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2. 훈민정음의 창제
  • 2) 훈민정음의 창제
  • (1) 창제의 시기

(1) 창제의 시기

 訓民正音이란 이름의 새 문자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세종 25년(1443) 12월이었다.130) 訓民正音은 문자의 이름도 되고 책 이름도 된다. 편의상 이 글에서는 책 이름으로는 訓民正音을 쓰고 문자의 이름으로는 그 약칭인 正音을 쓰기로 한다. 이 사실은≪世宗實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달에 임금께서 諺文 28자를 친히 만드셨다. 그 글자는 古篆을 모방하였고 初·中·終 三聲으로 나뉘었으며 이들을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漢文 및 우리 나라 말을 다 적을 수 있으며 글자는 비록 간요하나 전환이 무궁하다. 이것을 訓民正音이라 한다(≪世宗實錄≫권 102, 세종 25년 12월 말미).

 이것이 어김없는 사실의 기록임은≪訓民正音≫(解例本)에 붙어 있는 정인지서문이 다음과 같은 지적에 의해서 확인된다.

癸亥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正音 28자를 찬제하시고 例義를 간략하게 들어보이시면서 訓民正音이라 이름하였다.

 계해는 세종 25년이니 그 해 겨울은≪세종실록≫의 12월과 일치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이듬해 2월에 세종의 명으로 중국 韻書인≪韻會≫(古今韻會擧要)를 번역하는 사업이 시작되었고,131)≪世宗實錄≫권 103, 세종 26년 2월 병신. 며칠 뒤에는 崔萬理 등이 正音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132)≪世宗實錄≫권 103, 세종 26년 2월 경자. 이 사건들은 정음이 분명히 창제되었음을 의심할 수 없게 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위에 든≪세종실록≫의 기록과 정인지의 서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세종 25년 말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의 새 문자에 관한 어떤 글이 발표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특히 정인지의 서문에서 “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시면서”라 하고 그 뒤에≪세종실록≫의 기록과 비슷한 표현의 말들을 한 사실은 그 당시에 발표된 어떤 글을 인용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최만리의 상소문은 다섯 조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처음 네 조목은 어떤 글의 주장들을 반박하는 것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논박의 대상이 된 것은 필시 그 때에 발표된 어떤 글이 있을 것이다. 막연한 뜬소문을 가지고 임금께 상소를 올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위에 든 세 글의 내용을 추려 보면, 세종 25년말에 발표된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세종실록≫을 (A), 최만리 등의 상소문을 (B), 정인지의 서문을 (C)로 표시하기로 한다.

㉮ 새 문자는 28자로 되었다. (A)와 (C)에 이렇게 적혀 있다. (B)에는 27자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 ㉯ 새 문자의 이름은 訓民正音이었다. (A)와 (C)에 이 이름이 분명히 나타난다. (A)에는 諺文이란 이름도 보인다. 그러나 (B)에는 언문만 보인다. ㉰ 새 문자는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뉘어 있었다. (A)에 나타난다. ㉱ 새 문자는 古篆을 모방한 것이다. (A)에 “그 글자는 고전을 모방했다”라고 말이 있으며 (B)에는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 篆文을 모방했다 하나”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C)에는 “형상을 본뜨고 글자는 고전을 모방했다”라 하여 형상을 본뜸(象形)이란 말이 이 때에 와서 덧붙었음을 알 수 있다. ㉲ 吏讀[이두]가 사용되어 왔으나 불완전하여 刑獄에도 억울함이 많은데 새 문자로 이것을 시정할 수 있다. (C)에 있는 말이다. (B)는 吏讀가 그래도 諺文보다는 났다고 주장하고, 죄인을 공정하게 다스리는 일은 獄吏의 자질에 달린 것이지 언문을 쓴다고 해서 공정해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 새 문자는 간요하나 전환이 무궁하다. (A)와 (C)에 보인다. ㉴「例義」를 간략하게 들어보였다. 이 사실은 (C)에 기록되어 있다. 새 문자가 어떤 것인가를 예를 들어 설명한 것으로 짐작된다. 종래 여러 학자들은 解例本의<해례>앞에 있는 본문이 바로 이것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였다. 매우 그럴 듯한 추측이기는 하지만, 의문이 없지도 않다. 무엇보다도 이 본문이≪세종실록≫(권 113, 세종 28년 9월)에 정인지의 서문과 함께 실려 있는 사실이 우리의 주의를 끈다. 세종 25년에 이루어진 이 본문을 3년이나 뒤에 실록에 실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한다. 더구나 이 본문 앞에는 세종의<御製文>이 있는데 이것이 25년에 발표된 것이라면 실록에 몇 해 뒤에 실릴 리는 만무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남아 있는 문헌 자료로는 세종 25년의 새 문자가 어떤 것이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간혹 세종 25년의 문자는 아직 엉성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 뒤에 수정을 거쳐 28년에 발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억측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특히 최만리의 상소문에 27자라 한 것에 주목하여 그 뒤에 한 자가 더 추가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133) 李東林,<訓民正音의 制字上 形成問題>(≪梁柱東博士華誕紀念論文集≫, 1963).
―――,<諺文字母 俗所謂 反切二十七字의 根據>(≪梁柱東博士古稀紀念論文集≫, 1973).
나중에 다시 논하겠지만, 정음은 체계를 갖춘 문자인 점으로 보아 처음부터 28자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상소문에서 27자라 한 것은 그 글을 쓴 사람이 잘못 알고 그렇게 쓴 것으로 추측된다. 정음 창제를 반대한 일부 集賢殿의 학사들이 그것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한다. 한편 세종이 스스로 창제한 정음을 미완성인 채로 25년말에 공개하고, 곧 다시 고치고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 문자로≪운회≫번역을 시작하게 한 사실도 이 문자가 완성된 상태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간혹 정음이 완전한가를 시험하기 위하여≪龍飛御天歌≫를 짓게 했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도 근거가 없는 말이다. 이런 시험이라면 25년말에 공표하기 이전에 여러 번 거듭 행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이른 정음의 모습은 세종 28년 9월에 발표된 것이다. 이것은 물론 해례본이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정음에 관하여 정식으로 간행된 최초의 책이었다.

 지금 우리로서 가장 궁금한 문제는 정음 창제의 일이 실제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일의 시작이 세종 25년 12월보다 앞섰을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아주 짧은 시일 안에 이 일을 마쳤다면 몇 달 전이었을 것이요, 오래 끌었다면 여러 해 전이었을 것인데, 어느 기록에서도 이 시작을 암시하는 말은 발견되지 않는다. 정음과 같은 위대한 문화적 업적이 이루어진 과정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마도 세종이 우리말을 자유롭게 적을 수 있는 문자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상당히 이르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뒤에 창제의 동기를 말할 때 다시 나오겠지만,≪三綱行實圖≫같은 책을 낼 때 백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자에 대한 생각이 간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형옥의 공정을 얻지 못함을 볼 때마다 그 필요성을 느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음운 이론과 문자 이론에 대한 학문이 깊어지면서 새로운 문자를 창제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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