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1. 성리학의 보급
  • 4) 대표적인 성리학자들
  • (1) 정도전(1337∼1398)

(1) 정도전(1337∼1398)

 여말선초의 역사적 전환기를 살아가면서 그 누구보다도 고려사회의 누적된 병폐를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려 했던 인물이 정도전이다. 그의 개혁적 입장은 새 왕조 개창이라는 역성혁명의 형태로 나타났을 뿐 아니라 왕조 개창 후 정치제도 및 사회개혁 등 광범위한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이런 점에서 정도전의 사상적 기반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070) 조선왕조 개창과 관련하여 정도전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러한 역할 때문에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정도전의 역할과 사상에 대해서는 특히 다음이 참고된다.
韓永愚,≪鄭道傳思想의 硏究≫(서울大 出版部, 1973).
―――,<鄭道傳의 인간과 사회사상>(≪震檀學報≫50, 1980).
尹絲淳,<鄭道傳 性理學의 특성과 그 평가 문제>(≪震檀學報≫50, 1980).
鄭杜熙,<三峰集에 나타난 鄭道傳의 兵制改革案의 성격>(≪震檀學報≫50, 1980).

 정도전의 고려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과 그 해결방안은 당시 원나라를 통하여 새로이 수용되고 있었던 성리학에 있었다. 이 점은 그의 일련의 저술, 즉≪心問·天答≫·≪心氣理篇≫·≪佛氏雜辨≫·≪朝鮮經國典≫등에 나타나 있다. 이중≪심문·천답≫등이 그의 수신과 관련되 저술이라면,≪조선경국전≫은≪周禮≫에 근거한 제도 개혁과 그 형상화라는 점에서 치인에 해당되는 저술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치인에 해당하는 저술도 결국은 수기에 근거하고 수기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이른바「體用一源」·「顯微無間」이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먼저≪심문·천답≫은 정도전의 여러 저작 가운데서 가장 이른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저술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당시 정도전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정도전이 그의 개혁론과 관련하여 뜻을 펴지 못하고 유배중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 내용은 성리학의 기본 주제인 天道와 人道의 상호 관련성에 대한 것으로 세상사에 나타나는 천도의 분명치 못한 점에 있었다.071) 鄭道傳,≪三峰集≫권 10,<心氣理篇>, 心問. 이러한 의혹은 정도전이 고려사회의 제반 병폐를 개혁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채 성과를 거두기도 전에 자기 자신이 도리어 유배당한 현실에 대해 스스로 느끼는 감정의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의문이 어떻게 정리되는가는 정도전의 다음 행보와 관련하여 주목된다고 하겠다.

 이에 대해 정도전은 “하늘이 이치를 사람에게 부여할 수는 있으나 사람으로 하여금 반드시 착한 일을 하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이니, 사람이 하는 바가 그 도를 잃는 일이 많이 있어 천지의 和를 손상시키는 것이다”라고072) 鄭道傳,≪三峰集≫권 10,<心氣理篇>, 天答. 정리하였다. 다시 말하면 천도가 어긋나 보임도 사실은 人事가 잘못된 데서 연유한 것이지, 天의 常道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또한 천도라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것이니 즉 나의 큼으로써 덮어주기는 하나 싣지는 못하고, 낳기는 하나 성장시키지는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天과 人의 상호 관련성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러면서 그 관련성은 인도의 바른 것을 지키는 여하에 따라서 천명이 결정되는 인도 중시의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인간사회에 있어 윤리를 실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정치·경제 등에서 보였던 그의 개혁정치도 이와 같은 윤리를 실현하는 방도요, 전제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윤리를 떠나서는 정치도, 경제도, 철학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성리학적 윤리에 근거하여 새로운 사회를 세우기 위한 그의 노력이 이해되며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비추어 해가 되는 도교·불교 특히 불교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강도높게 비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말선초는 신흥관인층이 정치·사회·경제·사상적으로 성리학적 가치체계를 적극적으로 확립해 갔던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식에서 도교·불교적인 요소가 점차 배제되어 갔으나, 일반 국민은 물론 지배 관인층 심지어는 왕실까지도 여전히 불교·도교의 의식과 관념에 의존하고 있었다.

 정도전의≪심기리편≫과≪불씨잡변≫은 이러한 현실적인 상황과 분위기에서 성리학이 도교와 불교에 비해, 특히 불교에 비해 이념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제시하고자 집필된 저술이다.

 먼저≪심기리편≫에서는 心功과 養氣에 대한 공효가 각각 불교·도교에 의해서 주장되기도 하지만 心과 氣도 理(人倫)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음은 물론 금수와 다를 바가 없음을 강조하였다.073) 鄭道傳,≪三峰集≫권 10,<心氣理篇>, 理諭心氣. 결국 불교나 도교의 비현실성과 반윤리성·반사회성은 성리학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정도전이 이단을 비판하는 확고한 입장은≪불씨잡변≫에서 더욱 논리적이고 역사적으로 부연되었다. 사실≪불씨잡변≫을 저술한 태조 7년(1398)은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조의 信佛과 사회적 祈佛이 새삼 왕성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무언가 새로운 대책이 요구되었고 과거와 같이 직접적인 비판보다는 불교의 논리가 갖는 비윤리성·허구성 등이 보다 논리적·역사적으로 서술될 필요가 있었다. 그의≪불씨잡변≫19편의 항목 중 15편이 불교의 논리비판에, 그리고 4편이 불교의 역사적 허구성을 증명하기 위해 할당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074)≪불씨잡변≫19편의 항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輪廻 2. 因果 3. 心性 4. 作用是性 5. 心迹 6. 昧於道器 7. 毁棄人倫 8. 慈悲 9. 眞假 10. 地獄 11. 禍福 12. 乞食 13. 禪敎 14. 儒釋同異 15. 佛法入中國 16. 事佛得禍 17. 舍天道而談佛果 18. 事佛甚謹年代尤促 19. 闢異端.

 당시 사람들에게 여전히 호소력 있는 輪廻說·因果說·慈悲說·眞假說·地獄說·禍福說 및 心性에 내한 불교의 제반 학설을 유교적 논리와 윤리로써 그 허구성을 공박하였고, 이를 역사적으로 입증하려 한 것이 바로 佛法入中國·事佛得禍·舍天道而談佛果·事佛甚謹年代尤促 등의 항목이다.

 결국 여러 항목에 걸친 변설은 다음 두 가지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儒釋同異之辨이고 闢異端之辨이다. 유석동이지변은 앞의 15항에 걸친 변설을 다시 한번 정리·비교하여 성리학이 불교에 비해 우월한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075) 鄭道傳,≪三峰集≫권 9,<佛氏雜辨>, 儒釋同異之辨. 이것은 앞의≪심기리편≫을 더욱 논리적으로 부연한 것이다.

 요컨대 마음의 본체와 그 작용이「체용일원」·「현미무간」하다는 사실을 궁구하여 체득하여야 하는데 불가는 이러한 공부를 천근하고 지루하게 여기니, 이에 대해서는 주자가 이미 자세하게 설파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정도전은 성리학적 가치의 우월함을 주자의 입장을 통해서 재강조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大學≫에서 천명하고 있는 덕을 밝히는「明德」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을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정도전은 이 점을 벽이단지변에서 더욱 강조하였다. 즉 그가 왜 불교에 대해 그 허구성을 비판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를 말하였는데, 이 점은 맹자가 楊墨을 막는 까닭을 통해서 설명하였다. 양묵의 도를 막지 않으면 성인의 도를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맹자는 양묵을 물리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고 하였다.≪불씨잡변≫의 저술 동기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라 하겠다. 더구나 불씨의 경우 그 말이 고상하고 미묘하여 사람을 미혹시킴이 양묵보다 더 심하다 하여 聖人의 도가 시행되기 위한 방도를 제시하였다.076) 鄭道傳,≪三峰集≫권 9,<佛氏雜辨>, 闢異端之辨. 다시 말하면 성현의 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너나 할 것 없이 이단의 폐해를 물리쳐야 할 것을 역설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를 위해서≪불씨잡변≫을 저술하였다고 볼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