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2. 의식주 생활
  • 3) 주생활
  • (2) 조선 초기 살림집의 모습

(2) 조선 초기 살림집의 모습

 아직도 조선 초에 경영한 살림집들이 향리에 더러 잔존해 있다. 이 집들은 매우 개성이 강하여서 같은 형태의 집은 단 한 채도 없다. 안동의 河回마을에서 볼 수 있듯 제각기 특성을 지녀 이웃에 있더라도 같지가 않다. 유씨의 집성촌이 된 마을 중심부에 謙庵 柳雲龍(1539∼1601)이 사는 養眞堂과 西厓 柳成龍(1542∼1607)의 忠孝堂이 있다. 같은 사상과 식견을 지녔던 선비이며 형제인데도 이웃한 두 집은 포치나 구조에서 완연히 다르다. 이들의 집은 이웃 마을의 養素堂이나 낙동강가의 유명한 臨淸閣(보물 제182호)이나 義城 金氏宗宅(보물 제450호)과 다르고 조선 초기의 유명한 학자 晦齋가 산 良洞의 香壇(보물 제412호)·觀稼亭(보물 제442호)·無忝堂(보물 제411호)과도 다르며 醴泉의 權氏宗家(보물 제457호)나 孟思誠 古佛의 거처이었던 孟氏杏壇(사적 제109호) 및 최근에 임진왜란 이전에 창건되었다고 알려진 경주군 기북면 덕동의 四友堂 등과도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 현존하는 집이 옛 집의 유형을 다 망라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 다. 비록 오늘에는 볼 수 없게 되고 말았지만 옛날에는 널리 분포되어 있던 집들도 있었을 것이다.

 태조의 선조인 翼祖가 어려운 난국에서 짓고 살던 집을≪太祖實錄≫은 “흙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살 수 있게 한 집(陶穴而居)“이라고 표현하였다.573)≪太祖實錄≫권 1, 총서.

 이런 집이 어떤 형태의 것인지는 지금 당장 알기는 어렵지만, 움집과는 다른 듯하다. 일종의 혈거인 듯한데 바위를 파낸 것이 아니라 흙의 언덕이나 벼랑을 파서 만든 집으로 보인다. 춘천의 鳳蟻山에서 선사시대의 혈거유적 이 발견된 바 있었는데 이는 풍화된 바위 벼랑을 파내어 만든 것이었다. 아직 흙을 파서 만든 예는 모르고 있는데 중국에서는 황토고원 일대에서 흙의 벼랑을 파서 만든 ■洞이라는 유형의 혈거를 볼 수 있으며, 지금도 수없이 많은 요동이 남아 있다. 흙구덩이를 파서 만든 집, 지금에 와서는 볼 수 없게 된 하나의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초막에 살기도 하였다. 세종 때에 수구문 밖에서 체포된 명화적들도 초막에서 살고 있었다. 정착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기거하던 뜸집이다. 산골짜기에서는 굴피(樺皮)를 덮은 집도 지었다.574)≪世宗實錄≫권 40, 세종 10년 6월 경인. 지금도 굴피집을 볼 수 있다. 또 이웃에서는 너와집도 발견되는데 굴피나 너와는 귀틀집의 지붕으로 잇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현상을 하나의 추세로 보면 옛날에 있었던 집이 오늘 에 잔형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흙과 돌을 써서 벽체를 이룬 토담집과 기 둥 세우고 벽을 친 토벽집과 마루를 높게 설치한 오두막집 등도 여러 지역 에 분포되어 있었다.575) 申榮勳,≪한국의 살림집≫(悅話堂, 1983), 82∼133쪽.

 이 시기의 향리의 보편적인 집은 농사짓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사는 소박한 것이었다. 안채만으로 보금자리를 틀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안채에다 헛간채나 외양간채·측간 등 부수되는 시설을 갖추었고 유교적인 관습에 유의하는 이들은 대문간채·중문간채 등과 사랑채도 구비하려 애를 썼다. 예의를 전제로 한 집으로써 내외하는 요긴한 시설을 갖추려는 흔적을 알 수 있다.

 시골집들은 주변에서 쉽게 얻어지는 자료를 활용하는 지혜로 조영되는 것 이 보통이었다. 지붕도 산에서 거두어 온 알맞은 풀을 잇는 방안이 채택되 었다. 나락을 추수하고 남은 짚으로 이엉을 잇는 방식도 발달하였다. 가벼운 재료로 지붕을 잇게 됨에 따라 집의 몸체를 이루는 기둥과 도리, 보와 서까래들을 가늘게 써서 가볍게 짓는 방법을 이룩하였다. 이에 비하면 기와를 덮는 기와집은 그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體木을 후하게 하며 둔중하게 지어야 하였다. 그러나 기와지붕은 草材로 설비한 지붕에 비하여 월등히 수명이 길어 관리하기가 쉽고 화재 등의 재해를 예방하는데 유리하며 보기에도 장중하여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도시에서는 기와집 짓기를 장려하기도 하였고 別瓦窯를 개설하는 등 기와 보급에 힘쓰기도 하였다.

 기와집과 초가가 한울타리 안에 공존하기도 하였다. 경제적인 능력 등으로 보아 능히 기와집을 지을 수 있는데도 일부러 초가를 짓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비록 시대는 조금 뒤지지만 草廬 李惟泰(1607∼1684)의 경우처럼 많은 선비들은 기와집을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576) 成俔은≪慵齋叢話≫에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초려에 산 사람으로 夏亭선생을 들고 있다(成俔,≪慵齋叢話≫권 4). 귀양살이 하면서 평생 지어보지 못한 자기의 집을 구상해 본 그는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면 짓고 싶은 집을 문집에 묘사해 놓았다. 그의 기술에 따라 배치도를 그려보면 다음<그림 1>과 같다.

확대보기
<그림 1>≪초려집≫에 서술된 이상형의 집 평면도
<그림 1>≪초려집≫에 서술된 이상형의 집 평면도
팝업창 닫기

 태조가 한양에 도성을 건설할 때는 물론 세종 때에 이르러서도 성내에는 초가가 즐비하였다. 세종 13년(1431) 3월에 興福寺 남쪽 민가 84채가 불에 타 자,577)≪世宗實錄≫권 51, 세종 13년 정월 갑오. 왕은 재목을 분급하고‘병오년의 예’에 따라 복구해 주라고 명하였다.578)≪世宗實錄≫권 51, 세종 13년 4월 을미.

 이 때의 병오년은 바로 세종 8년이다. 당시 잦은 불로 근심하고 있던 차 에579)≪世宗實錄≫권 31, 세종 6년 2월 병자. 2월 보름날 午時에 북풍이 크게 일어나고 仁順府의 노비 집에서 불 이 났다. 이 불은 삽시간에 중부의 인가 1,630호·남부의 350호·동부의 190호를 태우고 京市署와 행랑 160칸도 태워 버렸다.580)≪世宗實錄≫권 31 세종 8년 2월 기묘. 그런데 이튿날 또 典獄署에 근무하는 鄭連의 집에서 불이나 전옥서 건물과 행각 8칸이 타고 동행랑과 여염집 200여 채를 태우는 등 이틀 동안의 불로 민가 2,370호가 소실되고 말았다. 당시 도성의 5부 민호가 약 16,900호581) 예컨대 세종 10년에 한성부에서 收單한 경성 5부의 16,921호, 인구는 13,328 인이었다.이었으므로 약 7분의 1에 해당하는 여염집이 타버린 셈이다. 건국 이래 조선왕조가 겪은 최대의 재해였다.

 세종은 즉각 피해상황을 조사하게 하고 사람마다 쌀 한 섬씩을 나누어 주 고 죽은 자는 장사지내고 다친 사람은 치료해 주었다. 19일에는 재목을, 20 일에는 쌀 300섬을 배급하고, 21일부터는 자원자와 부역하는 인부들로 집의 복구작업을 하게 하였다.582)≪世宗實錄≫권 31, 세종 8년 2월 기묘·경진·계미·갑신·을유·기축 참조

 이 화재를 계기로 세종은 곧 禁火都監을 보강하여583)≪世宗實錄≫권 31, 세종 8년 3월 경인. 불이 났을 때 조직적으로 대처하는 예방조치에도 주력하였다. 또 기와 잇기를 장려하여 도성내 의 집들은 차츰 기와집으로 바뀌게 되었다.

 도성내의 집들은 설정된 도로망에 따라 가로를 경계로 삼고 집을 짓는 것 이 원칙이었다. 한성부로부터 대지 사용권을 받은 백성들은 분급받은 대지 를 모두 사용한 넓은 집을 짓고자 하였으므로 대지 경계선을 집의 외곽선 으로 삼는 방안이 모색되었다. 그 결과 행랑채와 담장을 경계선상에 짓는 ㅁ자형이나「트인 ㅁ자형」으로 조명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다.

 넓은 대지를 차지한 상류의 제택에서도 외곽에 행각을 짓거나 담장을 쌓아 넓은 안마당을 만들었다. 정침과 외당·사랑·별당·정자·외양간·측 간·마구간·헛간·잿간 그리고 반빗간 등 부속건물들을 적절히 포치하여 모양나게 짓는 방안이 강구되었다.

 능력이 있으면 이웃집을 병합하든지 해서 대지를 확장하고 큰 규모의 짐 을 짓기도 하였다. 한 예로 개국공신 李叔蕃은 그의 위세를 이용하여 대로를 침범하면서까지 집을 지었는데, 이 때문에 동대문에서 서대문에 이르는 대로 가 굽어 나가야 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한다. 이 밖에도 왕자나 공주·옹주의 집들이 궁성만큼이나 장대하게 경영되어서 지탄을 받는 사례도 있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산기슭으로 올라가 집을 지었다. 이는 그만큼 성내의 대지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유명한 남산골은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들어서 있었으므로 굳이 도로망을 설정할 필요도 없이 집 사이로 저절로 생 긴 골목으로 만족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