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3. 역사학
  • 3) 역사학과 역사사상의 성격

3) 역사학과 역사사상의 성격

 조선 전기 사회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유교가 채택되었다. 따라서 유교 이외의 다른 학문과 종교는 이단으로 배척·금압되었다. 사회사상은 유교에 기초한 성리학적인 이념의 실현을 지향하였다.≪朱子家禮≫의 보급에 따른 성리학적 예치주의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군주와 신하의 위계관계, 부자·부부 사이, 주인과 노비 사이의 강상의 윤리는 가장 강조된 덕목이었다. 또한 성리학은 전통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불교를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교·양명학 그리고 전통적인 좋은 풍속까지도 배제하려는 극히 폐쇄적인 학문이었다. 이러한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폐쇄성은 조선사의 전개를 크게 제한하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이러한 성리학적 예치주의는 조선 전기 유학적인 역사관 정립에도 크게 작용하였다. 역사도 이러한 중세의 보편주의적 유교사관에 의해 정리되었다. 이는 고려시대에 이룩된 유교사관의 계승이었다. 그런데 조선 전기의 역사학에서는 새 왕조의 건설과 관련하여 정치성을 강하게 띠었다. 그리하여 고려왕조를 역사상의 왕조로 만들기 위해 고려사를 정리하였고, 새 왕조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당대사를 정리하였으며, 조선왕조가 정통국가임을 강조하기 위해 전대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권근의≪동국사략≫에서 볼 수 있듯이 사대명분론에 입각한 역사사실의 포폄이나 변개가 나타났으며, 성리학에 입각한 중화주의적인 문화의식이 보편성과 정통성을 판별하는 가치기준으로 등장하였다. 이는 중세문화의 전형인 유교문화를 수용하고, 또 중국 중심의 유교적인 보편성을 가장 중요한 사회사상으로 제기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나름의 문화사적인 의의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대외관계와 관련하여 이해하여야 할 점이다.

 또 하나의 성격은 이러한 대외적인 사대명분론 외에 대내적으로는 자국사의 자주성을 강조하였다. 단군이 ‘受命之主’로 재인식되면서 ‘敎化之主’인 기자와 별개로 민족시조로서 단군의 재인식이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그리하여 자국사의 독자성과 자주성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진전하여 단군에까지 자국의 연원을 끌어올림으로써 민족의 역사성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었다.

 한편 새 왕조 개창에 따라 건국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용비어천가≫를 지었는데, 여기에서도 나타나듯이 새 왕조의 개창이 하늘의 명을 받고 민심의 귀의를 얻어 이루어진 역성혁명임을 강조하였으며, 조선의 건국은 선양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홍보하여 새 왕조의 정통성을 주지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초기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대대적인 편찬사업을 벌여 나갔다.

 그러나 역사의 정리를 통해 역사상에 나타난 사실 속에서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찾아 제시하여 지배권력을 영구히 하려고 도모함으로써 역사학은 강한 정치성을 띠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사서들은 거의 대부분 관찬 사서이며, 사찬이라 하여도「어제찬」이었으므로 역사서가 강한 정치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었다. 즉 역사학이 경학에 예속되어 강한 정치성을 띤 이데올로기의 대변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립하는 또 다른 경향이 나타났다. 바로 조선 초기 고려왕조사 정리에서 나타난 직서주의에 대한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이 고려 말기와는 또 다른 발전을 이루었다. 또 고려사의 편찬과정이나 실록의 편찬과정이 보여주듯이 사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태도가 역사학의 방법으로 강하게 주장되기 시작하였다는 특징도 지니고 있다.

 고려사의 편찬에서 편찬자들은 고려 후기 무신집권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가하여 왕조멸망의 계기로 파악하였다. 이는 당시 무신들의 지위를 억압하려는 문신중심적 역사관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조선왕조 전기간에 걸쳐 문신우위의 정치를 할 수 있었던 이데올로기였다.

 또한 조선 전기 역사학의 특징은 유교윤리에 입각한 새로운 중세적 합리주의에 의한 역사 편찬이 이루어졌으며, 왕조개창에 따른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학이 강한 정치성을 띠면서도, 개관적인 역사학 방법이 모색되기도 하였던 시기라는 점이다. 또 다른 특징은 이 시기의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이지만, 역사학은 관료지식인들에 의하여, 정치적 안정과 재정확보를 통해 가능했던 국가의 지원을 받아 이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이 시기에는 아직 전문역사학자가 출현하지 않았으므로, 국가적 편찬사업의 직책에서 벗어나면 역사에 대한 관심은 곧 바로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역사학은 당대의 문제를 역사적 인과를 통하여 발견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적었다. 다시 말하면 이들 역사학은 기록을 남기기 위한 역사편찬이었으며, 지배층 중심의 역사학, 정치사 중심의 역사학, 교훈 중심의 역사학이라는 한계성을 가졌다고 할 것이다.

<鄭求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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