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1. 가족제도
  • 1) 진휼정책
  • (1) 재해상황

(1) 재해상황

 옛부터 災害는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으로 나누는데, 水災·旱災·風 災·虫災·火災·疾疫 등 자연적 재해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막기가 어려웠 다. 그 실태를 보면 대체로 수재에는 풍재가 겹쳐 일어나고, 한재에는 충재 가 뒤따랐다. 그리고 화재는 일부 지방에 국한되기 때문에 대처하기가 쉬운 편이고, 질역은 많은 사망자를 내지만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진 제하기에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수재나 한재같은 자연적 재해는 농업 위주의 사회에서는 凶荒과 飢饉으로 연결되는 것이 하나의 방정식처럼 되어 왔다.

 이 같은 자연재해는 필연적으로 많은 기민을 발생케 하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국가의 적극적인 진휼정책에 힘입어 구제되었다. 그러나 흉황이 너무 심해서 기민이 충분한 구제를 받지 못할 경우에는 그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 해 고향을 떠나 각 지역을 떠도는 거지[丐乞] 신세가 되거나 일부는 굶주림 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부황이 나서 죽거나 질병에 걸려 죽기도 하였다.

 보다 구체적인 조선 초기의 자연재해 상황을 살피기 위해 세종 때에 발생한 지역별 자연재해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설명해 보기로 하자.610) 이 글은 金鎭鳳의<賑恤制度>(≪서울六百年史≫1, 1977) 및<朝鮮 世宗朝의 賑恤政策에 관한 연구 Ⅰ·Ⅱ>(≪論文集≫17·19, 忠北大, 1979·1980)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으므로 별도의 주를 달지 않았다. 우선 세종 때에 발생한 재해 종류와 피해지역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표 1>과 같다.

시 기 재 해 재 해 지 역
즉위년 (1418)

2년 (1420)
3년 (1421)
4년 (1422)
5년 (1423)
10년 (1428)

18년 (1436)
19년 (1437)
29년 (1447)

 
수 재
한 재
한 재
수 재
한 재
한 재
수 재
화 재
한 재
수 재
수 재
충 재
여 역
江原·咸吉·平安·黃海·慶尙·京畿
忠淸
全羅
江原·漢城
忠淸·江原·京畿·全羅·平安·黃海·咸吉·慶尙
咸吉·平安·慶尙·江原·京畿·忠淸·黃海·開域
咸吉
江原
京畿·忠淸·慶尙·全羅·江原
慶尙
平安
平安·忠淸·黃海·咸吉·全羅·京畿·開城
漢域 및 諸道

<표 1>세종대의 재해 상황

 위의<표 1>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자연재해는 해마다 연속적으로, 또는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전국적으로 혹은 지역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 피해 상황은 연속적이냐 간헐적이냐 또는 전국적이냐 지역적이냐에 따라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수재와 한재가 발생하면 대개는 秋穀(米豆類)이 익지 않기 때문에 다음해 봄에 기민이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실제로 세종 즉위년(1418)에 발생한 수재와 한재로 인하여 그 이듬해 발생한 기민은 186,000여 명이었다.611) 이 기민의 수는 세종 원년 중부지방 4개도 즉 충청·경기·황해·강원도에서 발생한 기민의 수로, 같은 세종 즉위년 재해지역인 경상·함길·평안도의 기민 수는 사료의 부재로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세종 원년 전국의 기민은 186,000여 명보다 많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 가운데 특히 한재가 발생했던 충청도의 기민은 전체 기민의 60%가 넘는 120,249명으로 중부지방 수재지역인 경기·황해·강원도의 기 민에 비해 훨씬 많다. 따라서 한재가 수재보다 그 피해가 컸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또 세종 4년(1422) 재해지역 가운데 강원·경기·황해·평안도 기민의 수 는 약 59,000명이었다. 이 해의 재해는 한재이고 전국 8개도가 모두 피해 지역이었으나 주로 夏穀(麥類)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추곡 때의 그것보다는 피해가 가벼웠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기민 수의 조사 시기도 예년의 春期와 달리 秋期인 7∼9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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