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3. 역사학
  • 2) 춘추관과 당대사의 편찬
  • (3) 실록의 편찬과 보관

가. 조선 전기의 실록편찬

 조선시대 실록은 고려시대와는 달리 왕이 죽은 후 바로 편찬되었다.307) 고려시대 실록편찬에 대하여서는 鄭求福, 앞의 글(1984), 159∼173쪽 참조. 그리고 이러한 실록편찬의 관례에 따라 태조 7년(1398)에는 공민왕 이후의 실록이 편찬되었다.308)≪太祖實錄≫권 14, 태조 7년 6월 병진. 그리고 태종 8년(1408)에 태조가 죽자, 태종은 이듬해에≪태조실록≫의 수찬을 명하였다.309)≪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8월 정묘.≪태조실록≫은 領議政兼領春秋館事 河崙의 적극적인 주장과, 기사관들의 ‘삼대가 지난 다음의 실록 편찬’ 주장이 대립한 가운데 이루어진 것으로, 결국≪태조실록≫은 태종 10년에 춘추관의 주도로 편찬되기 시작하여,310)≪太宗實錄≫권 19, 태종 10년 정월 무인. 태종 13년에 완성되었다.311)≪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3월 신축. 이는 조선의 건국과정에서 여러 정치적 사건의 기술에 관한 태종의 관심과 이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 의도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편찬관례는 이후 조선왕조의 역대실록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역대 왕의 실록편찬이 왕이 죽은 후 곧바로 이루어졌다.312) 申奭鎬,<朝鮮王朝實錄의 編纂과 保管>(≪韓國史料解說集≫, 韓國史學會, 1964)의 각 왕별 실록범례 참조.

 이러한 실록편찬의 관례와 함께 실록내용에서도 고려시대와 달리 사론이 실리지 않는 변화가 생겼다. 특히 왕의 비행·비례, 신하들의 언행에 관한 사론은 거의 실리지 않게 되었다. 비록 그러한 사론이 사관들의 사초에는 작성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실록편찬의 원칙을 춘추관의 당상이 정하였으므로, 그들은 사관들이 사초에 작성해 놓은 사론을 실록을 편집할 때 넣지 않는 원칙을 고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실록편찬자들이 왕이 죽은 후 곧바로 편찬되어진 실록에서 왕을 비판하는 사론을 취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건국작업을 마치고 문물의 정비를 통해 안정기를 이룩한 이후 사론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사관들의 사론이 실록에 전재되기 시작한 것은≪세조실록≫부터였으며, 취사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성종대에는 사관들이 사론을 쓰는 풍조가 활발하였다. 그것은≪성종실록≫에 487편의 사론이 실려 있는 점에서 알 수 있으며,313) 鄭求福, 앞의 글(1987), 45쪽. 그 이유는 당시 사관들의 비판의식이 강해졌다는 데 있다.314) 車長燮, 앞의 글(1983), 36∼37쪽에서는 이러한 이유로 사림의 진출이 활발하였던 점을 들고 있으나, 사론의 왕성한 집필과 사림진출을 바로 연결시키기에는 힘들다. 이는 사관들의 지적 분위기가 성숙되었다는 점과 당시 훈구파들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비리를 자행한 정치현실이 서로 괴리되었기 때문에 낱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사관들의 사론은 대부분 인물에 관한 유교적·도덕적 관점에서의 평가였으므로 이후 정쟁의 불씨를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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