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1. 성리학의 보급
  • 3) 문묘제도의 정비
  • (1) 학교와 존현의 중시

(1) 학교와 존현의 중시

 고려 후기에 등장하는 관인층은 당시 사회를 개혁하는 방법으로 性理學에 의한 학문체계에 주목하고 이를 수용하고 있었다. 朱子 성리학의 사상체계는 기본적으로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마음을 바르게 해서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민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깨닫고 실천하도록 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학교 교육을 통한 방법 이상이 없고, 구체적으로는≪小學≫과≪大學≫을 통한 유교적 禮의 실천과 治國을 이루려고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학교교육이 중요시되는데 특히 성덕 군자를 흠모하는 일이 그 출발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서 尊賢이 강조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게 되는데 존현은 學制 중에 문묘로서 반영되었다. 즉 孔子를 중심으로 해서 역대 성덕 군자를 향사한 곳이 바로 문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자사상 체계의 핵심은 곧 존현이라 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인식은 그대로 충렬왕 때의 유학자요 신흥관인층인 安珦에 의해 수용되었다.017) 충렬왕 말 안향은 學制改編을 통한 왕권강화를 모색하였다. 안향의 학제에는 국가질서 회복을 통한 왕권 강화와 성리학의 수용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안향의 학제개편이 충숙왕 초기 왕권강화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었고, 그 결과로 안향을 충숙왕 6년 문묘에 종사하게 되었다(金鎔坤,<高麗 忠肅王 6년 安珦의 文廟從祀>(≪李元淳敎授華甲記念史學論叢≫, 敎學社, 1986). 여기서 안향의 성리학 수용이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해가 안향 한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고 많은 관인층에게 공감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신흥 관인층이 목민관으로 각 지역에 파견되자 이들은 각 지역에 새로 학교를 건립하고 있는 데서 확인된다.018) 朴贊洙,<高麗時代의 鄕校>(≪韓國史硏究≫42, 1983). 다만 신흥관인층을 중심으로 전개된 학교 설립은 고려 말 안팎으로 중첩된 혼란과 위기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이 조선 초기에 수습되면서 다시금 학교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모든 군현에 학교가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학교를 일으키는 것이 수령의 중요한 임무, 즉「守令七事」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고, 수령이 부임하면 반드시 먼저 문묘에 가서 공자를 알현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새로 등장하는 관인층에 의해서 각 지역에 학교가 세워졌는데, 보다 중요한 사실은 학교가 그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건립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고려 초기이래 개경과 각 지역에는 학교가 건립되어 학생들을 교육하여 왔다. 또한 학교 안에는 문묘가 설치되어 공자 이하 성덕 군자를 받들어 왔다. 그런데 대개의 학교가 학생들을 교육하는 장소로 강당이 별도로 있지 않고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 안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는「廟學同宮體制」로 운용되었다.

 존현이 치국의 요체라는 입장을 수용하고 있었던 신흥관인층으로서는 이러한 형태는 존현의 정신을 제대로 반영하기 어렵다고 보고 새로 건립하는 학교에는 문묘와 강당을 따로따로 세우는「廟學異宮體制」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이후 先聖을 향사하는 곳은 문묘에서, 자제를 교육하는 곳은 강당에서 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학교 안에 문묘가 따로 세워지는 것이 외형적인 변화였다면 당시의 학문과 사상의 변화를 바로 반영하는 것이 문묘내의 配享從祀制度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문묘에 배향 또는 종사되는 인물이 각 시기마다 차이가 나고 있는데, 이것은 각 시기의 정치적·학문적 지향과 그 차이에서 재래된 것으로 이를 통하여 해당 시기의 사상적 동향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고려 후기 문묘향사제도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로서 중국과 고려 전기 문묘향사제도의 변화를 主配享從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019) 중국과 우리 나라 文廟制度 전반을 다룬 연구로는 다음이 참고된다.
朴贊洙,<文廟從祀制의 成立과 變遷>(≪藍史鄭在覺博士古稀記念東洋學論叢≫, 고려원, 1984).
池斗煥,<朝鮮前期 文廟從祀 論議>(≪釜大史學≫9, 1985).
李範稷,≪韓國中世禮思想硏究≫(一潮閣, 1991).

 중국의 경우 먼저 문묘의 중심인 主享이 공자로 확정된 것은 당 태종대 들어서이고, 그 이전에는 周代의 문물제도를 정비했다고 하는 周公에게 先聖의 자리를 양보하고 공자는 先師로 배향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배향제도는 魏나라 문묘에 공자를 주향으로 모실 때 顔回를 배향한 것이 시작이었다. 당의 貞觀 2년(628) 이전까지는 주공을 선성, 공자를 배향하던 것을 학교에서 성현을 받드는 것은 공자로 하는 것이 옳다는 房玄齡의 건의에 따라 공자를 선성으로 안회를 선사로 바꿨다. 이어 宋의 元豊 7년(1084)에는 孟子를 顔子의 다음으로 옮겨 二配享體制로 바꾸고, 南宋代에 이르러 의리명분을 중시하는 주자성리학이 집대성되면서 문묘배향에도 道統을 전한 曾子·子思가 맹자·안자와 같이 배향되는 4배향체제로 확정되어 元·明 이후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종사제도는 後漢 明帝 때 공자의 출생지인 闕里에서 공자와 72제자에게 제사한 것이 시작이다. 당 정관 21년에 한·당의 훈고학의 영향으로 정현의 설에 따라 훈고의 전문성을 중심으로 在丘明 이하 21인이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어 開元 8년(720)에는 종사제에 등급을 나누어 10哲은 당상에 종사하고 공자제자 70인과 21先儒는 모두 벽에 그림을 그려 종사하였다. 이어 송 원풍(1078∼1085)년간에는 荀況·楊雄·韓愈가 좌구명 다음에 종사되고 理宗 淳祐(1241∼1252)초에는 周敦頣·張載·程顥·程頣·朱熹 등 도학파 5인을 종사하였다. 景定(1260∼1264)년간에는 張栻과 呂祖謙을 종사한데 이어 度宗 咸淳(1265∼1274)초에는 다시 司馬光과 邵雍을 종사하였다. 元代에 들어와 武宗至大(1308∼1311)년간에 다시 許衡을 종사하였다.

 우리 나라의 문묘향사제도는 이미 신라 신문왕 2년(682) 國學 설립 때 문묘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 것 같고, 성덕왕 16년(717)에는 국학에 文宣王, 10哲, 72弟子像을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라말까지 향사대상은 공자와 안자 및 10철에 국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 들어와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송대의 문묘제도가 수용되어 국자감에 반영되고 있을 뿐 아니라 현종 11년(1020)과 13년에는 최초로 우리 나라 儒賢인 崔致遠과 薛聰을 문묘에 배향하였다.020) 고려 현종대 文廟從祀에 대해서는 金鎔坤,<高麗 顯宗代의 文廟從祀에 대하여>(≪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5) 참조. 숙종 6년(1101)에는 문묘에 안자, 10철, 61제자, 21선유, 최치원, 설총 등 총 99인을 배향·종사하였는데, 이러한 규모는 송의 眞宗 大中祥符 2년(1009)의 문묘향사자 수와 일치하는 것이다. 고려문화가 중국문화와 대등하다는 자신감이 문묘향사제에서도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려문화의 자주성과 관련된 문묘향사제의 운영은 고려 중기에 더욱 확대되었다. 따라서 설총과 최치원도 문묘 속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고려문화의 형성에 기여했던 존숭인물로 받아들여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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