방심곡령은 현의 깃 위에 덧붙이는 제구로서 백라로 만든다. 폐슬은 현의 전면에 부착되며, 훈증으로 하여 4장문을 상과 같이한다. 말은 비단으로 만든 버선이며, 석은 비단으로 만든 신발이다. 이와 같이 면복은 장문의 장식이 특징이며 9장문을 사용하여 9장복이라고도 하는데, 각 장문은 최고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9장문 가운데 산은 천하 진정의 의미, 용은 신비한 능력, 화충은 꿩모양으로 아름다움, 불은 번영, 종이는 제례시 제기로서 효도를 나타내며, 술잔에 그려진 호랑이와 원숭이는 용맹성과 지혜로움을 상징한다. 조는 수초로 맑고 깨끗함, 분미는 쌀의 형태로 백성의 양식, 보는 도끼날 형태로 바른 결단, 불은 중생 선도의 의미 등 군왕의 덕목을 표현한 것인데, 세종 때에는 사여받은 면복을 모조하여 제작하기도 하였다.496)≪文宗實錄≫권 3, 문종 즉위년 3월 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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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國朝五禮儀序例≫九章冕服
<그림 1>≪國朝五禮儀序例≫九章冕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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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강사포

 원유관 강사포는 국왕의 陪臣朝賀服으로서 종묘·사직 등 길례, 조하·납 비·책례·조현 등 가례, 그리고 흉례 때 소렴에 착용되며 규·원유관·의·상·중단·대대·패·수·폐슬·말·석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관과 의를 제외하면 면복 제구와 동일하나 장문이 없는 것이 다르다(<그림 2>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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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國朝五禮儀序例≫遠遊冠服
<그림 2>≪國朝五禮儀序例≫遠遊冠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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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사포는 세종 20년(1438) 조선의 요청에 의해 처음으로 사여되었으며497)≪世宗實錄≫권 83, 세종 20년 10월 을묘. 구체적 내용은≪국조오례의≫에 언급되어 있는데 9량 원유관복으로 제도화되었다.498)≪國朝五禮儀序例≫권 2, 嘉禮 冠服圖說. 이 이후의 반사기록은 없으며 강사포 일습을 마련하는데 필요한 재료들을 무역하여 국내에서 제작하였다.499)≪世宗實錄≫권 78, 세종 19년 8월 기유.

(다) 곤룡포

 익선관 곤룡포는 국왕의 평상 집무복으로, 깃모양이 둥글어 圓領이라고도 하여 옥대와 皀鹿皮靴로 일습을 갖추는데 양어깨·가슴·등에 五爪龍補를 달며 왕세자는 四爪龍補를 달아 구분하였다.500)≪世宗實錄≫권 125, 세종 31년 9월 기묘. 곤룡포에는 답호와 첩리를 함께 착용하는데, 이는 곤룡포를 벗으면 융복차림이 되어 유사시를 대비하는 정신적인 무장이었으며 백관의 경우도 동일하였다.

 세종 26년(1444) 면복과 함께 상복 3벌을 사여 받았으나, 항상 주청에 의 지하지 않고 옷감을 사여받거나 무역해서 제작하기도 하였다. 사여된 내용은 紵紗大紅織金袞龍暗花骨朶雲袍·靑暗花褡■·黑綠暗花帖裏·紗大紅織金 袞龍暗花骨朶雲袍·靑暗花褡■·嬰哥綠花帖裏·羅大紅織金袞龍袍·靑素褡■·柳靑素帖裏이다.501)≪世宗實錄≫권 103, 세종 26년 3월 병자. 이것들을 살펴보면 4계절용이 골고루 배려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황제의 황포와 달리 친왕제는 홍포였다.

(라) 편복류

 평상시의 복식제도를 따라 새로 마련하는 襲衣(壽衣) 일습은 당시의 복식 구조를 잘 반영하고 있다.

 다음의<표 1>에 나타난 염습의를 보면 대례복을 제외하고는 왕실·민서가 유사한 복식구조임을 알 수 있으며, 염습의 내용 또한 수량의 차이를 보일 뿐이다.

 斂儀에서 表衣를 포함한 散衣·斂衣는 평상복을 이용하여 표의 및 보공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출토복식의 대부분은 이를 말한다. 상의류로는 과두·한삼이 있고, 하의류로는 바지가 전통적인 기본복식이며, 이외에 액주름(腋 注音), 직령의 등의 편복포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502) 임란 이후 기록인 역대≪嘉禮都監儀軌≫에 王의 腋注音이 있고 直領 가운데 冠服用도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單圓領의 내의로 사용할 수 있고, 조선 전기의 출토복식에서 발견되고 있어 문헌기록은 없으나 가능할 것으로 확신된다.

  전거
염습의
國 朝 五 禮 儀 喪 禮 備 要
왕비










大帶
袞龍袍
褡■
帖裏
羅圓領
褡■
帖裏
紅紵絲圓領
褡■
帖裏
白綃裏肚
白綃汗衫
白綃袴
白綃襪
襲衣 9稱
大帶
長衫
衣裳類
汗衫










 
大帶
黑團領
褡■
帖裏
裏肚
汗衫

襲衣 5稱
(5품 이상)
襲衣 3稱
(5품 이하)



 
  大帶
幅巾
深衣
(圓領·直領衣)
褡■
袍襖
汗衫
裏肚

單袴
靭帛



 
圓衫
(蒙頭衣)
(長襖子)
袍襖










 


絳紗袍一襲
散衣(復衣復
衾)
斂衣 19稱
  圓領
散衣
斂衣 19稱
 
  上衣
(團領·直領類)
散衣
(雜衣 袍襖類)
 


冕服一襲
散衣(袷衣袷
衾)
斂衣 90稱
本朝
命服

 
圓領
散衣
斂衣 30稱
 
  上衣
(同小斂條)
散衣
 
 

<표 1>왕실 및 민서의 斂襲衣 비교

나) 왕비복

 왕비복은 왕의 면복과 같이 청사관복제인 적의와 단삼이 있고 그 외에 가 례할 때 왕비는 예복으로, 세자빈·군부인의 命服으로 착용되는 露衣와 親蠶 服인 鞠衣가 있다. 이 밖에 국속제 장삼 및 편복용 장의와 다양한 종류의 저 고리류, 하의류로 치마·속바지·말군이 있다.

 선조의 왕비 懿仁王后(1555∼1600)와 계비 仁穆王后(1584∼1632)의 염습의대 일습503)≪懿仁王后 殯殿·魂殿都監儀軌≫(1600년),≪仁穆王后 殯殿·魂殿都監儀軌≫(1632년). 한편, 본 의궤는 표지명이≪中宗妃 端敬王后復位衤付廟都監儀軌≫로 오기되어 있었으나 필자의 확인으로 정정되었다.
朴聖實, <殯殿都監儀軌에 나타난 服飾硏究(1)>(≪服飾≫16, 韓國服飾學會, 1991), 45쪽.
은 당시의 복제를 반영한 구체적인 기록이어서 왕비의 복식구조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두 왕비의 염습의대는 평상 착용되었던 의대류와 보공 용으로 특수제작된 소형의 보공의대 및 새로 마련한 습의(수의) 일습으로 모 두 500여 건이 넘는 방대한 양이다.504) 朴聖實, 위의 책, 75∼94쪽.

 의인왕후는 선조 2년(1569) 왕비로 책봉되어 임진왜란 직후에 승하하였으며, 인목왕후는 의인왕후 승하 2년 뒤인 선조 35년(1602) 책봉되었다. 두 왕비의 염습의대는 동일한 복식구조를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의인왕후의 경우 임진왜란 이전의 복식구조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의인왕후의 염습의를 살펴보면, 포류로는 장삼·장의·도포·첨리가 나타나는데 그 중 도포와 첨리는 보공품으로 선조의 의대이다. 그리고 상의류로는 肩亇只·赤古里·赤衫·汗衫이, 그리고 하의류로는 赤亇[치마]·袴·抹袴 등이 있다. 그런데 인목왕후의 염습의를 의인왕후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포류에 的衣와 露衣가, 상의류에서는 唐衣·小串衣·背巨里·長古衣가 새로 추가되고, 肩亇只를 腋亇只로 표기하였다. 하의류에서는 鳳池만이 새로 추가되었다. 이 중 노의에는 金圓紋 장식이 있고 小串衣·赤古里 일부에 金線緞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당의를 비롯 唐串衣·唐汗衫 등「唐」字가 들어간 옷에 흉배를 가식하였고 上赤亇에는 스란[膝襴]을 하였다.

(가) 대삼·단삼

 大衫은 褙子와 霞帔를 갖춘 翟衣(的衣)制로써 명나라 조정은 상복 단삼과 일습으로 계속 반사하였는데 이는 국왕 면복과 함께 보내오거나 왕비 책봉 할 때에는 단독으로 보내오기도 하였다.

 적의는 황후 및 命婦의 관복으로 冠飾, 衣色, 翟紋의 배열, 부속제구 등에 구분이 있었다.

 태종 3년을 시작으로 문종 즉위년부터 선조 36년(1603)까지는 상복과 함께 일습으로 珠翠七翟冠·大紅紵紗大衫·福靑紵絲綉圈金翟鷄褙子·靑線羅綵綉圈金翟鷄霞帔·鈒花金墜子·象牙笏·大紅織金雲肩海棠四秀花紵絲團衫·翠藍暗花紵絲襖, 栢枝緣暗花紵絲裙 등이 각각 하나씩 사여되었다. 다만 예종대 이후에는 대홍 단삼은 녹색으로, 남색 저고리는 홍색으로, 녹색 치마는 청색으로 바뀌었다.505) 朴聖實, <翟衣制度의 變遷硏究>(≪服飾≫9, 1985).

 이것은 공민왕 19년 명나라 孝慈皇后로부터 사여된 9등 적의가 아닌 대삼 제였으나 적의로 사용되었고,506)≪國朝五禮儀≫권 3, 嘉禮. 국왕 면복의 친왕제보다 한 등급 낮은 군왕비 제도를 따른 것이었다.507) 柳喜卿,≪韓國服飾史硏究≫(梨花女大出版部, 1980), 441쪽.
高光林,≪韓國의 冠服≫(和成社, 1990), 120쪽.
이는 가례와 길례할 때 착용되었으며 적관·대삼·배자·하피·금추자·홀 등으로 구성되어 후반기 적의제도와 차이를 보인다.

 단삼은 곧 원삼으로서 직금단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이는 현종조 좌의정 李端夏夫人 綠團衫이나508) 文化財管理局, <重要民俗資料(下)>(≪文化財大觀≫, 1986), 22쪽. 英親王(李垠)妃 紅圓衫을509) 宮中遺物展示館 소장품. 연상케 한다.

(나) 장 삼

 長衫은 왕비를 비롯 세자빈·상궁·나인에 이르기까지 옷감의 종류와 색 깔, 장식 등을 구분하여 다양하게 착용하였다. 국혼 때에는 다홍 필단에 남초로 안을 받치고 횐색으로 끝동(苔袖)과 동정을 달았으며, 앞뒤에 흉배를 달 아 사용하였다.510)≪昭顯世子 嘉禮都監儀軌≫. 그리고 국상 때는 服玩제구 중 왕 면복에 대응하는 본조 命服을 장삼으로 이용, 적의제구 일습으로 갖추어 사용하였으며511)≪國朝五禮儀≫권 7, 凶禮. 상복에도 사용하였다.512)≪世宗實錄≫권 111, 세종 28년 3월 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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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孝宗妃 仁宣王后 國葬都監儀軌≫命服(服玩秩)
<그림 3>≪孝宗妃 仁宣王后 國葬都監儀軌≫命服(服玩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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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장삼은 국혼 때에 착용하는 적의 다음으로 화려한 중국제 노의를 제치고 국속제로 제도화하여 사용하였다. 여기에서 자주적 의지를 강조한 왕조의 정책을 엿볼 수 있다.

 위의<그림 3>에 보여지듯 服玩秩은 세종 2년(1420) 태종비 국상 때의 遷尊儀式에 마련된 의대 내용과 유사하다. 즉 粉紅綾裌長衫·紫的叚子裌隔音·粉紅叚子繡甫老·紅叚子赤古里·白綃汗衫·藍羅裌赤亇·白綾裌襪裙 등으로서, 저고리·치마·곁막음 등 우리 옷의 명칭이 처음 보인다. 저고리는 ≪樂學軌範≫女妓服飾圖說 가운데 깃과 섶·끝동 부분이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 있다. 곁막음[裌隔音]은 곧 옆막음의 의미로, 양옆이 트인 장저고리와 구분한 옆이 막힌 형태를 뜻하며 腋亇只·肩亇只·肩莫伊 등으로 기록된 독립된 상의였으나 조선 말기에는 腋間의 부분명칭으로 비하되었다.

 繡甫老는≪악학궤범≫에 장식된 裳으로 도식화 되어 있고,≪元史≫輿服志 에 따르면 甫老·富里가 상의 의미이므로 몽고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513) 金東旭,≪增補 韓國服飾史硏究≫(亞細亞文化社, 1979) 17쪽. 襪裙은 기마용 통넓은 바지이며 왕실 및 양반가 부인의 필수품이었고 왕실용은 스란을 부착하여 화려하게 꾸몄다.

(다) 노 의

 露衣는 다홍 필단에 남 끝동을 달고 전체에 雙鳳雲紋의 소형 원문 315개를 부금하여 장식한 화려한 예복으로서 가례 때에 착용되었다.514)≪仁祖莊烈王后 嘉禮都監儀軌≫·≪仁穆王后 殯殿都監儀軌≫참조. 세자빈·군부인의 경우 命服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남자 원령과 유사한 외출복으로 속대가 없다고 하였다.515)≪世宗實錄≫권 20, 세조 6년 4월 을묘·권 44, 세조 13년 10월 갑인. 또한 이는 고려 말부터 일반 부녀자의 외출복으로 착용되어 조선 초까지 이어졌는데 이는 왕실용과는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라) 국 의

 국의는 양잠 장려시책의 일환으로 궁중 후원에 친잠단을 만들어 왕비가 친히 누에치는 시범을 보이는 親蠶禮를 거행할 때 착용하는 예복을 말한다(<그림>참조).≪親蠶儀軌≫에 따르면 친잠례에 대한 논의는 태종 때부터 있었으나 성종조에 정식으로 거행되어 선조이전까지 시행되었다가 영조 43년(1767)에는 거국적인 행사로 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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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鞠衣
<그림 4>鞠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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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의는 황후 6복 중 하나로 무늬없이 황색 비단으로 만들었는데, 황색은 중앙의 의미뿐 아니라 뽕나무 잎색을 취한 것이었다.516)≪欽定四庫全書≫三禮圖集注 권 2. 왕비의 국의는 성종 8년(1477) 처음 제정되었고, 동 24년(1493)에는 명부 조잠복을 아청으로 하였으며 採桑할 때에 왕비는 5조로서 황후 3조보다 한 등급 낮춘 것이었 다.517) 朴聖實, <親蠶禮와 親蠶服에 관한 연구>(≪단국대 민속박물관 제5회 학술세미나연구지≫, 1987). 중국에서도 국의제도는 왕조에 따라 변화되었는데 명나라의 황후는 홍색으로 하여 상복이 되었고 군왕비는 청색으로 하여 예복이 되었다.518)≪大明會典≫권 60, 禮部 18. 이를 수용하여 국속제로 사용한 조선에서는 선조 계비인 인목왕후 가례 때에 적의로 오인되기도 하였다.519)≪宣祖實錄≫권 152, 선조 35년 7월.

(마) 편복류

 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반인과 기본적인 복식구조는 동일하였다. 長衣 는 세속 장옷으로서 당시에는 쓰개류가 아닌 유일한 편복포였으며, 선조비 염습의대 중에도 솜·누비·겹옷 등 계절별로 나타난다. 이는 일반인의 무 덤에서 출토된 복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외에 唐衣·小串衣·腋亇只(肩 亇只)·저고리·회장저고리·적삼과 속저고리용 한삼 등 다양한 상의류와 치 마·속바지류·말군 등으로 일습을 갖추고, 쓰개류로는 耳掩과 汝火가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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