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1. 성리학의 보급
  • 3) 문묘제도의 정비
  • (4) 도학적 문묘의례의 확대

(4) 도학적 문묘의례의 확대

 성종대에 들어와 사림 계열의 인사들은 상소를 통해 도학에 근거하여 당시 학문과 사상의 흐름이 갖는 문제를 개진하였다.053) 성종 8년 11월 朱溪副正 李深源의 상소나 성종 9년 4월 幼學 南孝溫의 상소, 그리고 성종 9년 11월 弘文館 副提學 成俔의 상소 등은 당시의 학문과 사상의 문제를 집권 훈구세력과 결부하여 제시함으로써 커다란 파문을 던졌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 사림세력의 동향이 정치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들은 상소로써 지치구현의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이 무렵 집권 훈구세력이 여러 대에 걸친 仕宦을 통하여 사원의 소유지보다도 많은 토지를 집적하여 새로운 귀족으로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민인이 귀족들이 소유한 농장에 편입되는 등 사회·경제적인 변동이 심해졌고, 이에 따라 재지사족들이 몸담고 있는 향촌의 불안정도 가중되었다. 한편 이 과정에서 국가의 물적 토대 또한 흔들리게 되는 위기 상황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변동의 한 양상으로 민인의 祀佛·祀神行爲가 국가의 금지책에도 불구하고 불식되지 않고 계속 거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과 관련하여 성종대에 특히 강조된 것이 풍속문제였고, 더구나 풍속을 바르게 하는 것은 학교 교육이 근본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054) 성종 당시의 사회문제를 풍속과 교학을 연계해서 바라볼 정도로 이 시기 사림세력의 도학에 대한 이해는 심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 위에 새로운 의례와 기구가 모색되었다고 볼 수 있다(≪成宗實錄≫권 174, 성종 16년 정월 임진). 그리하여 성종 초기 이래 향풍을 진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의식이 새로이 거행되었다. 성종 7년(1476) 7월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교화가 우선이라고 하면서 유생들로 하여금 ≪小學≫과 ≪三綱行實圖≫를 講明토록 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교화보다 앞서는 것이 없는데 교화의 시행은 반드시 학교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소학≫과 ≪삼강행실도≫를 널리 간행하여 대소민인 할 것 없이 모두 학습하여 좋은 효과가 나타날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055)≪成宗實錄≫권 69, 성종 7년 7월 갑자. 이어 성종 8년 7월에는 왕도정치와 관련하여 상징적 의미가 있는 躬耕禮·親蠶禮를 거행한데056)≪成宗實錄≫권 82, 성종 8년 7월 병술. 이어 8월에는 大射禮를 거행하였다.057)≪成宗實錄≫권 83, 성종 8년 8월 정유. 그리고 몇 개월 후에는 국왕이 성덕한 신하에게 師弟의 예를 올리는 의례로써 三老와 五更에게 사제의 예를 거행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스승을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尊師重傅하는 뜻으로서 도학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 의례는 3로로 정해진 鄭麟趾가 축재하였다는 소문이 떠도는 등 3로에 적합하지 않다는 여론으로 인해 정지되었고, 그 대신 謁聖養老禮가 거행되었다.058)≪成宗實錄≫권 89, 성종 9년 2월 병진.

 이러한 조처에도 불구하고 성균관과 향교의 부실은 심각하였다. 사림계 인사들은 학교가 교학은 물론 윤리의 실천을 통한 民風 개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학문과 윤리를 실천한 도학자를 숭모하는 장소로서 문묘와 그 의례로서 문묘향사제를 무엇보다 중시하고 다시 문묘사전을 정비하였다.059) 성종대에 들어와 도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지배관인층의 훈구화 경향으로 나타난 정치적 권력과 사회·경제적 부의 집중을 도학적 修己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들에 의해 보다 도학적 전통을 중시하는 道統儀禮가 주장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文廟儀禮와 관련해서 검토한 연구로 池斗煥,<朝鮮前期 文廟儀禮의 整備過程>(≪韓國史硏究≫75, 1992)참조. 먼저 성종 9년 4월에는 주자의 도학을 계승하는 유현의 종사 누락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中國使行을 통하여 알아보도록 하였다.060)≪成宗實錄≫권 91, 성종 9년 4월 임인. 성종 10년 3월 正朝使 李坡 등이 蔡沈·眞德秀·胡安國이 원대부터 종사되었으나 우리 나라 문묘에 누락되어 왔음을 보고하였다.061)≪成宗實錄≫권 102, 성종 10년 3월 임술. 그리하여 성종 12년 2월 성균관 문묘에 진덕수·호안국·吳澄 등이 종사되었고,062)≪成宗實錄≫권 126, 성종 12년 2월 정미. 이어 성종 16년 윤 4월에는 각 도 界首官의 향교에도 채침·진덕수·오징 등이 종사되었다.063)≪成宗實錄≫권 178, 성종 16년 윤 4월 을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렵 향풍은 개선되기는 커녕 더욱 악화되는 일면을 보였는데, 사림계 인사들은 이 문제를 지방 향교의 문묘사전의 정비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를테면 성종 16년 7월에는 주현 향교의 크기에 따라 문묘사전을 차등화하였다.064)≪成宗實錄≫권 181, 성종 16년 7월 무오. 그 내용은 첫째 개성부와 각 도 계수관의 향교는 兩廡에 속해 있는 유현까지 모두 향사하고, 둘째 기타 주부군현은 양무가 없는 관계상 양무에 속해 있는 유현을 향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가운데 주렴계·정명도·정이천·주자 등 중국의 선현 4위와 설총·최치원·안향 등 우리 나라의 유현 3위 등 7현의 위판만을 대성전 안에 두고 향사토록 한 것이 그것이다. 이 조처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양무에 속한 유현 중 도학의 정통을 계승한 네 사람을 선발하여 대성전에 향사토록 한 점과 우리 나라 유현 세 사람을 함께 향사하고 있는 점에 있다. 물론 향사의 기준은 도학의 정통을 계승하였는가의 여부였다. 이 점에서 우리 나라 유현인 설총·최치원·안향 등은 대성전에 함께 향사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원 등은 향햑에서 향사된 지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수용되었다. 우리 나라 유현으로 문묘에 오래 전에 향사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당시 몇몇 지방 향교에서 독자적으로 향학과 향풍 진작에 공이 있다고 하여 문묘에 향사하고 있었던 여타 우리 나라 유현들의 향사가 타당하지 않다 하여 黜享하는 조처를 취하였다.065)≪成宗實錄≫권 230, 성종 20년 7월 정묘 및 권 233, 성종 20년 10월 기유. 출향된 인물은 海州文廟에 향사되어 왔던 崔冲과 崔惟善 그리고 金堤鄕校에서 향사되어 왔던 趙簡이 그들이다.066) 최충·최유선·조간이 언제, 어떻게 해주문묘와 김제향교에 종사되었는지 현재로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이 가운데 최충에 대해서는 세종 원년 권근의 종사문제가 논의될 때 하륜과 함께 종사 여부가 검토된 적이 있으나 종사되지 못하였다. 정치적·학문적 여건과 분위기로 볼 때, 이들이 향교에 종사된 계기는 세조 2년 3월 梁誠之가 왕권강화에 대한 대책으로 최충 등을 문묘사전에 향사하자는 상소를 올렸을 때가 아닌가 한다. 이 건의는 국가사전상으로는 수용되지 않았지만 그대신 그들이 활동한 지역에 향사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림계 인사들은 문묘사전을 정비한데 이어 향촌 교화와 직결되는 의례와 실천기구를 강구하였다. 의례로서는 鄕射禮·鄕飮酒禮가, 그리고 실천기구로서는 세조대 혁파된 留鄕所가 그것이었다.067) 향풍 진작으로 강구된 의례 중 향사례·향음주례가 학교와 관련된 것이라면 유향소는 수령들의 지방권 행사를 규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유향소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자 한다. 사림세력의 사회적 기반으로서의 유향소에 대해서는 李泰鎭,<士林派의 留鄕所 復立運動>(≪震檀學報≫34·35, 1972·73) 참조. 사실 향사례·향음주례는 이미 세종대 왕도정치 구현의 일환으로 시도되었으나, 세종말부터 세조대에 걸친 國俗과 불교활동으로 인하여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성종대에 들어와≪소학≫이 갖는 기능을 새로이 이해하기 시작한 사림계 인사들에 의해서 다시금 주목된 의례였다.068)≪小學≫의 내용은 입교·명륜·경신의 세 가지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성종초기 관학의 교학 기능은 극도로 부실한 상태였고, 이에 따라 학교 교육을 통한 유능한 관인층의 선발은 물론 풍속의 개선도 기대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바로 이점에서 三綱(明倫)의 윤리와 함께 교화의 토대로서 學校(立敎) 그리고 그 출발로서 修身(敬身)을 강조하는≪소학≫의 학문체계야말로 이러한 현실을 시정해 줄 수 있는 것으로 사림계 인사들은 보고 있었다. 향음주례는 孟冬에 향교에서 거행되었는데, 그 목적은 충효의 예를 실천할 수 있도록 서로가 권면하자는 것으로≪소학≫의 立敎篇과 明倫篇의 덕목을 실천하는 의미가 있었다. 향사례는 매년 3월 3일 향교 근처의 장소에서 거행되었는데, 그 목적은 뜻을 바르게 하기 위한 것으로≪소학≫敬身篇의 덕목과 관계가 있었다. 이렇게 볼 때 향사례나 향음주례는 모두 소학의 덕목을 실천하는 의례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소학≫의 내용에 주목하고 있었던 인사들에 의해서 향풍 진작의 일환으로 시도되고 있었다. 즉 김종직은 성종 14년 8월에 향풍을 진작하는 방안으로 향사례·향음주례가 크게 효과가 있었음을 밝히면서 이의 시행을 권하였다.069)≪成宗實錄≫권 157, 성종 14년 8월 병자.

 성종 말기에는 소학에 기초한 교학의 성과도 향사례·향음주례에 의한 효과도 나타나지 않고 도리어 향풍이 부박해져 가고 있는 점이 거론되었다. 이 시기 향풍 문제는 두 가지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민인들의 祈佛·祈神行爲였고, 다른 하나는 국가제도의 이완과 관련하여 자행된 지방향리들의 탐학에 의한 향속의 악화였다.

 이렇게 볼 때 학문과 사상 전반에 걸쳐 개편이 요구되고 있었으나 이를 실천할 사림세력의 학문과 사상의 기반이 미약하여 그들의 요구는 현실정치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입장과 자세는 16세기 사림의 도의정치구현의 움직임으로서 중중대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는 운동으로 다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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