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1. 성리학의 보급
  • 3) 문묘제도의 정비
  • (3) 권근 문묘종사 논의

(3) 권근 문묘종사 논의

 文廟享祀儀禮가 정비되어 가면서 문묘에 향사될 인물의 선정이 논의되었다. 이러한 논의는 이미 태종대에도 거론되었으나,040) 태종 9년 3월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문묘에 배향될 관인을 表出하자는 요청이 제기되었다. 이 요청은 그 종사 대상자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으나 李齊賢·李穡·權近 중 특히 이색을 의미했다고 보여진다(≪太宗實錄≫권 17, 태종 9년 3월 임술). 세종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문묘를 정비하는데 중국의 것을 토대로 하면서도 종사인물에 설총·최치원 그리고 안향만이 참여한 것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다시 말하면 조선 초기 국가제도를 정비하는데 유학자들의 학문적 기여가 적지 않았던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문제 제기는 당연한 것이었다. 정도전·권근 등 조선 초기 유학자들의 활동은 남다른 바가 있었다. 특히 권근은 태종의 왕권강화를 성균관 교육을 통한 도학의 학문으로서 뒷받침하였다. 이런 활동이 관인들 사이에서 권근의 학문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타났다.041) 그 하나의 사례로 권근은 나라의 보배이자 유림의 스승이라는 평가를 듣게 되었다(≪太宗實錄≫권 17, 태종 9년 4월 갑술). 이러한 움직임은 권근 사후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관인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도학발흥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고자 하였다.

 먼저 세종 원년 8월에 좌사간대부 鄭守弘은 문풍진작의 일환으로 권근의 문묘종사를 요청하였다.042)≪世宗實錄≫권 5, 세종 원년 8월 기묘. 다시 말하면 권근은 성리학을 발흥한 업적으로 정치적 업적 등을 포함하여 한마디로 도덕과 문장을 겸비한 학자이므로 문묘에 모셔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건의는 의정부·6조에서 의논하여 보고토록 하였다. 이후 별다른 조처가 없자 한달 후에 元肅이 의정부와 6조의 관료가 대부분 무신이기 때문이라 하여 대소 문신들을 광범위하게 참여시켜 논의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는 결국 받아들여졌다.043)≪世宗實錄≫권 5, 세종 원년 9월 계해. 권근의 종사 문제에 대한 문신들의 논의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세종은 권근의 종사문제를 논의할 때 崔冲과 河崙을 함께 논의하여 보고하도록 명령하였다.044)≪世宗實錄≫권 5, 세종 원년 10월 을미. 이로써 이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믿어지지만 그 내용 또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하륜이 포함된 사실로 미루어 상왕 태종이 이 문제에 개입한 것으로 생각되며, 태종은 권근의 학문을 대단찮게 평가하였던 점에 비추어 결국 종사불가로 귀결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권근의 종사 논의가 다시 제기된 것은 세종 15년(1436) 2월 成均司藝 金泮의 상소에 의해서였다. 이 무렵에 와서 학문의 방향이 유교의 기본 윤리인 충효를 실천하는 도학적 흐름으로 전개되어 갔고, 이러한 방향에서 당시 학문이 가지고 있는 병폐를 지적하고 이를 시정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첫째도학에 공이 있는 인물을 문묘에 종사할 것, 둘째 성균관의 학제를 五經四書齋로 개편하고 동시에 初場講經을 실시할 것, 셋째 文廟 東西廡의 규모가 7間인 바 이를 요동의 그것과 같이 11칸으로 확대하여 陳設할 때 협소한 불편을 해소할 것, 넷째 문묘를 옛 제도대로 3면에 호수를 만들 것을 요청하였다.045)≪世宗實錄≫권 59, 세종 15년 2월 계사. 특히 첫째의 종사 요청은 권근뿐 아니라 권근과 師承關係에 있는 李穡·李齊賢이 도학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하면서 동시에 문묘종사를 요청한 것이었다. 이 무렵에 이르러 송대의 도학파를 새롭게 이해하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전 같으면 이제현·이색·권근의 학맥을 좌주문생의 관계로 파악하였을 터인데 송대 이학에 대한 이해와 함께 師友之道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고 그러한 관점에서 학맥을 연결한 것이었다. 이것은 앞서 세종 원년의 입장과 다른 것으로 그 사이에 도학에 대한 이해도 있었지만 동시에 권근 종사의 약점으로 여겨졌던 조선왕조 개창에 반대한 전력 문제를 학문에 대한 연원 문제로써 해결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김반이 상소한 지 6개월 뒤인 세종 15년 8월에 그 상소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었다.046)≪世宗實錄≫권 61, 세종 15년 윤 8월 갑술. 첫째 조항은 6품 이상의 문신들로 하여금 다시 논의하도록 하고, 둘째 초장 강경문제에 대해서는 때에 따라 강경과 제술을 사용하자고 건의되었고, 셋째 문묘 증축은 4칸을 증축하여 11칸으로 하고, 넷째 문묘 주위에 호수를 만들자는 주장은 水源이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가운데 이제현·이색·권근으로 이어지는 문묘종사 요청은 앞서와 같이 6품 이상의 문신들로 하여금 논의하도록 하는 선에서 그쳤고, 그 내용도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047) 從祀不可 이유는 추측컨대 앞서와 같을 것으로 예상되나, 그 가능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정치적·사상적 흐름을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후 당시 학문의 흐름이 이학을 강조하고 중시하는 분위기에서 이러한 학문을 창조하고 심화한 이들이 다름아닌 이제현·이색·권근이라고 하면서 이들의 문묘종사를 요청하였다. 그것이 세종 18년 5월 成均館生員 金日孜가 올린 상소였다.048)≪世宗實錄≫권 72, 세종 18년 5월 정축. 이 상소가 앞의 상소들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도 조금 다른 것은 修己治人 중에서 수기 즉 도학을 보다 강조하고 그런 측면에서 이들의 업적을 정리한 점이었다. 즉 性命之理를 천하에 밝힌 것은 孔孟의 공이고 공맹의 도를 동방에 퍼지도록 한 것은 이 세 사람의 공이라고 하면서 도학적 측면에서 그 업적을 서술하였다. 당시의 학문 경향과 이들 세 사람의 학문 성향에 비추어 문묘에 종사되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되나 이 요청은 간단히 거부되었다. 이것은 이미 그 이전의 종사요청에서 그 가부가 논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논의내용이 수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현재로서 그 명확한 거부 이유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이제현·이색·권근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전반적인 활동을 살펴볼 때, 종사거부의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이색·권근 등의 조선왕조 개창에 대한 반대입장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점은 조선왕조 개창의 정당성 여부와 관련되는 문제로 왕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였다. 이 문제에 대해 뒤에 태도를 바꾸어 조선왕조에 협력한 점이 제시될 수 있으나, 이 문제는 유교적 忠義라는 명분론에 저촉되는 사항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태종 이후 왕권강화의 한 측면으로 유교적 명분론이 강조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학문에 있어서도 점차 실천윤리인 효와 충을 강조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들 학문경향이 당시의 관인들에게 인정되어 문묘종사로 이어지면서도 종사되지 못한 이유가 아닌가 한다.

 한편 세종 말년에 이르러 이제현·이색·권근 등의 문묘에 종사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져 갔다. 그것은 국초 이래 세종 중엽까지 이들에 대한 문묘종사가 요청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학문적 입장과 국초 이래 관인들의 학문적 입장이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종 말기를 전후로 해서 관인층 내부의 학문적 입장이 다양해짐에 따라 관인층 내에서도 이들의 종사를 반대할 소지가 마련되었다.049) 金鎔坤,≪朝鮮前期 道學政治思想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4). 세종 말기 관인층은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 서로 다른 견해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 점은 그들의 학문자세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는데, 대체로 3가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수기와 치인을 동시에 강조하는 입장으로 세종과 일부 관인이 속한다. 이 입장은 至治의 근본으로서 심학 또는 이학을 중시하지만 이와 동시에 국가통치에는 실용적인 학문과 기술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둘째, 넓은 의미에서 수기치인의 토대 위에 서 있으면서도 현실적 변화를 수용하는 입장이다. 학문에 있어서의 부박한 文風이라든가 귀족적인 성향이 확대되어 가자 기존 학문에 대한 반성으로 이학에서 심학 내지 도학적 실천을 보다 중시하여 小學의 실천, 師儒錄의 운영, 社倉制의 시행 등은 이러한 관점에서 새롭게 모색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변화의 단서는 학문진작을 위한 방안으로 初場講經을 주장한 것이 그 계기라고 할 수 있으며 계속해서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셋째,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수기치인의 입장 위에 서 있으면서도 수기보다는 치인을 보다 중시하는 입장으로서 특히 학문진작에 대한 방안에 있어 製述取士를 주장하여 두번째 입장과 충돌하였다.

 문종대 이후 세 가지 유파가 더욱 각자의 입장을 강화해가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즉 수기를 강조하는 쪽에서는 가일층 도학적 성향을 나타내었고, 학문진작과 관련해서는 경학을 강조하였다. 이에 비하여 치인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국가의식에서 민인에 도움을 줄 경우 불교의식도 허용하는 자세를 나타내었고 문풍진작과 관련하여 제술을 통한 取士를 강조하였다.

 치인을 강조하는 유파의 문묘종사에 대한 견해로는 세조대 梁誠之의 상소에 잘 나타나 있다.050)≪世祖實錄≫권 3, 세조 2년 3월 정유. 그는 세조의 집권을 태평한 업적을 이룰 토대가 되는 거사임을 말하고 국가사전 전반의 개혁을 촉구하였다. 사전 개편의 방향은 나라의 풍속을 강화하여 왕권을 강화하자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문묘종사에 관한 조항도 들어 있다. 여기에서 양성지는 우리 나라 역대로 중국과 비견되는 문화를 향유하여 왔는데 문묘에 배식하는 인물은 고작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 그리고 고려의 안향 3인밖에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어 고려의 雙冀는 과거를 베풀어 문풍을 떨쳤으며, 崔冲은 9재를 설치하여 학생을 가르쳤고, 이제현과 정몽주 그리고 권근은 그 문장과 도덕이 만세토록 모범이 될 만하다고 말하고 이들을 배향하여 후학들을 권면하자고 건의하였다. 여기에서 양성지는 종래의 이제현·이색·권근으로 이어지는 학문계열과는 달리 과거제를 도입한 쌍기, 사학을 설치한 최충 그리고 도덕이 높은 이제현·정몽주·권근 등을 열거하면서 이들의 업적이 중국의 종사인물에 비해서 조금도 손색이 없음을 강조하였다. 물론 이 건의가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학문과 정치의 방향이 어떠하였는가를 알려주었다.

 도학을 강조하는 유파의 문묘종사에 대한 견해는 성종 8년(1477) 7월 任士洪이 덕을 진작하는 방안의 하나로 문묘종사문제를 거론하면서 비롯되었다.051)≪成宗實錄≫권 82, 성종 8년 7월 병술. 즉 임사홍은 이제현·정몽주·이색·권근 등의 종사문제를 거론하면서, 정몽주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으나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회의를 타나냈다. 이점은 성종도 마찬가지여서 이색의 경우 부처를 섬긴 자이므로 문묘에 종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성종대에 이제현·이색·권근으로 이어지는 학문계열이 종사되기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더구나 성종의 친정 이후 도학파 사림들이 상소를 통하여 至治의 입장에 서서 기왕의 학문과 사상을 비판하면서 이들의 종사 가능성은 희박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림계열의 학문적 입장이 그후 꾸준히 사족들의 공감을 얻어 외연적 확대를 본 데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학문계열을 설정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052) 사림계열 인사들이 현창하고자 했던 인물은 도학의 이론과 실천에 투철한 鄭夢周나 金宗直 등이며 특히 성종 당시는 김종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본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김종직 사후 거론된 김종직 시호 논의였다. 논의의 요점은 김종직의 활동을 도학과 연결하여 正心之學으로 볼 것인가 아닌가에 있었다(≪成宗實錄≫권 273, 성종 24년 정월 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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