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1. 성리학의 보급
  • 3) 문묘제도의 정비
  • (2) 4배향제의 확립

(2) 4배향제의 확립

 문묘향사제의 운영은 주자 성리학이 元을 통해서 들어오면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려 후기 문묘향사제의 변화를 검토할 때 주목되는 것이 안향의 학제 복구에 대한 노력이다. 이것은 안향이 원에서 생활하면서 깊어진 성리학에 대한 이해위에서 그의 학제개혁이 이루어진 것이고, 문묘 또한 그러한 과정의 하나로 새롭게 건립된 것이다. 문제는 이 때의 문묘가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때의 문묘가 원의 문화를 적극 수용하는 상황 속에서 건립되고 있을 뿐 아니라 원 관료의 지시를 받는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원의 문묘향사제를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원도 주자학을 관학으로 적극 수용하는 단계에 있었으며, 문묘향사제의 내용도 남송대의 그것을 재현하는 데 두어졌다. 원은 成宗 10년(고려 충렬왕 32년;1306)에 비로서 宣聖廟를 건립하였는데, 이 때 선성묘의 배향과 종사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다. 우선 배향에 있어 남송 때 이미 도학파를 존숭하는 4배향제가 확립되었지만, 원에서는 仁宗 延祐 3년(1316)에 와서야 4배향제를 채택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4배향제의 전 단계로 2배향제를 선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2배향제는 중국의 졍우 북송 神宗代 王安石의 등장과 함께 왕안석 자신은 물론 개혁을 뒷받침하는 맹자와 韓愈를 향사하여 맹자는 配享位에, 한유는 從祀位에 올린 데서 비롯되었다. 반면 종사는 度宗 咸淳 3년(1267) 顓孫師가 晉國公에 봉해져 10哲位로 올라갔는데, 이러한 변화가 원 선성묘에 수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렬왕 문묘 신축 당시 문묘향사제의 내용은 이상과 같았을 것이다. 다만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은 이미 고려 현종 때 문묘에 종사된 설총과 최치원을 어떻게 처리하였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원 간섭기에 고려의 일련의 제도가 격하된 측면을 고려한다면 배제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보다는 당시의 고려문묘가 제후국가의 문묘로서 건립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그 이전과 같이 배향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한편 고려 후기에 학제가 다시 한번 대대적으로 정비된 것은 공민왕 16년(1367)의 일이다. 즉 공민왕 16년 5월에는 國學을 중영하고 이어 8월에는 국왕이 문묘에 배알하였다. 이 때의 중영은 충혜왕 2년(1341) 홍건적의 침입으로 국학이 소실된 후 바로 중건되지 못하였다가 중국 사신의 지적을 받은 후에야 어려움을 무릅쓰고 중건한 것이다. 문제는 중건된 국학이 안향이 건립한 국학과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廟學중에서021) 공민왕 16년 國學 重營과 관련하여 관심을 기울인 것은 廟學 중의 學制였다. 즉 중영과 함께 학제를 개편하여 4서5경에 따른 반을 구성하고 전담교수를 확보한 것이 그것이다. 이후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진일보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고려 말기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부분에 걸쳐 혼란을 거듭하고 있을 때,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는 세력이 꾸준히 성장해 왔으며 특히 공민왕 이후에 성장해 왔다. 이와 관련하여 공민왕 16년의 학제개편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그것은 이 때의 개혁이 이들 세력들의 성리학적 이해를 심화하는데 기여했으며, 그것은 그대로 당시 사회를 개혁함에 있어 준거로서 역할했기 때문이다. 문묘에 대해서 보면 원은 인종 皇慶 2년(1313) 이후 享祀上 일련의 조처를 취하였다. 즉 같은 해 주돈이·정호·정이·장재·소옹·사마광·주희·장식·여조겸 등 주자성리학을 확립하는데 기여한 도학파는 종사함과 동시에 원 주자학의 확립에 기여한 허형을 문묘에 종사하였다. 다시 3년 후에는 공자의 도통을 안자·맹자에 이어 계승했다고 하는 증자·자사를 배향위에 올려 4배향제를 채택하였다. 이어 문종 至順 원년(1330)에는 董仲舒를 종사하였으며 順帝 至正 14년(1354)에는 楊時·李侗·胡安國·蔡沈·眞德秀 등 5현을 종사하였다.

 그런데 원 문묘상의 이러한 변화가 곧바로 고려 후기 문묘에 반영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 예로 충숙왕 12년(1325) 10월에 내린 교서에 문선왕, 10철, 70제자와 최치원, 설총에 대한 향사를 정성껏 받들라고 하면서 4배향제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022)≪高麗史≫권 35, 世家 35, 충숙왕 10년 10월 을미. 그렇기는 하지만 몇 가지 변화를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신흥관인층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이들에 의해 비판의 강도가 더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점은 사회 전 부분에 걸쳐 나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묘와 관련해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종래 고려방식으로 운영되던 문묘향사가 비판되었다. 즉 설총과 최치원이 문묘와 관련해서 그 존숭이 강조되는가 하면, 설총과 최치원이 배향위에서 종사위로 격하된 것이 그것이다. 또한 4배향제는 채택되지 않았지만 그 전 단계로 2배향제가 도입되었다. 주자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일군의 도학자가 종사되었고, 이러한 도학을 맹자로부터 계승한 한유까지 종사되었다. 반면 동중서와 허형은 여전히 종사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로는 동중서의 경우 음사적인 요소가, 허형의 경우 공민왕 이후 전개된 반원적 흐름과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간단한 사실을 통해서 원칙적인 문묘운영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하여 공민왕 16년에 중건되는 국학에 반영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내용은 중앙에 공자, 그 좌우에 안자·맹자를 배향하고 그 주위에 10철이, 그리고 東西廡에 先儒와 동국 유현인 설총·최치원·안향이 배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 성립 직후 태조 이성계의 명령에 따라 閔霽가 문묘에 알현하여 석전제를 올렸을 때 문묘향사제의 내용은 대략 이상과 같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묘향사제는 태조 3년(1394) 서울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변화를 맞게 되었다. 즉 한양에는 종묘·사직 등과 함께 새로이 문묘가 건립되었고, 이 때 새로 건립된 문묘에 반영된 변화가 주자 道統論을 내세우는 제도로서 4배향제였다. 그것은 문묘가 건립된 직후인 정종 원년(1399) 정월에 성균관에서 증자와 자사를 안자·맹자와 함께 배향하여 配食할 것을 건의했다는 기록에서 확인된다.023)≪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4월 임술. 그런데 이 조치가 내려진 지 2개월 뒤에 정종은 한성에서 개경으로 다시 서울을 옮겼다. 천도 후 개경에서의 문묘향사와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종 원년 정월에 시행된 4배향제에 따라 문묘향사례가 개편되었고 그에 준하여 석전제가 시행되었다고 ale어진다.

 그러나 이 무렵 4배향제에 대한 이해가 모든 관인층에 충분히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정종대의 학문과 사상의 동향은 유교·불교·도교가 비교·검토되는 가운데, 유교가 그 논리적인 우월성을 인정받는 방향으로 국가정책이 전개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정종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매우 호의적이어서 관인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런 점이 문묘향사에 있어 4배향제가 시행되었으면서도 관료들 사이에 준행되지 못한 이유라고 여겨진다.

 문묘사전상의 이러한 혼란은 태종이 즉위한 후 유교적 예제에 근거한 왕권강화를 시도하면서 시정되어 갔다. 즉 태종 3년(1403) 4월에는 증자·자사가 여전히 문묘향사상에 배식되지 않은 문제를 지적하였고,024) 위와 같음. 태종 4년 2월에는 증자와 자사를 배향위에 올리는 한편 子張을 10哲位에 종사하게 하였다.025) 이로써 조선 초기 개경과 서졍 그리고 기타 지역에서의 4聖과 10哲 土像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풀리게 된다. 다시 말하면 4배향제와 아울러 塑像의 설치시기가 문제가 되었는데, 이것은 적어도 증자·자사 및 자장의 소상 만큼은 이 때 만들어 졌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太宗實錄≫권 7, 태종 4년 2월 정축). 이 원칙은 태종 5년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정종 2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문묘를 새로 조성하여 태종 7년 3월 문묘가 완성되자 그대로 적용되었다.026)≪太宗實錄≫권 20, 태종 10년 9월 계사.
≪新增東國輿地勝覽≫권 1, 京都 上, 文廟.
이러한 흐름은 태종 9년 이후 더욱 확대되었다. 다시 말하면 태종 8년 호불적이었던 태조가 죽자, 태종은 국가사전의 정비를 통한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다.027) 金泰永,<朝鮮初期 祀典의 成立에 대하여>(≪歷史學報≫58, 1973). 이와 동시에 국가사전을 정비함에 있어 적용기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를테면 태종 9년 7월 문묘사전에 있어 文宣王·四配位·十哲 位版에 대한 規式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는 그 하나의 경우였다.028)≪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7월 정축. 이 때도 洪武禮制를 참고해서 정하도록 결정되었으나, 문제는 명의 제도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전왕조의 구례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許稠가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명의 사전운영의 전모를 살피고 돌아온 허조는 국가사전에 대한 문제를 보고하였다.029) 이 시기 문묘사전을 포함한 예제 정비를 허조가 갖는 사상, 이를테면 보다 철저한 성리학적인 의리명분 및 정통론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시각으로 다음 연구가 참고된다.
李範稷, 앞의 책(1991).
池斗煥,≪朝鮮前期 儀禮硏究≫(서울大 出版部, 1994).
이 가운데서 문묘사전과 관련하여 명의 문묘에서는 종사되었던 許衡과 董仲舒가 우리 문묘에서 누락된 것과 함께 명의 문묘에서는 출향된 楊雄이 우리 문묘에서 종사되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고, 이를 명의 문묘와 같이 동중서와 허형을 종사하고 양웅을 출향할 것을 건의하여 채택되었다. 이와 함께 釋奠儀禮가 개정되었다.030)≪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2월 정사. 이리하여 일단 4배향제를 중심으로 한 道統儀禮가 확립되었다.031) 이로써 조선시대 文廟儀禮의 골격이 완비되었다. 물론 이 바탕 위에 각 시기별 정치적·사상적 흐름이 반영되어 나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성종대에 蔡沈·胡安國·吳澄 등이 추가로 종사된다든가, 중종대에는 鄭夢周가, 광해군 2년에는 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 등 五賢이 문묘에 종사되는 것 등은 그 예이다.

 태종 13년(1413) 4월에는 국가사전 전반에 걸쳐 개편을 단행하였으며, 이때 州縣 文宣王儀禮가 종래 小祀에서 中祀로 승격되었다.032)≪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4월 신유. 태종 14년 7월에는 視學儀註와 함께 州縣釋奠儀가 반포되었고,033)≪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7월 임오. 18년 4월에는 濟州文宣王釋奠祭儀가 사전에 수록되어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034)≪太宗實錄≫권 35, 태종 18년 4월 신묘. 이와 같은 일련의 사전 개편은 군신·부자·부부간에 성리학적 명분 내지 질서를 부여하는 것으로서 이 토대 위에서 왕권 강화가 모색되는 것을 뜻한다.

 세종대에 들어와 국가 의례는 한층 정비되어 갔다. 먼저 세종 즉위년(1418) 11월에는 視學酌獻 문선왕의례가 제정되었다.035)≪世宗實錄≫권 3, 세종 즉위년 11월 정묘. 세종 2년 4월에는 文宣王朔望奠에 쓰이는 물품에 대한 문제가 거론되어 祭祀序例에 따라 개정되었다.036)≪世宗實錄≫권 8, 세조 2년 4월 갑자. 이어 集賢殿을 중심으로 학문연구가 심화되어 감에 따라 국가사전상에 보이는 이단적 요소가 비판되었다. 이에 따라 사전체제가 다시 한번 정비되었다. 세종 8년 4월에는 朴堧이 국가의례시에 사용되는 음악, 그 중에서도 석전에 올리는 음악에도 문제가 있다고 하여 그 시정책을 건의하였고,037)≪世宗實錄≫권 32, 세종 8년 4월 무자. 이어 세종 12년 8월에는 석전제에 쓰이는 희생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여 한달 후에는 이를 개편하였다.038)≪世宗實錄≫권 49, 세종 12년 9월 갑인. 이어 세종 17년 12월에는 文廟奠謁儀가 제정되었다.039)≪世宗實錄≫권 70, 세종 17년 12월 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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