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1. 성리학의 보급
  • 2) 5례·4례의 정비
  • (2) 4례의 장려

(2) 4례의 장려

 四禮는 다 아는 바와 같이≪朱子家禮≫가 기본이다. 4례는 冠·婚·喪·祭의 항목으로 전개되는 통과의례적인 내용으로,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예제인 것이다. 이에 가례가 갖는 예제의 질서 논리와 역사적 수요에 대한 검토가 우선 요구된다.

 왕실과 사대부·서민이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의식의 원론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지배와 피지배 또는 문화적으로 미개와 문명으로 차등시해 온 역사의식에서 보편성을 강조하는 변화가 나타났음을 상징하고 있다. 가례가 주자에 의하여 제정되었는가의 여부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통념적으로 가례는≪주자가례≫임을 인지하고 있었다.009) 黃元九,<李朝 禮學의 形成過程>(≪東方學志≫6, 1963).
―――,<朱子家禮의 形成過程>(≪人文科學≫45, 延世大, 1982).
池斗煥,<朝鮮初期 朱子家禮의 理解過程>(≪韓國史論≫8, 서울大 國史學科, 1982).
高英津,<15·16世紀 朱子家禮의 施行과 그 意義>(≪韓國史論≫21, 서울大 國史學科, 1989).
裵相賢,<朱子家禮와 그 朝鮮에서의 行用過程>(≪東方學志≫70, 1991).
李範稷,<圃隱과 朱子家禮>(≪圃隱思想硏究論叢≫2, 1993).
더욱이≪성리대전≫안에 가례가 편집되어 있어,010)≪性理大全≫권 18∼21, 家禮. 성리학에서 가례가 지닌 위상에 주목하고자 한다.

 성리학이 역사의 발전과 함께 변화된 유가철학의 우주관·세계관·국가관·인생관을 투영하는 고도의 철학적 체계라 했을 때, 그 속에서 현실의 세계를 통제하는 예론의 하나로 가례를 구체적으로 정리한 것은 성리학을 자신들의 학문적 원천이라 인식하였던 사대부의 사회적 위상과 연계됨을 시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여말선초의 가례에 주목하려는 유자들의 인식 수준은 역사적으로 동일한 습속에 의거하여 존재한다는 문화의식을 토대로 한 정치의식으로, 유교이념의 수용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이미 왕실과 사대부·서민층까지 포함시켜 보편의 토대를 강조하고, 이를 받아들여야 할 논리적 명제를 갖는 시기가 도래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말의 사대부층은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이와 같은 정치·문화적 논리를 지닌 가례의 수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鄭夢周가≪주자가례≫를 모방하여 가묘를 세우고 제사를 모셨으며,011)≪高麗史≫권 117, 列傳 30, 鄭夢周. 趙浚은 상소문에서≪주자가례≫에 의거하여 제사를 지내자고012)≪高麗史≫권 118, 列傳 31, 趙浚. 하였고, 유학자 鄭習仁은 親喪 때≪주자가례≫를 준행하였으며,013)≪高麗史≫권 112, 列傳 25, 鄭習仁. 尹龜生이 가묘를 세우고 제사를≪文公家禮≫에 의거하여 지냈다014)≪高麗史≫권 121, 列傳 34, 尹龜生.고 하는≪高麗史≫의 기록 등은≪주자가례≫에 대한 정보가 이 시기에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여말선초에 이를 실천하기에는 아직 어려웠던 것이다.

 그 이유는 고려의 역사전통이 갖는 현실적 여건이 사대부층의 논리적 요청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실을 비롯한 귀족층을 중심으로 하는 상층의 신분이 갖는 문화의식·관행이 하층 서민들이 지배해 온 문화생활 관행과 동일할 수 없었기 때문에≪주자가례≫가 그들의 주장만큼 생활에 정착하여 수용될 수는 없었다.

 고려말의 자료들은 가묘를 세운다든지, 관례가 시행되지 않으며, 제례가≪주자가례≫의 격식에 맞지 않고, 服喪의 문제가 정치적인 난제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가례수용의 문제가 왕실에서부터 갈등이 일어났으며, 사대부와 서민에 이르는 사회 전계층이 이 새로운 보편적 통과의례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몇몇 특수한 인물들이 상례나 제례에서≪주자가례≫를 실천하면, 그것이 정치적으로 주목되면서 크게 강조되어 기록된 사실은 바로 그러한 사정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점차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사대부들의 유학연구가 심화되고, 그들의 사회 경제적 기반과 정치적 위상이 독립적으로 인정되는 과정에서≪주자가례≫는 점차 그 수용의 폭이 넓어졌다. 일단 조선왕조의 개창으로 유학을 공부한 사대부층 및 그들과 협력한 왕실은 피할 수 없는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성리학의 논리를 깊게 이해하려 했으며, 이에 따라 가례의 수용은 학문적 토대를 갖추면서 심화되었고, 이것은 국가의 제도적 정비로 이어졌다.

 郡縣制의 정비와 함께 모든 군현에 유학을 교육하는 향교를 세우고 교수와 훈도를 파견하여 모든 민을 유교문화로 교화시켜야 한다는 정치의지는≪주자가례≫수용을 장려하는 정책내용으로 나타났다. 나아가 교육의 결과를 수렴하는 과거제도 속에서≪주자가례≫의 이해 정도를 검증하는 제도를 제정하였다. 小科·大科를 시행하여 유학을 공부하는 인재들을 등용하는 과거제도의 정비가 그것이다. 전국에 걸쳐 인적 자원의 선발을 배려하는 初試에서≪주자가례≫의 이해를 검증하는 제도는 단계적으로 유학학습을 통하여 인재를 육성하려는 것으로, 유학이 갖는 治道의 합리적인 제도적 장치였다.

 조선왕조는 이를 통하여 지역적 편재성을 극복하고 전국적으로 균등한 유교교화를 시행해 갔다. 게다가 소위 지방에 거주하는 사대부 지주들의 활동과 함께 조선왕조의 유학은 점차 발달하고, 그것은 한국의 역사전통으로 재창조되는 문화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주자가례≫는 조선시대 사회구성원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었으며 조선사회의 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주자가례≫의 수용은 단순한 관혼상제의 변화에 그치지 않았으며, 사상과 관습의 변화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사회제도의 변화 및 사회구조의 변동까지 초래하였으므로,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을 건국한 개국주도세력들의 성리학 연구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窮理보다는 居敬을 강조하였으며 실천적·윤리적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싱의 시대적 요구와도 부합되었는데, 이들은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불교와 민간신앙에 젖어 있었던 사회의 관습을 바꾸기 위해≪주자가례≫를 시행하였다. 비록≪주자가례≫를 제대로 이해하고 시행한 것은 아니었으나 사회규범으로서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주자가례≫는 일차적으로 사대부에게는 법적 강제력을 갖고 시행되었으나, 일반인에게는 교화라는 간접적인 방식만이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국가권력이 일반 개개인에게까지 미치지 못하였고, 이보다 사대부 자체내의 동질성 회복을 위한 일이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시대적 상황과 중요성에 따라 먼저 제례(家廟制)가 강력하게 시행되었으며 상례·혼례·관례의 순서대로 시행되었다.≪주자가례≫내용의 이해와 시행 규정에 관한 것은 禮曹에서 시행하고, 규찰은 주로 司憲府에서 담당하였다. 그 결과 제례와 상례는 어느 정도 시행되었으나 혼례와 관례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으며 그나마 사대부에 국한되고 일반민은 거의 행하지 않았다. 제례도 奉祀의 경우 4代봉사를 내용으로 하는≪주자가례≫와는 달리 신분과 직품에 따라 다르게 시행되었으며, 상례도 3년상은 사대부에게만 허락되고 일반민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불완전한 것이었다.≪주자가례≫의 내용과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고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사회제도의 변화는 가져올 수 없었다. 또 불완전한 이해의 성과도 시행과정에 전부 반영되지 못하고≪國朝五禮儀≫등 국가·왕실의 典章文物의 확립에만 반영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있어서≪주자가례≫의 독자적 역할의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주자가례≫에 의한 4례가 시행되기 이전에는 주로 통과의례적인 의례는 불교와 민간신앙적인 형식으로 행해졌다. 이와 같은 전통적인 생활습관들은≪주자가례≫가 시행되자 나름대로 여기에 대응하면서도 그 영향을 받아 변화하였으며, 변화의 양상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나기도 하였다. 국가는≪주자가례≫를 시행하는 동시에 전통적인 생활관습에 대해 규제를 가하였는데, 주로 민간신앙보다는 불교적인 관습을 더욱 금지하였다. 거기에는 군사·경제적 요인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불교적인 관습은 줄어든 반면 민간신앙적인 淫祀는 계속 성행하였다.≪주자가례≫의 시행을 추진하는 세력들에게 전통적인 喪葬祭는 비용이 많이 들어 집이 파산할 정도라고 하는 등 부정적으로 인식되었으나, 나름대로 운영하는 방법이 있었으니 공동노동과 상호부조를 위한 契와 香徒 등이 그 하나의 방법이었다. 조선 초기≪주자가례≫가 제대로 행해지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도 민인들이 과거의 인습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며, 그들 자체내에 가정과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원리와 생활관습을 가지고 대응했기 때문이다.

 사대부 계층이 어느 정도≪주자가례≫를 생활화하고, 성종대 중반 이후 성리학적 소양을 보다 풍부하게 지닌 신진사류들이 등장하여 활동함에 따라≪주자가례≫를 통한 교화는 이전보다 더욱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적극적으로≪주자가례≫가 행하여졌다. 동시에 지배세력의 윤리적인 도덕성이 강조되었으며 樂에 대한 인식도 심화되어 당시의 문제들을 예악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연산군대에 일시 저지당하였으나 역사적 대세는 막을 수 없었다. 이제는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행하게 되었으며 사대부뿐만 아니라 일반민까지도 행하였다. 이것은 사대부들이 재지적 기반을 확보하여 일반민을 직접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된 데서 기인하였으며 일반민의 경제력 상승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신진사류들은 鄕約·鄕飮酒禮·小學 등을 시행하였으나 국가권력의 도움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中宗反正」이후 연산군대 예제의 혼란상을 회복하는 가운데 사대부들은 두가지 입장을 나뉘었으니, 하나는 鄭光弼 등 대신과 예조 등의 전문관료들을 중심으로≪주자가례≫의 부분적 시행을 주장한「國朝五禮儀派」였으며, 다른 하나는 趙光祖를 위시한 신진사류들을 중심으로≪주자가례≫의 완전한 시행을 주장한「古禮派」였다. 양자가 모든 면에서 대립하지는 않았으나 三年喪·親迎·廟見 등의 문제에서는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국조오례의파의 주장은 국가운영의 현실적인 문제와 사대부·서인은 제도가 다르다는 인식에서 나왔으며, 고례파의 주장은 천자로부터 서민까지 상하가 다 공유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나왔다. 국조오례의파가 융통성이 있고 상대적이며 시의에 맞는 교화를 주장한 반면, 고례파는 융통성이 없고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교화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양자 모두≪주자가례≫에 대한 이해가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주자가례≫는 교화의 강조와 경제력의 상승에 의해 사대부뿐만 아니라 일반민에게도 행해졌으나, 4례 가운데 관례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혼례는 사대부계층에서 친영이 비로소 행해지기 시작하였고, 제례는 비교적 행해지고 있었으나 가문에 따라 각양 각식이었다. 그래도 가장 많이 행해진 것은 상례였다. 그러나 전통적 생활관습도 강하게 지속되었다.

 성리학적 소양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지니면서 예의염치를 기본적인 요건으로 하여 중종 후반에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던 士林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더불어≪주자가례≫에 대해서도 이해의 깊이를 더해 갔다. 동시에 이들은 향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갔으며, 신분적으로는 士族으로 고착화되고 경제적으로 지주화되어 갔다. 어느 정도 안정된 기반을 갖게 된 사림은 상업의 발달과 농민의 계층분화로 인해 향촌이 불안정하게 되자, 향촌의 안정과 자신들의 위치를 확립하기 위하여≪주자가례≫의 4례의 내용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나름대로의 家禮書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16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가례서는 金麟厚의≪家禮考誤≫, 李彦迪의≪奉先雜儀≫, 李滉의≪退溪喪祭禮答問≫, 李珥의≪祭儀鈔≫·≪擊蒙要訣≫중의 喪祭와 制禮, 李賢輔의≪祭禮≫등이 있다.

 중종 후반에서 명종대에 걸쳐 저술된 가례서들의 특징으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거의 모두가 상례·제례에 관한 내용을 담았으며 특히 제례에 관한 것이 많았다. 둘째, 대부분의 가례서는 형식이나 내용에서≪주자가례≫를 거의 그대로 따랐다. 그 책들은 비록 관혼상제례의 내용을 전부 담지 못하고 체계적으로 서술되지도 못하였으나, 가례서는 향촌사회에서 기반을 잡아가는 사림들이 자신들 가문의 동질성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가례서는 각 가문의 생활규범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가례서의 출현이라는 새로운 경향에 의한≪주자가례≫의 시행은 당시 文定王后에 의한 불교의 숭상으로 불교나 민간신앙적인 분위기가 만연하였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반작용에서도 나왔다. 불교·민간신앙적인 생활관습으로 회귀하거나, 이를 계속 지니고 있었던 일부 관료·외척 세력에 대해 사림은 가례서를 만들어 자신들의 내부적 결속을 다지며 대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주자가례≫시행의 주체는 국가나 관보다는 문중이나 개인으로 넘어갔다.

 그러나≪주자가례≫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은 경우는 그 당시에도 많았다. 일반적으로 친영은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으며, 관례도 상층에서만 행해지고 하층에서는 행해지지 않았다. 상례는≪주자가례≫에 의해 행해졌으나 간혹 틀린 부분이 있었으며, 제례는≪주자가례≫의 제례에 비해 주로 祭物·時祭·忌祭 등에서 많이 달랐다. 香徒와 淫祀는 이 시기에도 강인하게 존속되었으며 특히 향도는 향약의 포섭대상이 되었다.

 ≪주자가례≫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철저한 실천은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주자가례≫의 내용과 관련된 사회제도의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하였으며, 더 나아가 전체적인 사회구조의 변동을 초래하였다. 宗法制·奉祀制·相續制·養子制·冢婦制 등 당시 사회구조와 밀접한 연관을 지녔던 제도들이≪주자가례≫의 철저한 이해와 실천에 의해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16세기 후반기는 바로 이와 같은 사회제도가 변화하는 태동기라 할 수 있다. 이것은≪주자가례≫의 역할이 교화에서 사회제도의 변화로 바뀌어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015) 高英津, 앞의 글, 155∼160쪽.

 16세기를 지나 17세기에 이르면 조선사회 심층까지 유교의 문화논리가 침투되고, 지방문화가 갖는 특색이 중앙정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특히 한국사상계에서 나타난 예학의 등장이 그것이다. 17세기 예학은 沙溪 金長生(1548∼1631)의 학문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김장생의 예학은 바로≪주자가례≫에 대한 조선사회에 대응된 해석과 새로운 사회관행의 창출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반사대부들의 가례연구와 실천의 문제는 이후 심화되어 갔다. 書院의 발흥과 서원을 기초로 한 지방유생들이 갖는 강한 독립성과 특색은 중앙정계까지 좌우하는 소위「黨爭」의 여파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주자가례≫가 갖는 보편적 논리를 통하여 왕실과 사대부간의 갈등을 생성하였다고 하겠다. 그것은 유교문화의 수용에 따른 문화의식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지방의 사족들이 갖는 학문에 대한 긍지와 경제적 독립, 그리고 기층민과 함께 하는 공동체적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가례서를 통한 사회기층의 사회질서 확립의도는 성리학의 구조 내용에서 추구되는 정치내용인 것이다. 사회질서 확립은 5례의 경우에서 이미 지적하였듯이, 5례가 왕을 구심점으로 편제되는 국가질서체제라 한다면, 가례는 사대부 가족들의 宗子를 중심으로 하여 갖는 종족중심의 가족질서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종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질서논리는 고대사회에서 사용된 종법의 내용이다. 조선시대의 지주이며 학인인 양반신분층은 고대의 종법 논리를 사대부의 종법 논리로 원용한 가례를 통하여 점차 자신들의 종족들을 통솔하였다. 국가 또한 양반사대부 신분층에게 이들을 구심점으로 하여 사회계층의 질서를 구상하도록 유도하였다. 이것이 소위≪주자가례≫를 힘써 시행한 정치적 목표였다고 하겠다.

 양반사대부층은 지방에서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과 현실적 상황을 기초로 하여 심화된 유학연구와≪주자가례≫의 실천을 자신들의 문제로 삼고 있었다. 이 시기의 성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예학이 활성화되는 데 크게 공헌해온 김장생 학문이 갖는 내용이라 하겠다.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예학은 5례와의 논리적 갈등을 정리하는 것으로 인식되나, 좁은 의미의 예학은≪주자가례≫에 대한 심층적 이해와 이를 현실에 정착시키는 데 있어서의 갈등을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업적으로 인식된다.

<李範稷>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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