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1. 가족제도
  • 1) 진휼정책
  • (3) 특별대책

(3) 특별대책

 국가에서는 진휼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연례적인 일반대책 외에 응급적인 특별대책을 강구 시행하였다. 그것은 곧 糧穀節約·賑穀補充·勞役中斷·救 荒食物備蓄 등이었다.

 첫째, 양곡 절약은 일상 생활에 긴요하지 않은 소비나 경비의 지출을 감축하는 것을 말한다. 이 방법으로는 금주, 연회의 停罷, 또는 녹봉의 감소가 있다.

 조선 초기의 금주령 실시상황을 보면, 정종대 1년·태종대 9년·세종대 6년·세조대 1년 및 성종대 3년으로 모두 20년동안 실시되었다.619) 이 통계는≪朝鮮王朝實錄≫태조∼성종기사를 조사한 결과이다.

 금주령의 내용은 흉황으로 기민이 발생하면 궁내의 供上 祭享과 빈객용 외에는 공사의 술 사용을 금단함으로써 전국적으로 막대한 양의 곡물이 절약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종 즉위년(1418) 9월에는 외방에 신설한 敎導의 廩給을 정파하였다. 동 19년(1437) 정월에는 관료의 봉록을 감액하였는데, 그 내용은 1∼2품은 減豆 3석, 3∼6품은 減豆 2석, 7품 이하는 減豆 1석이며 綿紬(明紬)·正布·銅鐵 등은 모두 감하였다.

 둘째, 진곡 보충의 방법으로 세종 19년 정월, 국왕은 승지들과 과전의 감축방안을 논의한 끝에, 晋陽大君 王柔 등 대군의 과전 300결 중 50결을 감하고, 駙馬 延昌君 安孟聃의 과전 250결 중 30결을 감축케 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대군의 과전은 250결, 제군의 과전은 180결을 넘지 못하게 규정되었다.

 그리고 경기도에서는 관곡이 부족해 부호의 私蓄 잡곡 11,000석 이상 자는 1년 용도 외의 것은 본관의 分貸例에 따라 환자로 분급하고 풍년을 기다려 수령이 독려 수납해서 私穀主人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이와는 달리 기근에 대한 효과적 구제책의 한 방안으로 예조의 진언에 따 라 기민 친족의 적극적인 救賑을 촉구하는 공문을 중외에 보내어, 친족간에 기근자가 있을 때 구제치 않는 자는 그 죄를 묻고 반면 적극적으로 진제하 는 자에게는 상을 내리게 하였다.

 셋째, 노역 중단은 위의 두 가지 대책처럼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특별대책 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기근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시행되었다. 세종 5년(1423) 2월, 황해도내 실농한 각관의 各司 皀隷·補充軍·別軍·螺 匠·守公 등은 早穀(麥類)이 익을 때까지 입번을 면제하여 주었다. 동 17년 2월에도 역시 황해도 지방의 기근으로 보리가 익을 때까지를 기한으로 정하여 京役人을 돌려보냈다. 동 19년 정월에는 전국적으로 흉황이 심했기 때문에 모든 공사 영선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동 26년 윤 7월, 흉황이 심한 경기·충청·황해도 각 관의 齋郎·樂工·武工 등을 4번으로 나누어 1번을 쉬게 하였다.

 한편 세종 5년 9월, 평안도내 기근이 심한 각관의 향교 생도들을 이듬해 추수 때까지 방학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는 경기·황해도의 실농지역 향교 생도들은 조곡이 익을 때까지 방학하게 하고, 그 교관도 본가로 돌려 보냈다. 또 동 21년 10월에는 충청도 실농 각 관의 향교 생도들도 방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넷째, 구황식물 비축은 흉황이 심해서 구제하기 어려운 경우에 다시 논의 시행된 방안이었다. 조정에서는 심각한 기근에 대비키 위해 곡물이 아닌 식물(植物 중 可食物)을 채취해 비축하게 하였다. 구체적으로 세종 원년 8월부터 전국적인 발생한 한재·풍수재에 대비해서 橡實(상수리와 도토리)·黃角(청각과에 속하며 빛깔이 누런 해초)·豆藿(팥잎·콩잎) 등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모든 초목·뿌리·꽃잎·해초 등을 각 지방의 손실경차관으로 하여금 예축케 하였다.

 세종 16년 2월, 경상도 진제경차관은 구황식물로는 상실이 제일이고, 그 다음이 소나무껍질이므로 소나무의 금벌령을 완화해서 기민을 구제하자고 건의하였다. 동 18년 12월에는 倭通事 尹仁甫와 尹仁紹가 구황방안으로 일 본인이 상식하는 葛根(칡뿌리)과 蕨根(고사리)을 구황식물로 사용하면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건의하니 이에 국왕은 윤인보를 경상도, 윤인소를 전라·충청도에 각각 파견해 그 채취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이 밖에도 세종 6년 8월에는 구황식물로 大戶는 60석, 中戶는 40석, 小戶 는 20석, 殘戶는 10석으로 정수를 규정하되, 상실을 우선적으로 비축케 하였다. 또한 동 16년 4월 왕은 외방의 각 관에서는 풍년이나 흉년을 가리지 않고 구황식물을 다량 비축함으로써, 민력의 노고가 큰 반면에 그 식물은 못먹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고, 호조에 명하여 앞으로는 흉황의 정도에 맞추어 적절한 수량을 채취·비축케 하였다.

 한편 세종은 「經驗賑濟方」을 실농한 각도에 두루 유시케 하였다. 이것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효과적인 구황방법인데, 그 내용은 苦梗末 1수저·雜 菜 1줌·장과 소금 각 1수저를 섞어 끓이면, 이것으로 1인의 기근을 충분히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이한 구황식물로 동 18년 윤 6월에는 菁根(무)의 栽植을 권장하고 있다. 국왕은 “청근이 구황에 크게 유리하여 옛 사람이 이르기를 1畝를 심어서 1,000명을 구제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어찌 근거없는 말이겠는가”라고 하면서 그 재식 방안을 의논해 올리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각 관의 수령에게 명하여, 무를 심는 것이 구황에 크게 이롭다는 점을 농민에게 적극 권유해서, 봄에는 그 씨를 채취케 하고, 가을에는 되도록이면 많이 심게 하는 것을 항규로 정하였다.620)≪世宗實錄≫권 73, 세종 18년 윤 6월 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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