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2. 훈민정음의 창제
  • 2) 훈민정음의 창제
  • (4) 제자의 원리

(4) 제자의 원리

 ≪訓民正音≫(해례본)의<解例>첫머리에 있는 制字解에는 정음 28자(初聲 17자, 中聲 11자)를 만든 방법의 원리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이제 일련의 인용문을 통하여 그 내용을 간추려 보기로 한다.

正音 28자는 각각 그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초성은 모두 17자이다. 牙音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은 모양을 본뜬 것이요 舌音 ㄴ은 혀가 웃잇몸에 붙은 모양을 본뜬 것이요, 脣音 ㅁ은 입 모양을 본뜬 것이요, 齒音 ㅅ은 이(齒) 모양을 본뜬 것이요, 喉音 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이것은 초성 글자들을 만든 기본원리가 입과 입안의 어떤 기관의 모양을 본뜬 것임을 간명하게 설명한 것이다. 즉 ‘ㄱㄴㅁㅅㅇ’ 등은 이들이 나타내는 자음들의 발음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음성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음성기관 상형설을 주장한 학자들이 더러 있었으나≪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되고 그 제자해에 이런 분명한 설명이 있음이 확인됨으로써 이 원리는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된 것이다. 이 밖의 초성 글자들은 위의 다섯 글자의 加畫의 방법을 적용하여 만들었다.

ㅋ은 ㄱ에 비하여 소리가 조금 세게 나는 까닭에 획을 더한 것으로, ㄴ에서 ㄷ, ㄷ에서 ㅌ, ㅁ에서 ㅂ, ㅂ에서 ㅍ, ㅅ에서 ㅈ, ㅈ에서 ㅊ, ㅇ에서 ㆆ, ㆆ에서 ㅎ으로 그 소리로 인하여 획을 더한 뜻이 모두 같으나 오직 ㅇ만은 다르고 半舌音 ㄹ과 半齒音 ㅿ 역시 혀와 이의 모양을 본뜬 것이기는 하나 그 체를 달리한 것으로 획을 더한 뜻이 없다.

 초성들이 발음되는 위치를 다섯으로 나누었고 이 다섯 위치에서 나는 가장 약한 소리를 표시하는 글자를 그 기관의 모양을 본떠 기본으로 삼고 이 기본글자에 획을 하나 또는 둘을 더하여 같은 위치에서 나는 강한 소리들을 표시하는 글자들을 만들었던 것이다.139) 牙音만은 예외였다. 이에 대하여 制字解는 아음에 있어서는 이 가장 약한 소리지만 그것은 喉音의 ㅇ과 비슷하여 역시 목구멍을 본떠 만들고 ㄱ으로 기본을 삼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이리하여 글자와 그것이 표시하는 소리와의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정음을 과학적이라 함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찍이 어떤 문자도 이와 같은 과학적 원리로 만들어진 일이 없었던 것이다.

 초성 글자들이 음성기관의 상형을 기본 방법으로 삼아 만들어졌음에 비하여 중성 글자들은 상형이기는 하되 그 대상이 달랐다.

중성은 무릇 11자다. ㆍ는 혀가 움츠러들고 소리가 깊으니 하늘이 子에서 열린 바 그 모양이 둥글음을 본뜬 것이다. ㅡ는 혀가 조금 옴츠러들고 소리가 깊지도 얕지도 않으니 땅이 丑에서 펼쳐진 바 그 모양의 평평함은 땅을 본뜬 것이다. ㅣ는 혀가 옴츠러들지 않고 소리가 얕으니 사람이 寅에서 생긴 바 그 모양의 서 있음은 사람을 본뜬 것이다.

 중성의 기본글자를 셋으로 보고 이 셋을 각각 하늘, 땅, 사람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동양철학에서는 이 셋을 三才라고 하여 우주 만물의 기본요소로 생각하여 왔는데 이들의 상형으로 중성의 기본글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밖의 중성 글자들은 이 기본글자들의 합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 아래의 여덟 소리는 하나가 닫힘이면 하나가 열림이라. ㅡ는 ㆍ와 같으나 입이 오므라지니 그 모양은 ㆍ와 ㅡ가 합하여 된 것이며 하늘과 땅이 처음 사귀는 뜻을 취한 것이다. ㅣ는 ㆍ와 같으나 입이 벌어지니 그 모양은 ㅣ와 ㆍ가 합하여 된 것이며 天地의 用이 사물에 나타나되 사람을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뜻을 취한 것이다. ㅡ는 ㅡ와 같으나 입이 오므라지니 그 모양은 ㅡ와 ㆍ가 합하여 된 것이며 역시 하늘과 땅이 처음 사귀는 뜻을 취한 것이다. ㆎ는 ㅡ와 같으나 입이 벌어지니 그 모양은 ㆍ와 ㅣ가 합하여 된 것이며 역시 천지의 用이 사물에 나타나되 사람을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뜻을 취한 것이다. ㅡ와 ㅡ는 ㅣ에서 일어난 것이요 ㅣ는 ㅣ와 같으나 ㅣ에서 일어난 것이요 ㅡ는 와 같으나 ㅣ에서 일어난 것이요 ㅣ는 ㆎ와 같으나 ㅣ에서 일어난 것이다.

 중성을 모두 11자라 하고 그 중의 셋은 기본자요 나머지 여덟은 이 기본자들의 복합이라고 하였다. 위의 설명에서 입이 오므라지는 ㅡ와 ㅡ에는 ㅡ가 쓰이고 입이 벌어지는 ㅣ와 ㆎ에는 ㅣ가 쓰인 점이 참으로 신묘한 느낌을 주거니와 ‘ㅡㅣㅡㅣ와 ㅡㆎㅡㅣ’ 는 母音調和에서 서로 다른 계열에 속하는데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도 참으로 신묘하기 짝이 없다.

ㅡㅣㅡㅣ의 동그라미가 위와 밖에 놓인 것은 그들이 하늘에서 생겨나서 陽이 되기 때문이요 ㅡㆎㅡㅣ의 동그라미가 아래와 안에 놓인 것은 이들이 땅에서 생겨나서 陰이 되기 때문이다.

 중성의 체계에서 문제삼을 것이 있다면 여덟 글자 속에 ‘ㅡㅣㅡㆎ’와 함께 ‘ㅡㅣㅡㅣ’가 들어 있는 점이라고 하겠다. 이들이 ㅣ에서 일어난 것이라 하여 yo, ya, yu, yǝ와 같은 二重母音임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처리한 것이다.

ㅡㅣㅡㆎ는 하늘과 땅에서 비롯된 것이라 初出이 되고 ㅡㅣㅡㅣ는 ㅣ에서 일어나서 사람을 겸하였으므로 再出이 된다. ㅡㅣㅡㆎ에서 동그라미를 하나로 한 것은 初生의 뜻을 취한 것이요 ㅡㅣㅡㅣ에서 동그라미를 둘로 한 것은 再生의 뜻을 취한 것이다.

 ‘ㅢ@ㅢ@’(oy, ay, uy, ǝy)와 같은 二重母音은<해례>의 中聲解에서「合用」으로 처리하고 있음에 대하여 ‘ㅡㅣㅡㅣ’(yo, ya, yu, yǝ)는 특수하게 처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들의 경우에도「합용」을 한다면 글자의 모양이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 있어서 이런 특수한 처리가 강구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위에서 살펴본 제자해의 설명에서 어찌하여 초성과 중성 글자들에 대하여 다 같이 음성기관 상형의 원리를 적용하지 않고 중성 글자들은 三才를 상형하였는가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된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첫째는 초성과 달라서 중성은 음성기관의 모양을 본뜨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중성의 경우에는 혀가 옴츠러드는 정도와 소리의 깊이의 정도로 구별되는데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 문자체계의 각 글자는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이 어렵다는 뜻이다. 둘째는 위의 제자해의 설명에도 나타나 있지만, 그 당시 중국에서 들어온 음운이론이 성리학의 이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성의 경우에 음성기관의 상형과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돌렸을 때, 그 기본글자 셋과 일치하는 3재를 택한 것은 당시의 음운이론으로 보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닌가 생각된다.

 종성은 따로 만들지 않고 초성을 다시 쓰도록 하였다. 이것은 홑으로 보아 넘겨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이것이 정음으로 하여금 진정한 음소문자가 되게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중성이 깊음 옅음과 닫힘 열림으로 앞에서 부르면 초성이 五音과 淸獨으로 뒤에서 화합하며 초성이 되기도 하고 종성이 되기도 하니 또한 만물이 땅에서 처음 나서 다시 땅으로 돌아감을 볼 수 있다.

 이상은 제자해의 내용을 간추린 것인데, 이로써도 정음이 좁게는 우리말의 음운, 넓게는 우주의 이치와 절묘하게 부합되는 문자체계임이 밝혀진 것으로 믿는다.<해례>의 편자들이 제자해를 “정음이 만들어짐에 천지 만물의 이치가 다 갖추어지게 되었다”는 최고의 찬사로 끝맺은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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