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2. 의식주 생활
  • 3) 주생활
  • (4) 살림집의 개선

(4) 살림집의 개선

 도시에서는 마음 먹는 대로 넓은 땅을 차지하여 집을 짓기 어려웠다. 더구나 도성안에서는 국가에서 정하여 분급하는 토지에만 집을 지었음으로 한계가 있었다.

 한양에 도성을 정하자 아직 개성에 머물러 있었던 有司는 신도시의 대지를 개경의 예에 따라 넉넉하게 나눌 셈으로 1품에게 60負를 주고 그 이하의 신료들에게도 조금씩 줄여줄 작정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도성안의 넓이를 측량하니 500결 정도에 불과하여 고려시대의 개경처럼 넉넉히 나눌 형편이 못되었다. 이에 다시 정하여 정 1품에게 35부를 주고 조금씩 깍아 백성에게는 10부씩을 주기로 정하였지만600)≪太祖實錄≫권 7, 태조 4년 정월 기유. 수요에 미달하였다. 남산으로 올라가는 집도601)≪太宗實錄≫권 21, 태종 11년 6월 신묘. 생겨났고 경복궁 뒤쪽의 산능선에도 집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풍수지리설로 볼 때 이것은 큰 일에 속하여서 성종 때에는 이 집들을 철거하였는데, 대상에 든 집이 199채나 되었다.602)≪成宗實錄≫권 125, 성종. 12년 정월 갑오.

 이처럼 대지가 부족하였지만 군주는 아랑곳 하지 않아, 세조 때는 창덕궁 후원이 좁다고 민가 73채를 철거하고 궁장을 퇴축하였다. 또 刊經都監이 민가에 너무 가까워 불이 나면 잘 옮겨 붙을 염려가 있다고 해서 23채를 철거했다.603)≪世祖實錄≫권 27, 세조 8년 정월 을축. 또 좁은 마당을 넓히려고 도로를 점유하여 반듯하던 길이 좁아지고 구불어지게 되었다. 평평하고 곧게 회복되어야 한다고 논의가 분분하였으나 성취되기는 어려웠다.604)≪太宗實錄≫권 13, 태종 7년 4월 갑진. 가난한 백성들은 몰래 부자에게 집을 팔고 동네를 떠나면 부자집은 슬그머니 그 집까지를 담장에 넣어 터를 넓히곤 하였다.

 그에 비하면 향리는 여유가 있었다. 입향 시조는 좋은 터를 골라 자리를 잡아 자손이 번성하면서 여러 채의 집이 들어서고 차츰 마을의 기틀이 잡혀갔다. 이처럼 입향 시조의 식견으로 마을 구성이 의도되기도 하고 후손들에 의하여 주도되기도 하였다.

 양지바른 자리에 터전을 잡고 집을 짓는다. 도시에서는 도로에 연관되야 한다는 제약으로 좌향에 전념할 수 없긴 하였으나 그래도 되도록이면 이상으로 하는 방향으로 설정하도록 노력하였다. 西舍宅이니 동사택이니 하는 이론을 계발하고 적절하게 적응하도록 합리화하였다. 동대문에 남향집이면 삼 대를 두고 적선해야 비로소 차지할 수 있다는 덕담을 듣는다. 입향 시조는 이상적인 터를 자유스럽게 차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문중이 번성하게 되었다고들 말한다.

 남향집의 개념은 지금과 달랐다. 지금은 기거하는 방이 남향하고 집의 중심이 되지만 옛날에는 안채의 대청이 남향의 중심이었다. 오히려 안방은 동 향하는 것이 보통이다.

 시대에 따라 숭상하는 방향이 달라, 동쪽을 으뜸으로 치던 시절도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군주만이 남향할 권리를 향유한다고 해서 살림집은 피하는 미덕을 지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는 완화되어서 중종 때에 이르면 남향하는 살림집이 훨씬 많아졌다.605) 李墍는 그의 저서인≪松窩雜說≫에서 초기에는 남향한 집이 적었으나 중종대 이후로 늘어 났다고 하였다.

 볕이 종일 드는 남향한 대청은 할머니, 어머니와 딸이나 며느리가 하루의 일과를 보내는 곳이다. 신분이 귀할수록 마당에 내려서지 않는다는 불문율 은 대청을 지휘하는 처소로 삼게 하였다. 대청은 음식을 장만하고 의복을 만 지거나 제작하며 크고 작은 일이 진행되는 장소이다. 크고 작은 잔치가 벌 어지고 제사 때에는 문중 사람들이 모여드는 집회소이며 혼인의 초례청이 차려지기도 한다. 이처럼 대청은 다양한 의례를 치르는 곳이므로 번성하는 집안이면 넓어야 하였다. 많은 식구들이 참여할수 있게 하려는 의도이다. 6칸 대청이면 규모가 크다고 하였다.

 산기슭에 자리잡거나 처마가 깊은 집은 시원하지만 다닥다닥 붙은 도시와 집은 무더우므로, 다락집을 짓거나 內樓를 만들어 시원하게 하였다. 이를 凉廳이라 부르는데 대군과 2품 이상의 집에는 내루·서청 등이 있다.

 성종 9년(1478) 집의 규모를 정한 규정에 정방·익랑·서청과 함께 寢樓 가 있는데 이는 세종 22년(1440)과 31년의 조항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떤 구조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태조가 개경의 壽昌宮에 기거할 때 서침실 을 헐고 그 자리에 2층건물을 짓고 침전으로 사용하였다는 기록과606)≪太祖實錄≫권 5, 태조 3년 정월 임인. 세자가 무더운 여름 지낼 일을 생각하고 선공감이 태조에게 아뢰지 않고 짓다가 들 켜서 헐린 경우처럼 2층 침실로 이해된다.607) 申榮勳, <朝鮮朝 凉廳考>(≪건축역사연구≫1, 1992). 태조는 여름에 東凉廳에서 사 람을 접견하곤 하였다. 이는 서쪽 2층 침실과는 또다른 구조이다. 양청도 시원한 곳이지만 2층전은 그보다 더 본격적인 피서를 위한 건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군집의 누침은 2층 건물은 아니고 양청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해석된 다. 현존하는 시골의 제택류에서 양청에 해당하는 부분이 조영된 예를 볼 수 있다. 또 안동의 養眞堂처럼 다락집형의 건물을 짓고 살기도 하였다.

 이들의 구조는 마루(대청)가 위주로 된다. 지금도 대부분의 정침에 넓은 대청이 있는 까닭도 양청과의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앞의<표 1>에서 살폈듯이 세종 때의 정침을 성종 때에는 정방이라 하였는데 이는 성종 때에 이르러 온돌이 많이 보급되어 집의 일부만이 아니라 그 밖의 다른 방에도 온돌시설을 할 정도로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세종 때에는≪救荒撮要≫에서 보이듯 구들 들인 온돌은 병자 치료에 좋은 장소라고 설명될 정도였는데 이는 일부에만 시설되었다는 암시가 되기 도 한다.

 구들 들인 방의 전파가 급속히 진척되는 계기가 어떤 것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전국으로 보급되어, 임진왜란 이후 복구 공사에 따라 재건된 관아건물에는 양청과 함께 燠室(온돌방)이 있었음을 강조한 기록들608)≪新增東國輿地勝覽≫에 경상도 일원 주요건물 재건 때에 씌여진 상량문에는 양청과 욱실을 구비하였다는 점을 주의 깊게 서술해 놓았다.이 보인다.

 민간에서도 마찬가지로 眉巖 柳希春(1513∼1577)의≪眉巖日記≫에 집을 지으면서 구들 놓은 온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살았던 시기 에 이미 온돌 보급이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다고 보여진다.609) 李鎬冽, <十六世紀士大夫家 客廳造營事例硏究>(≪건축역사연구≫2, 1992).

 구들은 지독한 추위를 견디는 데는 더 할 나위 없는 난방시설이었다. 기원전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차차 옮겨져 마침내 제주도에까지 보급되었다.

 구들과 마루는 이질적인 성격을 지녔다. 즉 구들은 폐쇄적이나 마루는 개방적이다. 이와 같은 이질적인 두 요소가 교묘하게 연합된 것이 바로「한옥」 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인 것이다. 두 요소의 연합은 4계절이 분명한 강역의 풍토에 의하여 촉진되었으며 쾌적하게 살겠다는 의지의 완성이기도 하다.

 한옥은 큰 건물을 분할하여 간막이 하고 기능을 부여하여 적당히 사는 집 의 유형과는 다르다. 기능에 따라 제각기 한 채씩 건물을 지었음으로「一室 一棟制」라고 한다. 효율적이면서도 예의를 갖출 수 있게 하여서 문화생활에 적합하였다. 남녀·노소에 따라 제각기 향유하는 전유 공간이 설정되어 심리 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쾌적하였다.

 집은 여러 대에 걸쳐 거주하는 처소로서, 낳고 성장하고 임종하는 그런 곳이다. 또 여러 사람이 모여 살고 온갖 일이 집에서 생겨나고 이루어졌으므로, 통과의례에 합당하게 순화되며 쾌적한 여건의 조성과 즐거운 생활의 지속을 위한 이상형의 집을 마련해 갔던 것이다.

<申榮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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