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2. 훈민정음의 창제
  • 2) 훈민정음의 창제
  • (5) 제자의 이론적 기초

(5) 제자의 이론적 기초

 위에서 정음의 글자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제자해의 설명을 통하여 보았거니와, 이것을 하나의 체계로서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기초가 된 이론을 알 필요가 있다.

 어떤 언어를 문자로 적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정음의 경우, 그것이 국어의 의미의 단위 즉 형태소가 아니라 그 음운의 단위 즉 음소에 기호를 주는 방법을 택한 점이 우선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음소문자(알파벳)를 만드는 경우에 우선 해야 할 일은 그 언어의 음소체계를 정확히 수립하고 이에 의하여 문자를 만들어야만 그 문자체계는 성공적일 수 있는 것이다. 정음 28자는 당시 국어의 음소체계를 올바로 밝혀낸 결과였다.

 그러면 15세기 중엽의 국어의 음소체계를 수립함에 있어 세종이 의존한 이론과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중국에서 들어온 음운학이었다. 특히 宋代에 성리학의 큰 테두리 속에서 이론화된 것이었다. 우주의 원리를 태극을 기반으로 하여 음양과 5행으로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론을 그대로 인간의 음성의 설명에 적용한 것이었다. 세종은 중국에서 편찬된≪性理大全≫(明 永樂 13년;1415)을 중시하였는데 이 속에는 음성에 관한 이론이 담겨 있는 邵雍의≪皇極經世書≫가 있어 이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믿어진다.140) 姜信沆,<訓民正音 解例 理論과 性理大全과의 聯關性>(≪국어국문학≫26, 1963) 참조.≪훈민정음≫(해례본)의<해례>는 첫머리부터 이의 강한 영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중국의 음운학은 한자의 발음을 대상으로 그 이론을 발전시킨 것이어서 국어의 음운을 연구하는 데는 여러 가지로 적합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 만약 그 이론을 그대로 국어에 적용하여 문자를 만들었더라면 그 결과는 매우 볼품없이 되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여기서 세종은 우리 국어의 연구에 적합한 새로운 이론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정음은 이 이론의 당연한 결과였다.

 이렇게 볼 때, 정음은 우리 나라 학문의 높은 수준과 빼어난 독창성을 대표하는 하나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학문은 직접적으로는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인도의 음성연구에서 온 것이다. 이 고대 인도의 음성연구가 동쪽으로 흘러와 우리 민족의 창조적 정신에 의해서 높은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고 정음이라는 열매를 맺은 것이다. 고대 인도의 음성연구가 19세기에 서구라파에 들어가 음성학이 발달하였음을 생각할 때, 15세기에 있어서의 우리 나라 음운연구가 차지하는 위치를 비로소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정음 창제자의 음운이론은 音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점은 중국 이론의 영향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우리 나라 이론과 중국 이론의 본질적 차이는 음절의 분석에서 드러난다. 중국에서는 한 음절을 두 도막으로 나누어 그 첫 도막을 聲이라 하고 나중 도막을 韻이라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한 음절을 세 도막으로 나누었던 것이다. 그 결과 초성·중성·종성이라는 새로운 술어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세 도막으로 나누는데 그쳤다면 그것은 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세 도막으로 나누고 그 첫 도막(초성)과 끝 도막(종성)의 동일성을 확인한 것이야말로 이 새로운 이론의 핵심이었다.≪훈민정음≫(해례본)<本文>의 “종성은 초성을 다시 쓴다”고 한 규정은 비록 짧은 한 마디에 지나지 않지만, 이론적으로 매우 큰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 정음이 진정한 의미의 음소문자가 된 것도 이 규정 덕분이었다.141) 李基文,≪國語 表記法의 歷史的 硏究≫(韓國硏究院, 1963) 참조.

 초성은 사실상 중국 음운학의 聲母와 같은 것이었으므로 여기서는 중국의 체계가 거의 그대로 채용되었다. 발음 위치에 따라 牙·舌·脣·齒·喉 등으로 나눈 것을 비롯하여 발음 방식에 따라 全淸·次淸·全獨·不淸不獨으로 나눈 것도 중국의 것 그대로였다. 다만 중국어에는 있으나 우리말에는 없는 구별을 하지 않은 점이 다를 뿐이다.142) 가령 齒音을 다시 齒頭音과 正齒音으로 나눈다든가 하는 것은 中國音을 표기한≪洪武正韻譯訓≫이나≪四聲通攷≫와 같은 책에서만 나타난다.

 그러나 중성이란 것은 중국 이론에서는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었다. 따라서≪훈민정음≫(해례본)의<해례>에서 전개된 중성에 관한 이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개발된 것이었다. 이렇게 개발된 이론에 입각해서 중성글자들이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중성체계는 국어의 모음체계와 모음조화를 완벽하게 파악하였음을 보여준다.

 종성도 역시 중국의 음운학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위에서 지적했지만, 종성은 초성과 같은 음소들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실은 이런 파악이 음절을 세 도막으로 나눈 이론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음의 체계에서 傍點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방점은 15세기 국어의 聲調를 표시한 것인데, 이처럼 성조까지 완벽하게 표기한 예는 세계 문자의 역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이렇게 성조까지 표기하게 된 데는 4聲을 중시한 중국 음운학의 영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와 관련된 술어들(平聲·上聲·去聲·入聲 등)이 이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중국의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우리 국어의 성조체계를 연구하여 그에 적합한 표기체계를 마련했던 것이다. 15세기 중엽의 국어에는 低調(平聲)와 高調(去聲)가 있었고 이들이 복합한 上昇調(上聲)가 있었는데, 저조에는 아무 점도 찍지 않았고 고조와 상승조에 각각 1점과 2점을 찍은 것은 조금도 흠잡을 데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학문적인 기초 위에서 새로운 문자를 만들면서 文字學을 도외시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문자학이 있어 왔으니 세종은 의당 이것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며 정음 창제에 즈음하여 세종이 이 방면에도 많은 새로운 연구를 거듭하였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세종 25년 말에 정음을 처음 공표했을 때, 글자의 모양은 古篆을 모방했다고 한 것이나, 세종 28년의<해례>제자해에서 象形을 말한 것은 중국 문자학의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한자의 기본원리가 상형이었으니, 이것이 역시 새 문자의 원리로 되었던 것이다.

 상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실제 도형이다. 정음은 점·직선·원 등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도형들로 되어 있다. 하늘을 ㆍ으로, 땅을 ㅡ으로, 사람을 ㅣ로 한 것이라든가 목구멍을 ㅇ으로, 이를 ㅅ으로, 입을 ㅁ으로 한 것은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는 도형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것은 문자뿐 아니라 모든 기호 설정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리를 궁극에까지 추구하여 그 근본에 이르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았던 세종의 학문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중국에서 글자 획의 기본을 논한 鄭樵의≪六書略≫에<起一成文圖>라는 것이 있는데 신통하게도 정음 글자와 같은 도형들을 제시하고 있음을 본다.143) 孔在錫,<한글 古篆起源說에 대한 한 考察>(≪中國學報≫7, 1967) 참조. 세종이 이것을 몰랐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므로 세종의 문자 도형연구에 이의 영향이 은연중에 나타나게 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애초에 세종이 어떻게 표의문자인 한자와 본질적으로 다른 음소문자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알파벳계통의 문자들이 우리 나라에 미쳐서 세종이 그런 문자체계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 그런 발상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 나라에 알려져 있던 알파벳계통의 문자로는 인도의 梵字, 티벳문자, 蒙古의 위구르문자, 그리고 위에서 말한 파스파(八思巴)문자 등이었다. 이 문자들을 보고 우리 국어를 표기하는 데는 이와 같은 체계의 문자가 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이두의 역사가 크게 참고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한자를 빌어서 우리 국어를 표기하려는 노력은 목적을 이룰 수 없음을 우리 나라 문자생활의 회고에서 분명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는 정반대의 방향을 택한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대담한 방향 전환이었다. 최만리 등 집현전 학사들이 이 대전환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있음직한 일이었다.

 세계 문자의 역사를 보면, 어떤 민족이 새로 문자를 채택하는 경우에 대개는 이웃 민족의 문자를 조금 고쳐서 쓰는 것이 통례였다. 세종도 그가 알고 있는 알파벳계통의 문자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여 조금 고쳐서 우리 국어를 표기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런 평범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의 강한 학구적 태도, 극도의 이론적 성향이 이 길을 택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맞는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게 한 것이다. 그 결과가 동서고금에 전무후무한 과학적인 문자의 창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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