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2. 훈민정음의 창제
  • 2) 훈민정음의 창제
  • (6) 합자법과 용자법

(6) 합자법과 용자법

 정음은 음소문자체계이지만, 그 合字法이 특이하다. 즉 초성·중성·종성을 가로 또는 세로로 나란히 배열하지 않고 한 덩어리로 만들고 만다. 이 방법에 대한 설명이<解例>合字解에 보인다.

초성·중성·종성이 합해서 글자를 이룬다. 초성은 중성 위에 쓰이기도 하고 중성 왼쪽에 쓰이기도 하니 예컨대 근(君)자는 ㄱ이 ㅡ위에 있고 (業)자는 ㆁ이 ㆎ왼쪽에 있음과 같다. 중성 가운데 둥근 것과 가로로 된 것은 초성 아래에 쓰이니 ㆍㅡㅡㅡㅡㅡ가 그것이요 세로로 된 것은 초성의 오른쪽에 쓰이니 ㅣㅣㆎㅣ가 그것이다. 예를 들면 (呑)자는 ㆍ가 ㅌ 아래 있고 즉(卽)자는 ㅡ가 ㅈ 아래 있으며 침(侵)자는 ㅣ가 ㅊ 오른쪽에 있음과 같다. 종성은 초성·중성 아래에 쓰이니, 예를 들면 근(君)자는 ㄴ이 그 아래 있고 (業)자는 ㅂ이 이 아래 있음과 같다.

 이와 같은 합자설은 알파벳계통의 문자에 전례가 없는 일이다. 파스파문자는 음절마다 띄어서 쓰는 일이 있으나 정음의 합자법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 합자법은 한자문화권에서 있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한자의 구조를 본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자와는 정반대의 음소문자를 만드는 마당에 하필 이 점에서 한자의 본을 따를 필요는 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한자와 섞어서 쓰기에 편하게 하기 위한 조처로서 세종이 마련한 것으로 믿어진다. 우리 나라의 문자생활에서 한자와 정음을 아울러 쓰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한 세종으로서는 이런 특별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해례>의 끝에 用字例가 있다. 정음으로써 국어 단어들을 적은 실례를 보인 것이다. 정음 창제 이후에 국어를 적은 문헌들을 보면 표기의 규칙에 조금씩 변한 점이 없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잘 통일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 바, 이는 그 때에 현재의「한글 맞춤법」에 필적하는 用字法의 규범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용자법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이 종성에 관한 규칙이다. 현대의 맞춤법에서도 받침이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생각할 때, 과거와 현재가 다름이 없음을 느낀다(이것은 위에 말한 합자법에 말미암은 것이었다).<해례>終聲解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설명이 보인다.

그러므로 ㆁㄴㅁㅇㄹㅿ의 여섯 자는 평성·상성·거성의 종성이 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입성의 종성이 되나 ㄱㆁㄷㄴㅂㅁㅅㄹ 여덟 자만으로 쓰기에 족하다. 예를 들면 빗곶(梨花) 의깇(狐皮) 등에서 종성은 ㅅ자로 통용할 수 있기 때문에 오직 ㅅ자를 쓰는 것과 같다.

 얼핏 보기에 별것이 아닌 듯하지만, 위의 인용은 생각할수록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해례>의 편찬자들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표기규칙을 놓고 고민했음을 이 인용을 보면 알 수 있다.

㉮ 빗곶, 의깇

㉯ 빗긋, 잇의깃

 <해례>의 편찬가들이 이런 두 가지 표기, 특히 ㉮와 같은 표기가 가능함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여간 중요하지 않다. 쉽게 말하면 ㉮는 현대맞춤법과 같은 규칙에 의한 것인데, 이것이 그 때에도 검토되었다는 것은 여간 흥미있는 일이 아니다. 결국은 ㉯쪽이 채택되어 15세기 대부분의 문헌은 이것을 따랐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龍飛御天歌≫와≪月印千江之曲≫에는 ㉮의 표기법이 나타난다. 유독 세종이 직접 관여했다고 하는 이 두 책에서 ㉮가 채택되었다는 것은 여간 주목할 만한 사실이 아니다. 이 ㉮가 세종의 주장이었을 가능성이 큼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능성이 사실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그것은 초간본≪월인천강지곡≫(상)이다. 이 책에서 ㉮의 원칙에 의한 종성표기의 예들을 보면 ‘ㅿㅈㅊㅌ’등의 경우는 본래 ‘ㄷ, ㅅ’이던 것에 붓으로 획을 덧그었고, ‘ㅊㅌㅍ’의 경우는 원래의 글자를 물로 씻어내고 새로 찍었음을 볼 수 있다. 즉 ㉯의 표기로 된 것을 ㉮의 그것으로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수정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을까. 여기서≪月印釋譜≫를 들추어 보면 그≪월인천강지곡≫부분에는 수정된 것들이 채택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월인석보≫는 세조가 자신이 지은≪釋譜詳節≫과 세종이 지은≪월인천강지곡≫을 합편한 책인데 자기의 글에서 손을 대어 고쳤으나 세종의 글은 그 원형을 존중했는데, 여기에 수정된 상태로 나타난다면 이 수정이 세종의 명으로 이루어졌음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세종이 본래 ㉮의 규칙에 따라 적은 것을 印刊을 하는 과정에 ㉯의 규칙에 따라 고쳤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것을 보고 세종이 진노하여 당장 수정을 하게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세종이 ㉮의 표기규칙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세종과 정음의 관계에 관한 매우 소중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세종이 얼마나 독창적인 학자였는가, 얼마나 이론적 성향이 강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용자법(맞춤법)의 이론을 생각해 낸 사실은 세종이 정음 창제의 일을 직접 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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