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각 군현의 마을에 설치된 곡물 대여기구이다. 농민에 대한 진휼기구 라는 면에서는 의창과 같은 성격이나 의창이 관설의 진휼기구인데 반하여 사창은 마을을 기반으로 한 민간 자치적 성격을 띤 진휼기구이다.
우리 나라에서 사창이 처음 설치된 것은 세종 30년(1448) 경상도 대구군의 시험적인 실시였다. 이것이 문종 원년(1451)에 이르러 경상도 각 군현의 사 창 설치의 규정이 마련됨에 따라 결실을 보게 되었으며, 점차 전국으로 확산 되었다. 이렇게 설치된 사창은 원곡을 대여해 이식을 취함으로써 처음에는 어느 정도의 원곡의 감소를 막을 수 있었으나, 뒤에는 취식에 중점을 두게 되어 점차 진휼기구가 아닌 국가적 고리대기관으로 전락해 갔다.
어렵게 설치된 사창은 전국적으로 시행된 지 얼마 안되어 서서히 폐지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그 원인은 기대와는 달리 진휼기구가 아닌 대여기관으로 변질되고, 또 그 원곡이 관리 소홀로 더욱 감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종 원년(1470)에 이르러 시행된 지 20년만에 호조의 제의에 따라 혁파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창이 폐지된 뒤에도 뚜렷한 대응책이나 기존 진출기구의 성과가 없자 16세기 이후에도 이 제도의 부활논의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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