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 의료제도
  • 2) 의료기구
  • (3) 활인서

(3) 활인서

 活人署는 고려시대의 東西大悲院으로서 조선 초에는 이를 그대로 계승하 였다가 태종 14년 東西活人院으로, 세조 12년 활인서로 개칭하여 병자의 치료와 빈민의 구호를 맡았던 기관이다. 활인서의 관원은 처음에는 부사 1 명·녹사 2명이었다. 그 후 태종·세종·세조대에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쳐 성종 때에 완성된 것을 보면, 별제 4명·참봉 2명 등이 동·서에 각 6명이었고, 이 외에 제주 1명, 의원 2명을 각각 더 두었다.

 활인원에는 숙소·병동·한증소 등의 치료소가 부설되어 있었는데, 특히 한증소는 질병치료를 위해 매우 중시되었기 때문에 세종은 두 차례에 걸쳐 京中과 성문 밖에 한증소 5개처를 증설하고 미·포를 내어 운영을 도왔다.670)≪世宗實錄≫권 18, 세종 4년 10월 병술. 활인원에 수용된 기민에게는 1인당 1일에 쌀 1되씩이 지급되었고. 이외에 病人料·汗蒸僧料·院布·종이 등이 지급되었다.671) 孫弘烈, 앞의 책, 185∼186쪽.

 이 곳에는 관리와 의원 외에 승려와 무녀가 속해 있었다. 승려는 한증소 의 관리승과 매골승이었다. 전자는 한증소 관리와 간병을 맡은 자이고, 후 자는 사망자의 매장을 담당하던 승려로 양원에 각 8명씩 있었다.672)≪世宗實錄≫권 18, 세종 4년 10월 병술·권 37, 세종 9년 9월 병술.

 활인원에 무녀가 있게 된 것은 세종 5년 예조의 건의에 의해 외방의 무 녀를 추쇄하여 분속시키면서였다. 그 후 도성 내의 무녀를 성 밖으로 축출 하면서 이들도 동서활인원에 보내 병자를 돌보게 하였다. 이와 같이 활인원에는 관리·의원·승려·무녀 등이 속해 있으면서 도성 내의 기민과 병자를 구료하였다. 활인원은 원래 예조 소속이지만 주로 도성 내의 사람들을 구휼하였기 때문에 한성부와 사헌부의 감찰을 받기도 하였다.673)≪世宗實錄≫권 37, 세종 9년 9월 병술.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