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1. 성리학의 보급
  • 2) 5례·4례의 정비
  • (1) 5례의 정비

(1) 5례의 정비

 五禮는≪周禮≫속에서 찾아지는 예의 구조이다.≪주례≫는≪周官≫이라고도 하는 중국 고대 周 왕조의 정치제도를 총괄한 유교경전 중의 하나이다. 바로 그≪주관≫속에서 5례는 정치질서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禮制는 漢代와 魏晉南北朝 시대를 거치면서 經學의 기초 위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조정되었다. 그리고 그 체제의 하나가 5례로 편성되어, 5례는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唐代에 이르러 이른바≪貞觀禮≫와≪開元禮≫등의 禮典이 편찬되었다. 바로 5례는 구체적인 예제로써 중국역사에서 황제권의 권위를 변호하는 정치적 기능을 하였다. 특히 5례는 국가질서 편성에서 왕권의 위엄과 명분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으로 유교 예제를 전개하고 있었다. 당의≪개원례≫는 중국사에서 5례의 규범이 되었다. 그래서 당 이후의 역대 중국왕조는≪개원례≫를 기초로 하여 각 시대 왕조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당대 왕조의 안정을 기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발전에 따른 예제의 변화 현상은 우리 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의 5례도 역시 왕권을 구심점으로 하는 국가질서체계의 논리로서, 이미 고려왕조의 건립에서부터 5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12세기 고려 인종 때 崔允儀의≪古今詳定禮≫편찬은 바로 고려왕실의 5례의 질서론으로 정권의 안정과 국가사회의 정돈을 기원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고금상정례≫의 5례 체제와 이론은 고려왕실에서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실천해 온 왕실권위의 이론적 근거였다.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새로 성립하였을 때에도 왕권에 대한 권위구축과 정치현실에서 국가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과 명분은 유교이념 속의 5례의 체계였다. 그것은 세종대<五禮>의 편찬과 이어 성종대≪國朝五禮儀≫의 편찬과정 그 자체만으로도 5례 수용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위상을 확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말선초의 연대기에서 찾아지는 5례 운영에서 보다 광범한 실증적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새 왕조의 정권담당자들이 구축한 국가질서의 이론과 명분의 학문적 기초와 이론적 체계는 바로 5례적 질서체계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006) 李範稷,≪韓國中世禮思想硏究≫(一潮閣, 1991).

 5례는 4례와 마찬가지로 禮樂思想에 기초한 사회질서론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예는 역시 시기에 따른 변용논리에 기초한다.

禮의 근본은 백성들의 정서에 기초하여 聖人에 의해 만들어지고 예의 도구는 백성들의 습속에 기초하여 성인에 의해 다듬어진다. 성인이 다시 나타난다 하더라도 반드시 時用의 衣服과 器用을 써서 儀禮를 만들 것이다. 그 근본을 귀히 여기며 쓰임을 친히 한다는 뜻 또한 그때그때 왕이 짐작하여 가감할 따름이다(≪性理大全≫권 66, 治道 1, 禮樂).

 위에서 본 정자의 말과 같이, 현실 정치의 실정과 밀접한 관계 위에서 예제가 정립된다는 예론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지식인이자 관료들은 民情과 民俗에 기초해서 예, 즉 질서의 논리를 구축해야 한다는 점을 절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왕조 5례의 내용과 구조에서 왕실은 왕권의 권위를 세우고 안정시킴은 물론이고, 특히 역사적 현실에 기초해야 한다는 예론에 입각하여 학문적으로 예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요구하게 되었다.

 왕실은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유학연구를 심하시키고 있었다. 고려의 경우는 寶文閣과 淸讌閣을 통해서 이와 같은 목적이 수행되었으며, 조선왕조에서는 集賢殿 등에서 유교경전에 대한 수준 높은 연구를 통하여 5례운영의 철학적 근거를 찾았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이론과 실제를 밀착시키는 유교 문화권에서의 정치론의 정립이라고 하겠다.

 조선왕조는 이미 고려시대에 정리된≪古今詳定禮≫를 기초로 하여 송·명에서 제정된≪太常因革禮≫라든가≪洪武禮制≫등을 참조하면서 자신들이 적절하다고 보이는 정치체제를 5례의 예론에 기초하여 구성하였다. 즉 세계적 질서속에서의 조선왕조임을 천명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영된 것이다. 조선왕조만의 천하가 아니라 중국을 포함한 보다 넓은 세계 속에서의 조선왕실을 5례의 구성내용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5례 중에서 祀天禮가 제외된 것은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왕실의 위상을 정립시킨 대표적인 의례 중의 하나이다. 즉 조선왕조만이 독립된 왕조의 세계가 아니라 중국 및 주변국가가 함께 존재하는 국제정치라는 명분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중국의 황제가 중심이 되는 세계질서라는 명분, 그리고 현실적으로 중국의 외교적 압력 등을 직시하면서 5례 구조에서 보이는 사천례를 포기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여 허상의 명분에 집착하지 않고 국제질서 속에서 올바르게 왕실의 위상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여 실천하려 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위 사대교린으로 알려져 있는 중국과 주변국가와의 관계설정 또한 변화되고 확대된 세계관과 대응하는 정치질서 의식의 표현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조선왕조가 보다 넓혀진 세계관에 기초하여 5례를 구성하였다는 사실은 정치적 독립과 역사성의 존재를 더욱 강조하였다는 것에서도 그 정치철학의 의의를 더해준다. 이것은 단지 확대된 세계관 속에서 왕조의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고유한 문화적 특성과 역사의 정통성을 확인하려 한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시조 단군에 대한 보다 강렬한 인식과 중국사가 아닌 東國史의 정리·편찬에 대한 새로운 인식 등은 새로운 세계관 속에서 자아를 발견한 것이다.

 조선왕조는 이러한 민족적 정치의식의 깨우침 속에서 전개된 정치적 각성의 실상을 5례의 구성에서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는 한글의 창제라는 역사적으로 가장 빛나는 업적을 이 시기에 이루었다. 그것은 기초가 튼튼한 성리학의 수용이 학문적으로 민족의 특성을 참조하여 새로운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문자를 창조케 하였고, 우리 역사와 조화되는 5례를 제정하게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이러한 것이 중앙집권체제의 정비·강화와 함께 성립되었다는 점에서도 유의할 만한 것이다. 즉 祀典의 정비는 名山大川의 諸神에 대한 정리를 내용으로 하여 각지에 분산·난립된 지역적인 잡신앙을 단순하게 정비한 것이 아니라, 일원적인 地神 체계로 정비하는 정치·문화적 의미가 있었으며, 이는 문화 전반의 정리와 왕권의 명분이 함께 정리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5례의 정비과정에서 보여준 조선왕조의 적극적인 유교이념 수용정책은 현실적 필요, 즉 왕실의 정치적 권위 확립에서 우선 요구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 조선왕조는 학문적 연구를 심화시키고, 끊임없이 예제를 정비하였다.

 태조대에는 왕실의 안정과 권위의 수립에 필요한 각종 의식을 5례의 기준에 맞추어 행하였다. 태종대에는 왕권 강화의 일면을 5례 의식을 통해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즉 儀禮詳定所를 만들어 보다 전문적인 예제의 운영을 담당케 하였다. 의례상정소는 조선왕조 정치전반의 문제 정리에 있어서 그것이 예론에 맞는가를 심도있게 검토·적용하였다. 세종대에는 朴堧 등 음악 전문가의 출현으로 “예와 음악 부문을 조화시키는 예악을 동시에 수용해야 한다”는≪성리대전≫에서의 기초적 예악론을 실천하였다.007)≪性理大全≫권 66, 治道 1, 禮樂. 이와 같이 왕실에서 적극적으로 예론과 예제를 실천하는 현상은 관념적 측면에서의 조명뿐만 아니라, 당시 이를 수용할 만한 문화의 전반적 변화를 인식하였는가는 물론 사회구성요건 등이 구비되어 사회적 정황과 습속이 이 예제를 수용해야 한다는 종합적인 여건이 성숙했음을 반영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세종대의<5례>는 미완성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것은 禮典으로 미완성되었음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표현은 예론과 역사현실의 갈등이 아직 정리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갈등의 원인은 고려말 이래 성장해 온 사대부라는 정치적 잠재세력이 왕실을 구심점으로 한 정치질서의 구축에 많은 저항을 하였던 역사적 사실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세종대<5례>의 예제 정리·정돈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왕조 초기에 요구되는 왕실 중심의 정치권력의 구조는 일차적이고 시급한 과제로, 신흥사대부들의 요구가 짜임새 있게 정치적 구조에 자리잡기에는 시기상조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들의 현실적 성장과 요구는 시기가 지남에 따 점차 강화되고 성장하였으며, 이러한 역사적 추세는 결국 5례구조에도 일정한 타협과 정비를 하게 하였다.

 일차적으로 禮典의 정비 기회가 마련된 것은≪世宗實錄≫편찬 때의 5례의 정리였다.≪세종실록≫편찬은≪朝鮮王朝實錄≫편찬이라는 일련의 왕조실록 편찬과정의 하나였지만,≪세종실록≫의 경우는 좀 특이하다.≪세종실록≫은 연대기의 정리와 함께<地理志>·<樂譜>·<七政算>·<禮志>가 부록으로 실려있다. 그것은 조선왕조가 유교이념에 기초한 정치운영 내용을 역사에 구현하려는 당대의 역사의식 또는 정치의식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세종실록≫의<5례>기록은 許稠·卞孝文·鄭陟 등의 유자들이 중심이 되어 정리한 내용임을 밝히고 있으나, 조선 초기 이래 조선왕실이 추구해온 유교정치이념의 구현을 위한 꾸준한 정치적 노력을 역사에 기록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세종대<5례>는 왕실 중심의 의례만을 정례화한 것이다. 전체 국가질서의 편성보다는 왕실의 권위와 존엄성만을 생각하는 의례, 더욱이 왕위계승을 유가적 논리 안에서 정치적 관행으로 정착시키려는 의지가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노력과 실천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따라서 5례는 당시의 정치와 사회·경제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정리된 예전이 성종대의≪國朝五禮儀≫이다.

 성종대≪국조오례의≫에서는 왕실 중심의 구조는 변함이 없으나, 세종대<5례>에서는 미처 정리되지 않았던 사대부들의 위상과 서민의 위상이 5례의 안에 함께 정리되었다. 이와 같이 변형된 5례구조는 중국 宋代의 5례구조와도 유사한 점을 보이고 있고, 그것은 또한 송대 성리학의 토대 위에서 정비된 5례구조로 인식되는 것이다. 성종대가 갖는 문화적 성격을 우리는 이 5례구성에서 시사받을 수 있다.

 ≪국조오례의≫는 왕권과 사대부 관료들의 정치력을 예론으로 소화한 단계에서 편찬된 것이다. 즉 왕권과 사대부 관료들의 정치력의 균형 위에서 만들어진 예전으로, 유교문화론이 왕실의 차원뿐 아니라 양반사대부의 사회저변까지 깊숙하게 침윤한 것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곧 유교문화 이념이 우리의 전통문화와 사회기층에까지 파급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008) 李範稷,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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