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3. 역사학
  • 1) 민족사의 체계화와 전대사의 정리
  • (2) 고려시대사의 정리

(2) 고려시대사의 정리

 고려왕조사의 체계적인 정리는 조선왕조의 건국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즉 고려시대에도 자기 왕조사를 정리하려는 노력은 부단히 이루어졌다. 고려초기부터 각 왕의 실록을 편찬하여 온 전통을 바탕으로 고려 후기에도 각 왕의 실록이 편찬되었으며, 이 실록들을 기초로 하여 의종대에는 金寬毅에 의해≪編年通錄≫과≪王代宗錄≫이 집필되었고, 충렬왕대에는 閔漬·鄭可臣 등에 의해 고려왕조사가 정리되었다. 이후 李齊賢·白文寶·李達衷 등에 의해 당해 왕조사인≪國史≫를 편찬하려는 노력이 시도되었으나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李仁復·이제현에 의한 당대사의 편수작업도 있었다.194) 鄭求福,<高麗時代의 歷史意識>(≪韓國思想史大系≫3,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1), 97∼105쪽. 이처럼 고려시대에 이미 당해 왕조사를 정리하려 했던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195) 鄭求福,<高麗後期의 歷史認識과 歷史敍述>(≪韓國史論≫6, 國史編纂委員會, 1979), 54쪽.

 그러나 조선은 역성혁명을 통해 건국한 왕조이므로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가장 먼저 정리되어야 하는 것이 前王朝史인 고려사였다. 조선건국에 반대하는 지식인이 상당히 많았던 상황에서 전왕조인 고려의 역사적 자료를 후왕조인 조선이 정리하여 고려를 역사상의 왕조로 만들고 고려왕조의 멸망과 조선왕조의 건국을 기정사실화하며, 전왕조사를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정리함으로써 조선건국의 당위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전왕조인 고려의 토지제의 문란, 사회윤리의 해이, 정치의 부패, 왕실 혈통의 단절로 인하여 조선왕조의 개창이 당연하다는 것과, 조선의 건국은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민심을 수습하고 천명을 받아 건국하였다는 것을 실증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목적 아래 조선이 건국한 직후부터 집권사대부들은 전대사인 고려사를 정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역대 조선의 왕과 신료들은 고려사의 수찬을 둘러싸고 자신이 처한 형편에 따라 여러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한 처지의 차이로 조선 전기의 고려사 정리작업은 여러 차례의 개수과정을 거쳤다.

 태조는 건국 직후인 원년(1392) 10월에 趙浚·鄭道傳·鄭摠 등에게 고려사의 편찬을 명하였다. 이에 따라 태조 4년 정월에 정도전·정총에 의하여≪高麗國史≫가 찬진되었으나, 이것은 단시일에 편찬되었으므로 고려말에 정리되었던 이제현의≪國史≫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 찬자인 개국공신들의 주관이 개입되었다 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태종이 즉위한 뒤, 조선건국과정에 대한 기록이 부실하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에 태종 14년(1414)에 河崙·南在·李叔蕃·卞季良 등에게 개수를 명하였으나, 동왕 16년에 개수의 책임자인 하륜의 사망으로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 뒤 세종은≪고려국사≫가 공민왕 이후의 기사서술에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고, 원년(1419) 9월에 柳觀과 변계량에게 고려사의 개수를 명하였다. 이는 동왕 3년 정월에 완성되어 왕에게 올려졌다. 이 때 개수된 내용은 공민왕 이후의 기사 중 고려시대 사신의 사초와 다르게 기술된 부분과 고려의 왕실용어 가운데 중국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일치하는 것 중에서 정도전 등이 다 고치지 못하였던 것을 전부 개서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반포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개찬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역시 참칭의 개서문제에 있었다.

 세종 5년에는 유관과 尹淮에게 명하여 당시 문제가 되었던 참칭의 용어라도, 그 당시 실제 상용하였던 대로 직서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실록을 대조하여 썼던 당시 용어를 그대로 직서하여 세종 6년 8월에 완성하였는데, 이를≪讐校高麗史≫라 칭하였다. 그러나 참칭한 용어의 직서를 강경히 반대하는 변계량의 주장으로 반포가 중지되었다.

 그 뒤 세종 20년에서 24년 사이에는 申槩와 權踶에 의해≪高麗史全文≫이 완성되어 왕에게 바쳐졌다. 이 때 개수된 내용은 소략한 내용의 보충과 개칭된 용어의 직서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세종 28년 10월에≪고려사전문≫의 고려 말기 기사에서 태조의 선대로부터 태조에 이르는 기록에 빠진 내용이 있음을 발견하였고, 또 역사편찬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에 세종 31년 정월에 金宗瑞·鄭麟趾·李先齊 등에게 고려사의 개찬을 명하였으며, 문종 원년(1451) 8월에 김종서 등에 의하여 이제까지의 編年體의 편찬방침을 바꾸어 紀傳體의≪高麗史≫가 편찬되어 왕에게 바쳐졌다.

 기전제≪고려사≫가 편찬된 이후에도 종전의 편년체 고려사에 대한 필요성은 상존하여,≪고려사≫가 찬진된 직후부터 편년체 고려사의 편찬에 착수하여 문종 2년 2월≪高麗史節要≫가 완성되었다.196) 조선 전기의 고려시대사 정리작업은 鄭求福, 앞의 글(1976) 및 邊太燮,≪高麗史의 硏究≫(三英社, 1982), 7∼41쪽 참조.

 이러한 여러 차례의 개찬과정을 거치면서 조선시대 왕과 신료들의 고려시대관이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나온 것이 바로 이≪고려사≫와≪고려사절요≫의 수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전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노력은≪고려국사≫의 편찬으로부터 시작하여 기전체의≪고려사≫와 편년체의≪고려사절요≫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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