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1. 성리학의 보급
  • 1) 성리학의 역할
  • (2) 왕권과 양반사대부와의 균형

(2) 왕권과 양반사대부와의 균형

 역사발전에 따라 정치권력의 중심이 왕실 내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참여의 폭이 점차 확대되어 갔다. 이에 새로운 변화에 따른 왕실정치력과 신진사대부 사이의 갈등을 조절하고 해소하기 위한 이론적 체계로서 신유학인 성리학의 정치적 이념이 지니는 위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성리대전≫에서는 君道·聖學·臣道·治道장을 통하여 사대부의 위상을 밝히고 있다. 군도장에서 정자는

君道는 至誠仁愛를 근본으로 한다. 또한 大要로 말할 것 같으면, 正心으로써 사욕을 막고, 賢人을 구하고 재목을 양육하는 것으로 우선해야 한다. 또 말하기를 人主는 마땅히 싹 트기 이전의 잠재된 욕망을 막아야 한다(≪性理大全≫권 65, 君道).

라고 하였다. 주자는

천하의 기강은 스스로 설 수 없다. 반드시 인주의 心術이 공평하고 정대하면, 偏黨과 反側의 사사로움이 없는 다음에야 기강이 매이는 바에 따라 선사. 君心은 스스로 반듯할 수 없다. 반드시 賢人을 친히하고 소인을 멀리해서 의리의 돌아감을 講明하고, 사사로움의 길을 폐색한 다음에야 반듯할 수 있다(≪性理大全≫권 65, 君道).

고 하여, 바로 왕실의 일차적인 正心에 정치의 기본이 있으나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신을 친히하고 소인을 멀리하는 것이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다음에 언급하는 臣道와 연계되면서 정치와 사회에서 사대부의 위상을 확고히 하려는 내용으로 이해되고 있다.

 성학장에서도 華陽范은

인주의 學과 不學은 천하의 治亂과 연계된다. 만약 好學하면 천하의 군자가 흠모해서 그 조정에 서기를 바라고, 마땅한 도리로써 임금을 섬기고 德業을 도와 천하의 태평을 이루게 한다(≪性理大全≫권 65, 聖學).

라고 하여, 군주에게 정치적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君王의 후계와도 연결되는 儲嗣004)≪性理大全≫권 65, 儲嗣. 항목 등 왕통에 대한 정치적 배려는 성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정치논리의 내용이 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더욱 유의해야 할 것은 그 다음 君臣·臣道 나아가서 치도에 관한 논리전개 과정에서, 우리는 사대부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성리학자들의 현실적 감각을 높이 평가해야 하겠다.

 특히「諫諍」등은 소위 군왕에 대한 정치적 견제와 비판기능을 갖게 하였고, 나아가서 사대부의 정치력을 강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점차 시대적 변화에 따라 조선왕조가 소위 양반관료 국가화되었던 것은 바로 성리학의 정치론에 기초한 결과였다고 하겠다.005) 崔承熙,≪朝鮮初期 言官 言論 硏究≫(韓國文化硏究所, 1976).
金 燉,<中宗代 言官의 性格變化와 士林>(≪韓國史論≫10, 서울大 國史學科, 1984).
南智大,<朝鮮 成宗代의 臺諫 言論>(≪韓國史論≫12, 서울大 國史學科, 1985).

 성리학은 원시유교의 왕실정치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된 논리 구조라기보다는 인도주의적·윤리적 이념체계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원시유교에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기능을 강조할 때 왕실 중심의 정치권력구조였다고 한다면, 성리학은 보다 확대된 지식인층인 사대부들과 협력하는 정치이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성리학이 그러한 시대적 변화와 유교이념적 논리와의 결합을 시도하려는, 그리고 그 다음 단계의 역사무대에서 변화된 상황과 새롭게 대응하려는 유교학문체계의 발전임을 주목하려고 한다. 즉 성리학의 이론체계가 역사의 발전에 따라 대응·변화하였다는 점에 유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자는 그의 治道論에서 인주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즉 주자는

천하의 모든 일은 근본이 있다. 이른바 큰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본디 인주의 心術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性理大全≫권 66, 治道 1, 總論).

라고 하여, 인주의 절대적 위상을 강조하면서도 인주의 자의적인 심술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 주자는 중요한 요점을 정리하는 개념에서

任賢을 논하고 私門을 막는 것이 곧 立政之要이다. 良吏를 택하고 賦役을 가볍게 하는 것이 곧 善良之要이다. 將帥를 공정하게 선발하고 近習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은 곧 治軍之要이다. 경계하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고 아첨하는 말을 즐겨하지 않는 것은 곧 聽言用人之要이다(≪性理大全≫권 66, 治道 1, 總論).

라고 하였는데, 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질서의 체계를 강조하면서도 역할분담과 균형이라는 시각을 정립하고 있었다.

 사대부의 사회적 역할이 점증했지만 인주의 구심적 역할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人君만이 爲德者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宰相·賢人·士大夫·敎化論 등에서 관인들의 기능을 주목하였다. 이것은 정치적 구조 속에서 상호 견제하는 이론으로,≪성리대전≫의 치도론에서 이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즉 왕과 사대부, 민의 협력 위에 국가가 건강하고 안정된 역사를 이루어 간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왕을 구심점으로 하여 국가체제를 안정시키고, 이를 도와 정치하는 관료, 생산에 임하는 민중들의 존재와 그 가치에 대한 철학적 접근과 그 내용은 성리학자들의 사회적 위상을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그 이론적 근거를≪성리대전≫에서 찾을 수 있다.

 ≪성리대전≫속에서 표현되는 군신론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조선 초기 사회적 변동기에 그 역사적 대응력을 얼마만큼 발휘하고 있었는가는 또 다른 검토의 대상이다. 그러나 일차적으로≪성리대전≫을 통한 이론적 내용과 그 지적 체계가 갖는 사상체계는 이 시기의 주요 정치관료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조선 초기의 지성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위상에 따른 또 다른 처방을 마련했던 것으로, 그것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대부의 사회세력을 인식하고, 왕권과 그 측근에서 보다 집권적인 정치체계를 모색했음을 조선 초기의 역사사실은 보여주고 있다. 즉 유자이자 정치세력의 중추적 담당자들은 성리학의 사회구상에서 제시된 몇 가지 요건과 대응하면서 조선의 정치와 제도를 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중의 교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와 이를 위한 재정적·정치적 노력은 조선왕조가 갖는 유교이념의 역사적 실상이었다. 성균관·4부학당·향교 등은 조선왕조의 교화정책이 구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인민의 교화내용임을 보여주는 실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한 과거제 운영은 역시 교화를 바탕으로 현인을 선발하고 국가관료를 통한 유교정치를 구현하고 있었음을 주목하게 한다. 조선왕조는 민중의 교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써 왕도만이 아니라 지방의 군현 단위까지 孔子神位를 비롯한 유자들을 숭배하는 문묘와 함께 유교경전과 문학 전반에 걸친 유학교육을 위한 明倫堂의 설립, 이들을 교육하고 교육받기 위한 구체적인 교관과 학생의 구성, 그리고 이들의 학문을 위해 향교를 중심으로 숙식시설을 세워야 했다. 이와 같은 학교의 운영을 위하여서는 재정 지원은 물론이고 유학을 배우고 가르치려는 정신적 지원 또한 필수적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외관으로 현령을 파견하는 것이 난제였던 것은 다 아는 바이다. 고려시대에도 감무의 파견으로 점차 屬縣의 수를 감소시키기는 하였다. 그러나 결국 속현을 정리하고 군현제의 운영으로 일신하면서 동시에 교관을 파견하고 향교를 건립한 것은 조선시대였다. 이러한 운영은 바로 조선 초기유신들로 짜여진 조선왕조의 관료와 유교이념을 기초로 한 정치이념의 실천에 대한 강한 집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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