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2. 훈민정음의 창제
  • 2) 훈민정음의 창제
  • (3) 창제의 동기

(3) 창제의 동기

 세종이 정음을 만든 동기는 무엇인가. 대답이 너무 분명하여 별로 문제될 것이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에 관한 논의가 적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추려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갈래로 나뉘는 듯하다.

 그 하나는≪훈민정음≫(해례본) 첫머리의<어제문>을 근거로 하여 우리말을 쉽게 표기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려고 한 것이 주된 동기였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 나라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漢字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로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국어는 중국어와 다르니 한자와는 다른 문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백성의 편의를 도모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어제문>에는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런 생각은 현대적 의미의 자주 정신이나 민본주의 또는 민주주의와는 동일시할 수 없다 해도, 중세의 통치자에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고 해서 조금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백성을 위하는 세종의 마음은 여러 모로 나타난다. 세종은 일찍부터 吏讀가 꺽꺽하고 막히어서 백성들의 소용에는 부적합함을 안타깝게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이보다 더 간편한 문자를 만들어서 백성들이 쓰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특히 범죄재판이 공평하게 다스려지지 않음을 가슴아프게 여겨 백성들에게 억울함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갖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정음을 처음 세상에 발표했을 때 이런 뜻을 밝혔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의 명으로 많은 책이 편찬되었는데, 그 중에는 백성들에게 널리 읽혀야 할 성질의 것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세종 16년(1434)에 간행한≪三綱行實圖≫였다. 충신·효자·열녀에 관한 행적들을 옛책에서 추려 모아 백성들의 모범을 삼으려고 편찬한 책이었으니, 한문으로 내어서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마침내 그림을 그려 넣기까지 했으니, 이 책을 널리 펴려는 세종의 뜻이 얼마나 간곡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하여 정음 창제 직후에 행할 사업들에 대한 세종의 구상 중에 이 책을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세종이 최만리 등을 힐문한 가운데 “또 鄭昌孫은 말하기를≪삼강행실도≫를 반포한 뒤에도 충신·효자·열녀가 배출됨을 못 보았다 하고, 사람의 행하고 행하지 않음은 사람의 자질에 있는 것이지 어찌 언문으로 번역한 뒤에 반드시 본받을 것이랴고 하니, 이런 것이 어찌 儒者의 이치를 알고 하는 말이냐”고 꾸짖은 데서 드러난다.

 정음 창제 뒤에 서둘러≪용비어천가≫를 편찬하게 하고 그 속에 125장의 우리말 가사를 넣게 한 사실도 예사로이 보아넘길 일이 아니다.≪용비어천가≫는 조선왕조를 세운 선조들의 여러 사적을 모아서 적고 그 내용을 노래로 부른 것인데, 민간에 전하는 民譚을 수집할 때부터 그 말들을 그대로 적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생각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하여 정음을 창제함에 미쳐 이들을 우리말로 적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세종이 새 문자로 우리 민족이 문학을 확립할 수 있음을 생각하고 그 첫 본을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은 실제로≪月印千江之曲≫도 지어서 우리 나라 詩歌문학의 길을 몸소 개척하였다. 이것은 수양대군이 지어 바친≪釋譜詳節≫을 보고≪용비언천가≫의 전례를 따라 지은 것으로 모두 500장에 가까운 장편 서사시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세종은 정음의 창제로 민족문학을 새로이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의 뜻이 얼마나 깊고 넓었던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지난 50년대이래 몇몇 학자들은 정음 창제의 동기에 대하여 위에 말한 것과는 다른 일면이 있음을 드러내고 이 일면을 도리어 강조하기도 하였다. 정음을 만들자마자 최초로 착수한 사업이 중국의 운서인≪운회≫의 번역이었다는 사실, 최만리 등이 “가벼이 옛 사람이 이미 이루어 놓은 운서를 고쳐서 자세히 고찰함이 없이 언문을 붙이고 장인 수십인을 모아서 이를 새기어 급히 세상에 공포하려 하고 있으니 이 일에 대한 온 천하와 후세 사람들의 공론이 어떠하오리까”라고 했을 때, “만약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그 누가 바로잡을 것이냐”고 큰 사명감을 표명한 사실을 중요시하여 우리 나라 한자음의 개정이 정음을 만들게 된 보다 직접적인 동기였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말하자면 한자음 개정에서 그 발음을 나타낼 부호가 필요하여 정음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정음체계 속에 우리 국어의 표기에는 별로 필요하지 않은 ‘ㆆ’자가 들어 있는 사실 등이 이런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인용되기도 하였다.

 실상 세종의 한자음 개정에 대한 열의는 대단하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운회≫번역사업은 여러 해에 걸친 노력 끝에≪東國正韻≫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었고, 초기의 정음문헌들의 한자에는 이≪동국정운≫에 의거하여 그 발음을 적게 했던 것이다. 세종이 중국음운학에 매우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음은 위에서 말했고, 이것이 바로 정음 창제의 이론적 기초가 된 것임을 생각할 때, 누구보다도 세종은 우리 나라 한자음에 많은 잘못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잘못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은 매우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한자음의 개정은 한자음을 표기하려는 데서 나타났으며 한자음의 표기는, 넓게 보아 국어표기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국어의 전면적 표기를 위해서는 한자음표기가 절대로 필요했으며, 한자음을 표기함에 있어서 잘못이 많은 현실을 그대로 인정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표준 한자음의 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동국정운≫을 편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정음은 어디까지나 국어의 전면적 표기를 위하여 창제하였으며, 순수한 국어 단어들은 그 현실음을 그대로 표기하였지만, 한자음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의 현실 발음을 그대로 적는데 만족하지 않고 개정을 했다는 특수성이 있었던 것이다.136) 현대에 와서 외래어표기법을 정함에 있어 原音 존중의 주장이 매우 컸던 사실을 생각하면 세종의 주장이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다. 세종이 행한 여러 사업 중에서 한자음 개정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간 거의 유일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정음 창제에 있어 세종은 이 문자를 한자와 함께 섞어서 쓸 수 있도록 하는데 각별히 마음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종은 한자어라 하더라도 정음으로만 적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자신이 지은≪월인천강지곡≫에서 한자어를 적을 때마다 정음표기를 크게 위에 쓰고 그 밑에다가 작게 한자를 적은 것은 이러한 그의 생각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한자음표기를 국어표기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였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좀더 넓은 관점에서 정음 창제의 동기는 당시의 정치 및 사회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위에서 세종이「便民」을 각별히 생각했음을 지적했는데 訓民正音이란 이름에 나타나 있듯이「訓民」을 통하여 사회를 좀더 개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 나라의 통치자로서 세종은 백성들이 그 뜻을 펴려고 하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음을 느끼고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전체적으로는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137) 李佑成,<朝鮮王朝의 訓民政策과 正音의 機能>(≪震檀學報≫42, 1976) 참조. 이두가 이런 백성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므로 이보다 더 간편한 표기 수단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정음의 창제는 동아시아 문자의 역사와 아주 동떨어져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세종은 중국의 주변 국가들에서 어떤 문자들이 어떻게 만들어져서 쓰였는가를 눈여겨 익히 알고 있었다. 특히 西夏文字·契丹文字·女眞文字 등이 임금의 이름으로 제작·반포된 사실이 세종에게 어떤 자극이 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특히 원나라 세조의 명으로 반포된 파스파(八思巴)문자는 세종이 익히 알고 있었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음소문자에 준하는 것이었으므로 세종에게 직접적인 암시가 될 수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138) 李基文,<東아시아 文字史의 흐름>(≪東亞硏究≫1, 198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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