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4.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의 제작
  • 1) 지리지의 편찬
  • (4)≪동국여지승람≫의 편찬

(4)≪동국여지승람≫의 편찬

 ≪동국여지승람≫의 편찬과 조선 초기의 지리지 편찬의 완결을 뜻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 초기에는 세종 7년(1425)에≪경상도지리지≫의 편찬을 비롯하여 세종 14년에는≪8도지리지≫가 편찬되었고, 이를 보충하여 단종 2년(1454)에≪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되었다. 그 후 세조는 集賢殿 직제학 양성지에게 지도 제작과 지리지 편찬사업을 맡겼다. 양성지는 단종 2년에≪경기지리지≫를 편찬하였고 단종 3년에는≪평안도지리지≫를 편찬하였으나, 세조의 죽음으로 지리지 편찬사업도 일시 중단되었다. 예종 즉위년에 양성지는 다시 8도지리지 편찬의 명을 받고 지리지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는 전국에 지리지 편찬에 필요한 자료를 제출하도록 요구하였는데, 그 작업의 일부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이≪경상도속찬지리지≫이다. 양성지는 10년간의 노력끝에 성종 9년(1478)에≪8도지리지≫편찬을 완료하였다.355)≪成宗實錄≫권 138, 세종 13년 2월 임자. 그 전에 양성지는 세조 13년(1467)에≪海東姓氏錄≫을 편찬하였으며,356)≪世祖實錄≫권 41, 세종 13년 정월 임진. 徐居正 등은≪東文選≫을 편찬하였다.357)≪成宗實錄≫권 55, 성종 6년 5월 을묘. 이러한 편찬작업의 기초 위에≪동국여지승람≫이 성종 12년에 50권으로 편찬되었다.358)≪東國輿地勝覽≫徐居正 序.≪동국여지승람≫은 양성지의≪8도지리지≫와≪해동성씨록≫, 서거정 등이 편찬한≪동문선≫등을 종합하여 송나라 祝穆의≪方輿勝覽≫체재에 맞추어 편찬된 조선 초기의 지리지 편찬의 완결편이다.

 이 때 편찬된≪동국여지승람≫은 바로 간행되지 않고 초고본 상태로 보존되다가,359)≪成宗實錄≫권 139, 성종 13년 3월 갑오. 성종 16년에 金宗直 등에게 명나라의≪大明一統志≫체재에 맞추어 개편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책은 축목의 책을 모방하여 중요한 사적을 들고 겸하여 시문을 널리 찾아 뽑아서 기록하였으니 국가에 진실로 유익한 문헌이나, 그 중에 산천과 옛날 사실이 더러 빠진 것이 있고 여러 사람이 지은 시문에는 지저분하고 혼잡스러운 것이 자못 있을까 염려되니 너희들은 마땅히 교열하고 수정하여 精하고 적당하도록 힘쓰되 그 범례는 한결같이≪대명일통지≫를 법 삼으라(≪東國輿地勝覽≫金宗直 跋).

 위와 같이 성종의 지시내용은 첫째 편찬체재를 바꾸라는 것이었다. 종래≪동국여지승람≫은 축목의≪방여승람≫체재인데 이를≪대명일통지≫체재로 개편하라는 것이다. 둘째 산천과 사적의 빠진 부분을 보완하고, 셋째 시문의 번잡을 피하여 가려 뽑으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성종의 지시를 받은 김종직 등은 경복궁의 홍문관에 局을 개설하고 개편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작업은 旱災 때문에 곧 중단되었다가, 그 이듬해인 성종 17년(1486) 8개월의 작업 끝에 끝났다. 산천·성곽·누대·사묘·사찰 등은 計吏와 邸主에게 물었고, 건치·풍속·인물·고적은 모든 史書와 문서·문집을 대조하여 그릇된 것은 바로잡고 빠진 것은 보충하여 첨가하였다. 이렇게 하여 삭제한 것도 한둘이 아니지만 보탠 것도 매우 많으므로 다시 개정하여 55권으로 만들었다.360)≪東國輿地勝覽≫金宗直 跋. 이 개편작업을 주관하였던 김종직도 “비록 감히≪일통지≫에는 견주지 못하나≪방여승람≫에 비교하면 실로 부끄러움이 없다”고 자부하면서 후세에 많은 혜택을 주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361) 위와 같음. 이 때 김종직 등이 교정한≪동국여지승람≫은 더욱 다듬어져 그 이듬해인 성종 18년 2월에 조정에 바쳐졌다.362)≪成宗實錄≫권 200, 성종 18년 2월 무인. 성종은 이≪동국여지승람≫을 바로 刊印하도록 하명하였고, 인쇄본≪동국여지승람≫은 성종 18년 2월에 초간되었다.363)≪成宗實錄≫권 200, 성종 18년 2월 경신.

 그러나 2개월 후 김종직은 경연석상에서≪동국여지승람≫편찬의 문제점 두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산천의 위치에 대한 기록은 읍인들에게 물어서 기록한 것일 뿐 측량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과 차이가 많다는 것이고, 둘째 토산물은 土貢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읍인들이 꺼려서 실상을 말해주지 않아 실제와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성종은 토산물은 중국과의 조공문제도 있기 때문에 소략해도 괜찮지만 산천의 위치가 잘못된 점은 반드시 고쳐야 하므로,≪동국여지승람≫의<山川志>를 각 도의 감사에게 베껴서 보낸 후 그 회답을 기다려 정확하게 개정하도록 지시하였다.364)≪成宗實錄≫권 202, 성종 18년 4월 신묘. 그러나 이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어 산천의 위치를 어떻게 바로잡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연산군 3년(1497)에 成俔·李德崇·任士洪 등에게≪동국여지승람≫의 개정을 명하였는데, 그 내용은 노정의 里數, 題詠의 정확, 산천과 사적의 빠진 것 등을 보충하는 것이었다. 성종대에 산천의 위치를 시정한 것이 연산군대에 개정하면서 보완된 듯하다. 이 개정작업은 2년 후인 연산군 5년에 끝났다. 2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된 것으로 미루어 상당부분 개정된 듯한데, 임사홍의 발문365)≪東國輿地勝覽≫任士洪 跋.을 제외하면 뚜렷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개정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중종이 즉위한 후 연산군대의 잘못된 관제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지방 군현의 연혁에 변화가 많았으므로≪동국여지승람≫의 개편작업이 자연스럽게 거론되었다. 중종은 23년(1528)에 李荇 등에게 연산군대의 관제를 경신하도록 하였다. 또 군현의 이동과 분할을 아직 개정하여 기록하지 못하였으며, 그 동안에 생긴 효자·열녀의 행실과 아름다운 시문을 새로 가려 기록하지 못한 것이 많으니, 그런 것을 상고하고 모아서 증보하여 바치도록 하였다.366)≪新增東國輿地勝覽≫洪彦弼 跋. 그후 校書館에 편찬청을 설치하고 자료를 모았으나 旱災 때문에 두 번 중지되었다가 중종 25년에 비로소 편집할 수 있었는데, 그 분량은 5권이었다.367) 위와 같음. 편집책임자였던 이행은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별도의 책을 만드는 것보다 이전에 편찬된 책에 새로 첨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건의하였고 그대로 시행되었다. 특히 책을 따로 만든다면 계통과 두서가 없어지기 때문에 전에 만든 기록에 첨가해 넣어서 앞의 것을 쫓아 계승하고 옛것에 따라 더함으로써, 한 시대에 편집한 것 같고 한 솜씨에서 나온 것 같도록 하였다.368)≪中宗實錄≫권 62, 중종 23년 8월 기유. 이≪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25년에 개편작업이 완료된 후 중종 26년 6월에 간행되었다.369)≪新增東國輿地勝覽≫洪彦弼 跋. 이와 같이 3차의 인출을 거듭한≪동국여지승람≫은 민간의 소장을 금했기 때문에 수효가 넉넉하지 못하였고,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로는 더욱 희귀해져서, 광해군 3년(1611)에 중종대의 신증본을 그대로 복간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동국여지승람≫의 편찬 필요성은 편목의 설명에 잘 나타나 있다. 연혁을 먼저 쓴 것은 한 고을의 흥폐를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이며, 풍속은 한 고을을 유지하는 바이며, 形勝은 四境을 지탱하는 바이므로 명산대천으로 經緯를 삼고 높은 성과 큰 보루로 襟抱를 삼기 때문이다. 廟祀는 祖宗을 높이며 신기를 존경한 바이요, 궁실은 상하의 구분을 엄하게 하고 위엄과 무거움을 보이기 위함이며, 5部를 정한 것은 坊里를 구별한 것이며, 여러 관청을 설치한 것은 모두 사무를 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능침은 조종을 깊이 편안하게 하는땅이며, 祠와 壇은 국가의 중요한 전례이기 때문이며, 학교는 한 나라의 인재를 기르기 때문이며, 旌門은 3강의 근본을 표창하는 것이다. 사찰은 역대로 그 곳에서 복을 빌던 곳이며, 祠墓는 선현을 사모하여 추숭하는 곳이다. 토산은 貢賦가 나오는 바요, 창고는 공부를 저장하는 곳이다. 누대는 때에 따라 놀며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요, 院宇는 행려객들을 쉬게 하고 도적을 금하기 위함이며, 관방을 웅장하게 한 것은 暴客을 방비하기 위함이며, 站驛을 벌여 놓은 使命을 원활하게 전달하기 위함이며, 인물은 과거의 어진이를 기록한 것이요, 名宦은 장래에 잘 하기를 권장하기 위해서이다. 마지막으로 題詠 항목을 설정한 것은 物象을 읊조리며 王化를 노래하여 칭송함은 시와 문 밖에 없기 때문이다.370)≪東國輿地勝覽≫徐居正 序.

 위와 같이 편찬된≪동국여지승람≫은 8도의 지리가 마음과 눈에 환하여 문을 나가지 아니하고도 손바닥을 가리킴을 보는 것 같이 자세하여,371)≪新增東國輿地勝覽≫李荇 箋. 반드시 장차 왕화가 만세토록 이어질 것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하였는데, 체재는≪大明一統志≫대로 편찬하였다. 두 지리지의 편목을 비교하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뚜렷해진다.

 ≪동국여지승람≫의 전체 편목은 31개이고≪대명일통지≫는 19개인데, 이 가운데 두 지리지의 공통되는 편목이 16개나 되며 그 명칭도 동일하다. 그렇지만≪동국여지승람≫이≪대명일통지≫의 단순한 모방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동국여지승람≫의 편찬자들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대명일통지≫의 체재를 원용한 것이다. 즉≪동국여지승람≫의 총 편목수가≪대명일통지≫보다 12개가 더 많다거나,≪대명일통지≫에서 도교와 불교를 총칭하여 寺觀이라 한 것을≪동국여지승람≫에서는 불교에 국한시켜 佛宇라고한 것, 성씨·역원·봉수항 등이≪동국여지승람≫에만 설치되어 있는 것 등은 편찬자들이 단순히≪대명일통지≫의 체재를 따르려고만 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표 1>참조).372) 鄭杜熙, 앞의 글(1976b).

     編目

地理志


沿



























關 梁














東國輿地勝覽  
大明一統志                        
     編目

地理志












佛 宇
































 


東國輿地勝覽        
大明一統志          

<표 1>≪東國輿地勝覽≫과≪大明一統志≫의 編目比較

 ≪동국여지승람≫은 세종대 편찬된≪8도지리지≫와≪세종실록지리지≫, 성종대의≪8도지리지≫등을 종합하고, 명의≪대명일통지≫의 영향을 받아 편찬된 조선 초기 지리서의 종합편이다. 이 지리서는 정치·경제·군사 등 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사항들을 총망라했을 뿐 아니라 인물·시문 등을 수록하여 조선왕조의 역사적 정통성을 강조하고 왕화가 만세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의도에서 편찬된 것이다.

<李相泰>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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