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4.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의 제작
  • 1) 지리지의 편찬
  • (3)≪경상도속찬지리지≫이 편찬

(3)≪경상도속찬지리지≫이 편찬

 세조는 단종 원년에 癸酉靖難을 일으킨 후 사실상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단종 원년 10월에 정인지에게, 지리지를 편찬하고자 하는데 누가 그 일을 맡기에 적합하냐고 물었다. 정인지는≪高麗史≫지리지를 편찬한 경험이 있는 梁誠之를 추천하였고, 그가 이 일을 맡게 되었다.352)≪端宗實錄≫권 8, 단종 원년 10월 경자. 양성지는 단종 2년에≪京畿地理志≫를 편찬하였고, 단종 3년에는≪平安道地理志≫를 편찬하였다.353) 梁誠之,≪訥齋集≫권 4,<進新撰地理志>. 이어 단종이 퇴위하고 세조가 즉위하자, 세조는 양성지에게 8도지리지 편찬을 다시 명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양성지는 8도지도를 만드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리지 편찬사업은 미루어졌다. 예종이 즉위하자 다시 양성지에게 8도지리지 편찬사업을 맡기고 전국 8도에 지리지 편찬에 필요한 자료를 제출하라고 명령하였다.

우리의 금상 전하가 즉위한 다음해인 기축년 정월 上澣에 특별히 각 도에 명령을 내려 前志를 속찬하되 빠진 부분과 소략한 부분을 보충하라고 하셨다(≪慶尙道續撰地理志≫序文).

 이와 같이 예종은 즉위 다음해인 원년(1469) 정월에 각 도에 명을 내려 前志를 보충하여 편찬하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전지는≪세종실록지리지≫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지리지 속찬사목에서는 “各州鎭 庚戌年以後 設立革罷等事”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경술년은 세종 12년(1430)이고,≪세종실록지리지≫의 연혁변화 중 마지막 기준년도이다. 또≪경상도속찬지리지≫의 연혁을 살펴보면≪세종실록지리지≫이후의 달라진 사항만을 적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경상도속찬지리지≫는≪세종실록지리지≫를 보충하는 작업일 뿐이었으므로, 정월에 편찬을 지시하여 3월에 편찬이 완료되었다. 3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에 道志를 편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경상도속찬지리지≫가 편찬된 것은≪세종실록지리지≫이후의 달라진 사항만을 보충 정리하였기 때문이다. 이 지리지는 경상도관찰사였던 金謙光의 지휘하에 金海府使 李孟夏, 慶州敎授 朱伯孫, 星州敎授 張繼弛, 安東敎授 趙昱 등이 편찬에 참여하였다. 한 질은 서울로 보내고, 이번에는 부본을 4질 만들어서 4곳에 界首官에 보관하여 후일에 참고가 되도록 하였다.354)≪慶尙道續撰地理志≫序文. 金謙光은 예종 즉위년(1468)부터 성종 즉위년(1469)까지 경상도관찰사로 근무하였음을 先生案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경상도속찬지리지≫는 그의 지휘하에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의 속찬사목은 다음과 같이 모두 29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① 각 州·鎭 연혁 중 경술년 이후 달라진 일 ② 界首官이 관장하는 주·진 ③ 屬縣이 來屬한 해 ④ 향·소·부곡의 수 ⑤ 貢稅의 경로 ⑥ 제언과 관개면적 ⑦ 鹽盆處 ⑧ 講武場 ⑨ 봉화시설 ⑩ 역 참 ⑪ 목 장 ⑫ 전대의 陵寢과 명현의 祠墓 ⑬ 유명한 嶺峴의 이름 ⑭ 津 渡 ⑮ 距京里數 (16) 種養藥材 (17) 어 량 (18) 도기소와 자기소 (19) 금·은·동·철의 산출처 (20) 읍성과 산성의 규모 (21) 관 방 (22) 유명한 樓臺 및 樓題 (23) 僧 寺 (24) 院 宇 (25) 險阻要處 (26) 緊關地名 (27) 해도의 상황 (28) 양계의 본영 건치연혁 (29) 양계와 접하고 있는 야인의 대치상황

 위의 29개 사목에서 알 수 있듯이,≪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 단지 양계지역의 여진족에 대해서 자세히 조사하도록 한 점이 다르다. 이는 세조대 李滿住가 지휘하는 야인들의 노략질을 겪었으므로 그에 대한 대비책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각 군현별로 29개의 사목 중 해당항목만 적고 해당사항이 없으면 그 항목을 생략하였다.≪세종실록지리지≫와 특히 다른 항목은 (22)의「樓題」이다. 이 항목은 후에≪東國輿地勝覽≫에 확대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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